별 달기
등장인물
호철
혜경
경찰
사람 1.2.3.4.
젊은이 1.2.3.
동네 남자 1.2.3.
동네 여자 1.2.3.
시간: 1970년대 중반
장소: H 읍내 여러 곳
장면1
(8월 어느 날 저녁, H 읍내의 다방. 선풍기도 더위에 지친 듯 삐걱거린다. 그렇지만 다방안의 사람들은 더위도 잊은 듯 심각한 표정이다. 귀에 익은 "오늘도 걷는다마는……." 이라는 대중가요의 가사가 구성지게 흘러나오며 매우 감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다방 한 쪽에 네 사람의 시골 유지들이 모여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중 어떤 사람이 심각하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한다.)
사람1: 호철이가 어제 출감했다면서?
사람3: (과장된 몸짓을 하며) 이곳 읍내 분위기가 어쨌는지 알아? 옛날 마카로니 웨스턴류의 영화 기억나지? ''황야의 무법자,'' ''장고,'' 뭐 그런 영화 있었잖아?
사람2: 호철이 출감과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사람3: 그가 고향에 버스를 타고 내리던 날, 터미널에서부터 이곳 사람들 모두가 공포에 떨더라는 거야! 온통 침묵, 공포 의 침묵이 온 읍내에 감돌더라는 거지! 그의 첫 마디가 뭔 줄 알기나 해? 여러 놈 손봐줘야겠다고 하더래.
사람2: (겁먹은 표정으로) 그래서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우리들이 여러 번 면회 간 것 아닌가?
사람3: 우리야 상관없겠지!
사람1, 2, 4: 그럼! 우리야 그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면회 가서 차입금도 넣어 주고 말일세!
사람3: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지. 마음이 조석으로 변하는 친구라서! 지난번에도 어쨌나?
사람1: 마담한테 커피를 한 바케츠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난리가 안 났는가? 커피 한 바케츠가 뭔가?
사람4: 커피를 바케츠로 담아 오지 않는다고 해서, 다방을 다 때려 부셨지? 유리창도 전부 박살을 내고 말일세!
사람2: (사람1을 향해) 경찰한테 잡혀가면서, 다방 주인인 자네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 "다시 나와서 네 놈 배때기를 ……."
사람1: (손을 저으며 겁먹은 얼굴로) 그런 이야길랑 그만하게, 제발 부탁이네. 그래서 그가 감옥 안에 있을 때, 면회도 여러 번 갔지 않았는가? 나하고는 이제 많이 풀렸어!
사람3: 그때 마담이 다른 데로 가 있으면서도 호철이를 많이 동정 한다던데? 그래서 그가 감옥에 있을 때도 자주 찾아 갔다 면서?
사람1: 그년 이름이 혜경이라고 했던가? 그년도 미친년이지! 그 친구를 동정하다 못해 사랑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 그래서 이제 그 친구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 걸!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날도 그년이 두부 사서 그 친구에게 먹였데. 다시는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된다며, 그리고 둘이서 남보라는 듯이 한번 잘 살아 보자고 그러더래. 면회를 차일피일 미루어 오다가 출감하던 날, 부리나케 찾아간 기자 협회 부회장인 진철이 말에 의하면, 마치 신파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더래.
사람2: 혜경이 년 덕에라도 그 친구 사람 되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원래 그 친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구!
사람3: 그게 무슨 소리야? 호철이가 전과 몇 범인가?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면서) 별을 열 개도 더 단 친구라구!
사람2: 그렇지만 큰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 간 것은 아니지. 고아로 자라서 어떤 때는 추운 겨울을 이기기가 어려워서 감옥을 택한 적도 있었다고 하더라구!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전과자를, 우리들 중에 그 누가 반가워하며 일자리를 준 적이 있었던가?
사람3: 자네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가 의적이라도 된 것 같네. 그렇다면 그가 한 행동들이 모두 잘했다는 말인가? 꼭 그렇게 들리는 걸!
사람2: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네. 그렇지만 사회는, 그리고 이곳 유지들이란 우리는, 책임이 없었는지 생각해 본 거네. 여덟 번 째 감옥에 들어갈 때 이야기를 해보세. 그때 양조장 정 사장이 돈 몇 푼주겠다고 하면서, 경쟁업체 주인을 호철이가 손 한 번 봐주면 좋겠다고 했었다며? 그런데 그 부탁을 한 정 사장의 면상을, 그 자리에서 두들겨 패 주고 그때도 감옥에 들어갔지 않았나? 초범 같았으면 그게 어디 감옥 에 들어 갈 일이었는가? 전과가 있는, 그것도 여러 번 말 일세, 그래서 감옥에서 썩다 나왔는데, 그 때 우리 모두 호철이를 동정하지 않았던가? 그 친구 입장에서 보면 우리 들이 썩은 동태로 보일 테지, 안 그래?
사람1: (고개를 끄덕이며)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어! 호철이를 나무랄 수만은 없지. 3년 전에 기자 협회장을 죽을 만큼 손 봐 준 것도 뭣 때문이었는가? 공무원이 유부녀를 건드린 것 잘했다는 말은 아닐세. 그 약점을 잡아 가지고 읍내 기자 놈들이 돌아가면서 그 공무원 돈을 뜯어 먹고 자기 신문 한 부씩 구독케 하지 않았던가? 돈 못 먹은 조 기자가 늦게 그 사실을 알고 돈을 요구하고 자기 신문 구독을 강요하다가 안 들어 주니까 소위 기자라는 사람이 그를 구타를 하고……. 그 공무원은 기자들 등살에 신문을 14종류나 구독했다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 진 것 아닌가? 세상에 그런 일이 이 지역에서 일어나도 우리들 중, 누구 한 사람 용감하게 나선 적 있었던가? 호철이가 그 사실을 알고 기자 협회 사무실에 쫓아가서 기물 다 때려 부수고 기자 협회장을 안 죽을 만큼 두들겨 패준 것 아닌가? 그때 나는 그 친구 행동에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네!
사람2: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래, 그 말이 맞네! 그의 전과 중에 납득이 안 가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대부분은 자기 나름대로의 의협심 때문이었어!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그래서 그가 출감하기 직전에 기자 협회장이 부회장 진철이를 시켜 호철이를 면회 가게 했던 게로군! 협회장 이하 모든 기자들이 지금 쯤 벌벌 떨고 있겠는 걸? 그렇지만 우리들도 안심할 수만은 없어! 우리들 도박하는 것도 호철이가 곱게 보지는 않을 걸? (사람4를 가리키며) 자네 여자 건드리는 것도 조심하라구! 여기 오는 다방 여자들을 모조리 자네가 다 먹어치운다면서? 호철이 귀에 들어가면 자네도 좋지 못할 걸세!
사람4: (겁 먹은 표정으로)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나? 한두 번 그런 적은 있어도. 워낙 이곳은 좁은 읍내라 무슨 일이든 침소봉대가 된다니깐……. 하여튼 조심함세.
사람3: 그렇다고 호철이가 지난 번 이 다방을 때려 부순 것은 잘 한 짓인가?
사람2: 무슨 소리! 그 날도 그럴 사연이 있었지!
사람3: 그만 두세! 다른 이야기나 하세 그려! 어쩐지 호철이의 출감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하는군! 이번에는 별 일 없어야 할텐데…….
사람1: 그러세! 어이, 마담 여기 시원한 것 한잔씩 가져다주소!
(조명이 어두워진다.)
장면2
(같은 날 저녁 8시 경. 과수원 원두막. 포도와 통닭, 소주병 등이 탁상 위에 놓여 있고, 30대 중반의 호철과 20대 후반의 혜경이 통닭은 이미 다 먹고 이제 포도를 먹고 있는 중이다. 주변에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고, 모기향이 피워져 있다. 주로 혜경이 말하고, 호철이는 듣고 있는 편이다.)
혜경: 오빠!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이해하겠지? 나도 처음에는 오빠를 무서워했다구! 사귀어 보니깐 그토록 순한 사람이 왜 그렇게 거칠게 살아 왔어? 이제 내가 곁에 있으니 제발, 그러지 마! 이제는 곁에 딸린 여자를 봐서라도 그러지 마, 응?
호철: (얼굴엔 눈물 자국이 보이며) 너, 이러지 마라! 내 마음 약해진다! 원래 세상이 잘못 된 거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란 말이다. 처음부터 내가 이렇게 악독해진 게 아니란 다. 뱀이 독사가 된 거란 말이다. 이왕에 버린 몸, 보기 싫은 놈들 전부 손 좀 봐줘야 겠다. 감옥에서의 생각은 온통 그것 뿐이었다. 손봐줄 놈들, 이름 하나 하나 내 수첩에 다 기록해두었다. 자기가 미워하는 놈을, 돈 줄 테니 배때기 찔러 버리라고 한 놈, 그 놈이 사람이냐? 아무리 인생을 포기 한 나지만, 그 놈은 나보다 더 못한 쓰레기더라! 그놈 상판 때기도 다시 한번 봐야겠다. 지난번 내가 두들겨 패준 이후 로 얼마나 변했나 볼 겸 말이다. 그런 말하는 순간의 그놈 얼굴을 지금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혜경: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 별 인간들이 다 있어, 오빠! 내가 뭐 요조숙녀야? 나도 쓴맛 단맛 다 본 여자란 말이야! 그렇다고 세상 탓만 하면 뭘 해? 서로 마음 아픈 사람끼리 의존하기로 했으면 내 말 들어, 오빠! 제발 그렇게 해! 헌데, 지난번에 듣긴 했지만 오빠 인생도 나처럼 참으로 기구하던데, 안 그래?
호철: (지난날을 회상하듯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6.25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우리 집에서 머슴 살던 놈하고, 또 한 놈, 그러니까 무지막지한 두 놈들이 우리 식구 11명을 몰살 시켜 버렸단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갑자기 그 놈들 이 죽창을 들고 집에 들어와 나까지 12명을 끌고 나갔어. 그 순간 나는 무서워서 대문 뒤로 숨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내가 왜 갑자기 때문 뒤로 숨을 생각을 했었는지를.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형과 누나들, 심지어 뱃속의 내 동생까지 동네 앞 냇가에서 몰살을 당했다더구나. 어머니가 그렇게 살려 달라고 애원 했는데도……. 그래서 나는 하루 아침에 고아가 돼 버린 거다. ( 눈물을 글썽인다.)
혜경: 그 나쁜 놈들은 어떻게 됐어?
호철: 두 놈,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 끔직 한 일을 시킨 놈이 따로 있었지. 그 놈은 전향서를 쓰고 잘 먹고 잘살고 있었어. 꾹 참고 살고 있었는데 그 놈이 언제부터 애국자라고 유신 헌법 통과만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 라고 시골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성분 분석을 하더라는 거 야. 유신 헌법에 찬성하는 집은 O, 반대하는 집은 X, 불분명한 집은 삼각표, 내 말 알겠냐?
혜경: 그래서 또 가만 안 놔뒀다 이거예요?
호철: 그런 놈을 내가 가만 뒀겠니? (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이 두 손가락으로 두 손을 후벼 버렸지! 그래서 또 죽도록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갔다. 그래도 그때는 뭔가 내 할 일을 했다는 기분이 들더라.
혜경: 내 서러운 과거 이야기는 오빠한테 안 해줬지?
호철: 웬만한 일이면 가슴에 묻어 두거라! 내가 들어서 안 좋을 이야기 같으면…….
혜경: (혼잣말처럼) 우리 아빠가 빨갱이를 위해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잡혀간 동네 사람을 구해 주러 경찰서에 갔대나봐. 그 가족이 너무 안됐다 싶어 경찰서에 찾아 갔는데 건방지다 며 유치장에 집어넣어 버렸대. 그리고 다음 날 유치장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서 총살당했어. 그 뒤로 우리 집은 부역자 가족으로 몰려 찍소리 못하고 살았어. 내가 아빠를 찾으면 엄마는 질겁하여 내 입을 틀어 막으셨다구.
호철: 네 운명도 기구 하구나! 다음 이야기는 하지 마라! 오늘 따라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구나. 내 눈물 말라 버린 지 그 얼마인데! (다시 현실로 돌아온 듯- 고개를 저으며) 너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거다. 나 같은 놈 가까이 하면 너만 상처를 입는다니까! 이 세상에 좋은 사람 많다. 그런 사람 만나서 살아야지 왜 하필이면 전과범이란 말이냐? (그렇지만 진심은 아닌 듯) 허지만 지난 번 감옥에 있을 땐 뭔가 다르더다. 밖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설렘 같은 것 말이다. 나 같은 놈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그런 마음으로 수감 생활을 하니 이제밖에 나가면 참고 살아 야 쓰겠다. 어떤 놈이 무슨 일을 하던 내가 상관 할 바 아니다, 뭐 그런 저런 생각 많이 해봤다. 다음 세상에서 전과 없이 살기로 작정하고 빨리 이 세상 끝내고 싶었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사내자식 여자 때문에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고 했는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다. 지금까지 감옥만 들랑거리면서 난 여자란 걸 몰랐다. 그냥 그런 여자들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넌 나를 울게 만드는구나! (혜경이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물을 닦아 준다.) 하지만 나를 따라 살려면 고생이 많을 거다. 전과자라고 해서 항상 경찰들이 감시를 하고, 돈이 있냐. 직업이 변변한 것이 있냐? 너 어쩌려고 이런 무모한 짓을 한단 말이냐? 난 이해 가 안 간다.
혜경: 나도 오빠 고향에서 몇 년 다방 마담 하면서 돈을 악착 같이 벌었어. 그리고 터미널 박 사장을, 오빠가 출감하기 며칠 전에 만나 봤어. 그랬더니 정류소에 사람이 필요하데. 그곳 상가들이 모두 그 분 것이지 않아? 세도 받아야 하고 하여튼 오빠를 위해서 자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어. 이젠 누가 뭐래도 가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마음 단단히 먹고 살 아요. 비록 남들 앞에 떳떳한 결혼식은 못 올리지만……. 이미 오빠 고향에서는 내가 오빠 사람이라고 다 알려져 있어. 내가 그렇게 행동을 했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뒀어, 난 오빠 사람이라고…….
호철: 내가 그럼 이제 직장에 나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냐? 그렇게만 되면 터미널에서 박 사장 괴롭힐 사람은 없지, 내가 있으면…….
혜경: (핀잔을 주듯이, 그러면서도 만족한 미소로) 누가 깡패 노릇 하라고 그 자리 주는 줄 알아? 매일 따뜻한 밥을 해 가지고 정류소에 나갈 테니, 그래서 남들이 우리 두 사람을 질투하게 한 번 살아 볼 테니 오빠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알았어?
호철: 아따, 그럼 우리가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가 되겠구나!
혜경: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두고 봐요, 내가 어떤 여자인지!
호철: 광주에서 내가 한 번은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 소매치기 왕초한테 당장 내 지갑을 찾아 가지고 터미널 안에 있는 수미 다방으로 가져오라고 했는데, 두 시간 후에 그 놈이 헐레벌떡 해 가지고 지갑을 가져 왔더구나. 내 실력 어떠냐? 그런 내가 정류소에서 일을 하게 되면!
혜경: (나무라듯이) 오빠, 그걸 자랑이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야? 오빠가 지금 이십대야? 이제 가정을 가지고 살아야 할 때라구, 오빠! 이리 손을 내봐! (손가락을 내밀며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우리 손가락을 끼고 맹세해! 이렇게!
(조명이 어두워진다.)
장면3
(같은 날 저녁 10시 경. 원두막 가까운 곳의 한적한 산길. 혜경이와 약간 발을 저는 호철이 포도밭에서 걸어 나온다. 그의 곁에 기대어 걸어오는 혜경의 표정은 행복에 젖어 있다.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10대 세 명이 그들 뒤에서 나타난다. 그들 중 하나가 혜경과 호철 가까이에 다가선다. 나머지 10대 두 사람은 어두운 곳에 그대로 서 있다.)
젊은이: 잠깐만요! 금방 저기 포도밭 다녀오시는 거죠?
호철: 그런데, 왜 그러지?
젊은이: 포도밭 주인이 제 삼촌이거든요. 무슨 볼 일이 있는지 잠깐 만나자고 하던데요.
호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무슨 일일까? 일호가 말이냐? 조금 있다가 내 집으로 전화를 해도 될 텐데. 그 놈 성미 한 번 이상한 놈이다. 평소에 내가 예뻐하는 놈이기는 하지만……. (그는 약간 우쭐대는 자부심으로- 혜경을 향해) 같이 갈까? 음, 시간도 늦고 했으니 여기에서 5분쯤 가면 가계 하나가 있거든, 거기에서 기다려, 내 금방 뒤따라 갈테니.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이곳에서 나나 너를 건들 놈들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그가 젊은이 뒤를 따라 간다. 젊은이가 뭐라고 말을 하더니 뒤로 쳐져 일행들 쪽으로 간다. 호철이 혼자서 발을 절뚝이며 사라진다. 그녀는 호철이 가리키기는 쪽으로 서둘러 걸어간다. 젊은이 일행이 그녀 뒤를 쫓아가서 그녀를 멈춰 세운다.)
혜경: (깜짝 놀라나 태연한 척하면서) 왜 그러지? (젊은이1.2.3.이 갑자기 그녀에게 달려든다. 그들 중 하나의 손에 칼이 보인다.) 너희들 왜 그래? 죽으려고 환장을 했어? 우리 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러는 거야? (그들이 약간 멈칫하다가 동시에 그녀에게 달려들어 어둠 속으로 그녀를 끌고 간다. 그녀가 발버둥치나 소용없다.)
(조명이 어두워진다.)
장면4
(같은 날 저녁 늦은 시간. 그녀가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가계 앞에서 울고 앉아 있다. 옷매무새가 몹시 헝클어져 있다. 호철이가 급하게 들어선다.)
호철: 포도밭 주인 일호가 나를 만나자고 한 적이 없다던데?
혜경: (대답 없이 울고만 있다.)..........
호철: (뭔가 불안한 느낌으로) 무슨 일 있었어? 아까 걔들 어딨어? 아까 내게 거짓말 했던 놈, 그리고 어두운데 섰던 놈들 은!
혜경: (계속 그녀는 말없이 흐느끼고 있다.)......
호철: (그녀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훑어보며) 너 당했어? 그놈들한테? (그가 몹시 흥분하여) 개 새기들! 너희들 내 손에 죽 을 줄 알아!
혜경: 오빠! (훌쩍거리며) 참아. 내 말 들어!
호철: (의아한 표정으로) 뭐라구?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혜경: (자신의 고통은 잊은 듯, 그리고 호철의 불같은 성격에 무 슨 일이라도 터질 것 같은 두려움에) 오빠! 아까 내가 말했지? 나 요조숙녀 아니었다고... 우리 마음이 중요하지 않아?
호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넌 지금까지 당하고만 살아 왔냐? 저런 짐승 같은 놈들을 용서 해주라니? 아니면 넌 천치냐?
혜경: 오빠! 미친개한테 한 번 물렸다고 생각할 수 없겠어? 내 마음이 중요하지 않아?
호철: 무슨 말인지 나는 전혀 모르겠구나! 마른 하늘에 무슨 날 벼락이란 말이냐? 호철이 여자를 건드는 놈들이 다 있단 말이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냐?
(조명이 어두워진다.)
장면5
(다음 날 시골집 마루 위. 호철 앞에 젊은이들의 부모들인 듯싶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 무대 뒤쪽 어두운 곳에 아낙네 몇 사람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호철: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걔들을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앞에 데려 오시오! 그놈들은 뛰어 봐야 벼룩이요! 처음에는 그놈들 모두를 죽여 버리려고 했으나…….
동네 남자1: 알았습니다. 별일 있어도 잡아 올리겠습니다. 그놈들은 감히 댁이 누군 줄도 모르고 그런 천벌을 받을 짓을 했습니다.
동네 남자2: 정말 용서해 주는 거죠? 죽을죄를 졌지만, 그래도 장래가 구 만리 같은 놈들 인데, 호철씨가 용서 해주시오. 없는 돈이지만 저희들이 성의를 다해서 보상 하겠습니다.
호철: 뭐요? 보상이요? 당신들 내 설음을 안단 말이요? 돈으로 보상한다고 했소? 읍내 사람들 한테서 내가 누군지 못 들었소? 내가 어떤 놈인지 말이요?
동네 남자3: 듣고 말 굽쇼! 제발 이 아이들, 유치장 가는 일만은 없도록 해주시오. 제발 부탁이요. 이렇게 손으로 빌 테니 저 희 늙은 사람들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호철: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소! 한 번 인생이 잘못 꼬여지면 나같이 된다고! 그래서 내게 데려 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타이르겠다고 말이요. 분한 감정대로라면, 그리고 옛날 같았으면, 가만 안 두겠지만. 우리 혜경이가 용서해 주라고 해서 그러는 거요. 내 말 알아 듣겠소? 내게 꼭 데려 오시오!
동네 남자1.2.3.: (동시에 고개를 조아리며) 꼭 잡아다가 잘못을 빌게 하리다. 용서해 준다니 고맙소! (호철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퇴장한다.)
동네 아낙네1: 정말로 아까 그 사람 말을 믿는 거요?
동네 남자1.2.3.:?
동네 아낙네2: 아이들을 찾으면 그 사람한테 데려다 주려고 그러냔 말이요?
동네 남자1: 용서해 준다고 안 그러던가?
동네 아낙네1: 전과자, 그것도 몇 범이라고 합디까? 말로만 용서해 준다고 하고 막상 그 사람 손에 잡히면 걔들이 무사할 것 같소?
동네 남자2: 그럴까? 저토록 진실 되게 말하는 사람이, 설마?
동네 아낙네3: 감옥에서 배운 게 뭐겠어요? 오죽하면 읍내 사람들이 호철이 하면 벌벌 겠어요? 옛날에는 아이 울음 멈추게 하려면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했다지만, 지금은 호철이가 나타났다 한답디다. 아무래도 나는 그 사람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잘 생각하시오. 다른 사람도 아닌 호철이 여자를 건들다니, 이 놈들이 간덩이가 부었어도 한참 부었으니, 원!
동네 남자3: 누가 그 사람 애인인 줄 알고 건들었겠는가? 당신, 누구 불난 데 부채질하는 건가? 그 사람 애인이 용서해 주라고 했다고 말 안 하던가?
동네 아낙네1.2.3: 아무래도 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동네 남자1.2.3: 그렇다면 어쩌면 좋지?
(조명이 어두워진다.)
장면6
(그날 저녁 6시경. 동네 지서 안. 젊은이 1.2.3. 모두가 의자에 앉아 있고, 그들의 부모들은 지서안의 경찰에게 매달려 뭔가 사정하고 있는 모습이다.)
경찰: 너희들이 정말 호철이 여자를 건드렸다는 말이냐?
젊은이1.2.3: (말없이 머리를 떨군채 고개를 끄덕인다.) 예…….
경찰: 너희들 호철이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단 말이냐?
동네 남자1: 땅만 파먹고 사는 우리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 수가 있단 말이요? 제발 부탁이니 이 아이들을 감옥으로 보내 주 시오.
동네 남자2: 설마 도망을 다닌다 해도 이 아이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소? 제발 부탁이니 교도소는 나중에 들어가더라도, 우선 경찰서 유치장에라도 넣어 주시오.
동네 남자3: 우리 동네 아낙네들 말을 들으니, 그 사람 성격이 보통 잔인한 게 아니어서 세 아이들,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하더군요.
경찰: (혼잣말처럼) 세상에 별일도 다 있군. 감옥에 보내 달라고 사정을 다 하다니! (젊은이들을 향해) 그리고 자네들! 이렇게 순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그렇게 통 큰 짓을 다해? 그것도 호철이 여자를?
동네 사람3: (마음이 조급하여) 제발 부탁이니 여기 지서에 놔두지 말고 어서 본서 유치장으로 이 아이들을 보내 주시오. 당장에 라도 그 사람이 이곳으로 올 것만 같소. 그리고 우리들 역시 불안하답니다. 우리에게 몇 번이고 약속하라고 했는데, 그 사람한테 데려다 주라고. 그런데 이곳으로 데려 왔으니 우리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안 그렇소, 경찰 나으리?
경찰: (망설이다가 경비 전화를 든다.) 여보세요! 여기 ** 지서 조 순경입니다. 묘한 일이 생겼어요. 호철이 알지요? 이번에 석방된 전과범 호철이! 그래요. 철없는 아이들이 그 사람 여자를 손댔답니다. 뭐라구요? 걔들을 당장 안 데려 오고 뭣하고 있느냐구요? 알겠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은 걔들 부모들이 자식 놈들을 유치장에 집어넣어 달라고 여기 와서 통사정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이 맞다구요?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구요? 알겠습니다. 당장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아니! 뭐라고 하셨습니까? 본서에서 직접 내려 오겠다구요? 시간이 급하니 곧장 데리러 오겠다구요? 알겠습니다.
(얼마 후 경찰 백차가 젊은이들 세 사람을 차에 태우고 지서 마당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또 얼마 후 호철이 흥분하여 지서 안으로 들어선다.)
호철: (동네 남자1.2.3을 향해) 당신들, 나와 약속이 틀리지 않소?
동네 남자1.2.3: (고개를 떨어뜨린 채) 미안하오, 이 방법 밖에 없었소!
호철: 내가 용서해 준다고 했었는데? 우리 해경이가 용서해 주라고 했단 말이요! 헌데 아이들은 어디로 갔소? 동네에서 들 으니 모두 이곳으로 왔다고 하던데? (그가 지서 안을 두리번거린다.)
경찰: (아까부터 난감해 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내가 본서로 보냈소?
호철: 뭐라고 했소? 본서로 보냈다고 했소?
경찰: 그렇소! (동네 남자1.2.3.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이 단 하룻밤도 여기 놔두는 것은 불안 하다고 하면서 본서로 보내 달라고 해서. 그리고 본서에서도 그래야 한다며 금방 백차 로 데려 갔소!
호철: 그래? 용서해 주려고 했는데. (배신감을 느끼는 표정을 보 이며) 하긴 전과자 말을 누가 믿겠어? 착하게 살아 보려 고 했는데. 잘됐군! (그가 갑자기 일어서서 이성을 잃은 듯 주먹으로 지서의 유리창을 깨뜨리기 시작한다. 손에서 피가 흐른다.) 그놈들을 만나려면 나도 유치장에 들어가야 겠어! (더욱 이성을 잃고 지서 안의 모든 기물을 부수기 시작 한다.)
경찰: (다시 경비 전화를 돌려) 여보세요? 본서지요? 지금 호철이 가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지서 유리창을 모조리 다 깨Em렸다니까요! 그냥 내버려 두라구요? 사람 다치지 않도 록만 조치하라구요? 뭐라구요? 일이 커지게 놔두라고 하셨나요? 이제 끝장을 내겠다고 하셨나요, 과장님? 잘 안 들리는데요? 예, 지금 백차를 보낸다구요,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쓴 맛 좀 보여 주시겠다구요? 그런 놈은 영원히 사회와 격리 시켜야 한다구요? 예, 알았습니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호철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호철: 오냐! 쓴 맛 좀 보여 다오! 그렇지 않아도 이런 놈의 세상 진즉부터 살기 싫었다. 어서 나를 본서 유치장으로 보내 다오! (혼잣말처럼) 혜경아! 내가 뭐라고 하더냐? 나 같은 쓰레기가 무슨 뚱딴지같은 사랑 타령이란 말이냐? 나 같은 사람일랑 잊어 버려라! 제발 부탁이다!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라! (흐느끼며) 부탁이다, 혜경아!
(얼마 후 백차 사이렌 소리. 그리고 뭐라고 하는지는 불분명하나, 백차에 테워져 실려 가는 호철의 절규가 들린다. 그리고 한참 후)
혜경: (헐레벌떡 지서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 오빠 여기에 안 왔나요? 여기로 오는 걸 본 사람들이 있다던데?
경찰: 이미 늦었소! 한 바탕 난리를 치고 백차에 실려 본서로 끌려 갔소!
혜경: 어떻게 된 일이예요? 내가 용서해 주라고 했는데……. 그리고 그 사람도 몇 번이나 그렇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경찰: 그 젊은이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 와서 감옥으로 보내 달라고 했었소. (동네 사람들을 가리키며) 호철이와 걔들이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저 사람들이 …….
해경: 그래서, 우리 그 사람이 화가 난 거군요? 예끼, 여보 쇼들! 그 사람 비위를 건드렸군요! 그 사람 그렇게 보여도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 사람이라구요! 인정 많은 사람인데! 이제 겨우 사랑을 알고, 삶에 재미를 붙여 보려는 사람이었는데……. 오, 하느님, 너무도 야속하시군요! (매우 감상적인 분위기.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녀의 흐느껴 우는 울음소리와 알아들을 수 없는 절규가 무대에 울려 퍼지며)
(조명이 어두워진다.)
실개천의 작품 <월간문학> (2005년 11월호 게제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