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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달도, 그리고 바람의 노래

김영관 2007. 5. 6. 12:12

         

 

           

 

 

 

             외달도, 그리고 바람의 노래

                                              


                              


                     등장 인물

              
                      병석
                      현수, 병석의 아들
                      미경     
                      사회자, 그외 다수의 남녀 문인들


                       장소

 

                      페리호 선상과 외달도 해변
                      뒷편에는 바다, 모래 사장, 그리고 멀리 섬들과 갈매기의
                      비상이 보인다

                      

                       시간
                   

                    어느 여름 날
                    병석의 등장은 과거 


이 작품에 김 현 석, 김 종, 최 영 배, 강 영 애, 김 정 삼
시인님들의 시를 인용했음을 밝혀 둡니다

 

(막이 오르자 조명이 밝아 진다. 페리호 선상이다. 다수의
남녀 문인들이 의자에 앉아 있고, 오른쪽 통로 옆에는 마이
크를 든 여자 사회자가 서 있다.)

 

사회자: 지금부터 제 4회 목포 뱃길 백리 선상시 낭송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서울을 비롯하여 멀리 각지에서 이곳까지
와 주신 문인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2부 사회를
맡게 된 박 미란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선상시 낭송회를 시
작하겠습니다. 조금 전 저희 목포 시문학회에서 출판해 배포
해드린 선상시 낭송작품집을 펼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먼
저 "관매도의 울음"이라는 시를 현재 광주 문인 협회 회장
인 김 * 시인께서 낭송해 주시겠습니다.

 

시인1: (시집을 펼쳐들고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온다.
낮은 배경 음악과 더불어 파도 소리가 들린다.)

 

  바다는 바다는 울고 있드라
  새벽에도 깨어서 울고 있드라
  가슴으로 가만 가만 울고 있드라

 

(그가 시를 낭송하는 중에 스포트 라이트는 그에게서 중
간쯤 좌석에 앉아 있는 미경에게로 옮겨 간다. 그녀는 20대
중반의 여성으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가슴이 큰 여인이다.
얼굴 윤곽이 전체적으로 둥글고 모난 데가 없어 주변 사람
들에게 포근감을 갖게 하는 유형의 여성이다.)

미경: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혼잣말로 중얼 거린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해마다 개최되는 이 행사에 그 분이 빠진 적
이 없었는데... 참석치 못한다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이럴 리 
가 없어.

 

(시인1의 시 낭송 소리가 다시 크게 들린다.)

 

달구어진 사람들이 꽃 불같이 잠들 때
양철 지붕 판자 덧문을 몇 번이고 들석거리며
심장을 열어 젖히고 왕복하드라

(시 낭송 소리가 작아진다.)

 

작년 그분이 행사에 참석했을 때 매우 초췌한 모습이었다.
건장하던 몸은 눈에 띨 정도로 말라 있었고... 가슴 아픈 것
은 그가 전혀 삶에 의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은 아닐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내가
무슨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다시 시 낭송 소리가 크게 들린다.)

 

잔눈썹을 보이지도 집시락 머리를 스치지도
바위처럼 묵묵하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 무엇엔가 단단히 감전되어
한시도 머무르지 않고 울고 있드라

 

(시 낭송 소리가 작아진다.)

 

(그녀는 시 낭송 싯귀중에 "감전되어"라는 단어에 섬찟한
표정을 보인다.)

 

그렇다. 내가 그 분을 4년전 처음 만난 것부터가 일종의 감
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 텅빈 가슴에 약한 볼트의 전류같
은 느낌으로 그분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이 다가 온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 갔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안쓰러운 사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지치고 소진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서는... 그런데 오늘
그 분은 기어이 오지 않을 모양이구나. 그럴 리가 없다. 그
분은 한차례도 빠지지 않고 이 행사에 참석했으니 다음 배
로라도 꼭 올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해줄 심산인 모양이지.
그렇다. 그 분은 오늘 중에 반드시 올 것이다. 외달도 행사
에 참석할 사람이고 말고... 어쩌면 그 분은 어제 외달도에 미
리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깜짝 놀랄 내
표정을 기대하면서...(그렇지만 그녀의 표정은 불안하다.)

(다시 시 낭송 소리가 커진다.)

 

아무나 떠다닐 것도 아닌 자리에
풀잎이 피어나 너울 거렸다.

 

(시인1 이후로도 시인들의 시 낭송은 계속된다. 그러던 중
사회자는 젊은이 한 사람을 그녀 곁에 세운다. 그리고 그를
소개한다.)

 

사회자: 여러분 잠깐만 제 말에 귀를 기우려 주세요. 제 1회
행사 때부터 참석해 오셨던 김 병석 시인이 아쉽게도 오늘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대신 그 분의 아
드님이 이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아드님이라도 대신 와주
셨으니 정말 반갑습니다. 여러분 모두 박수 부탁드립니다.
(참석자 모두가 열렬히 박수를 친다. 사회자가 젊은이를 향
해서) 인사 하세요. 

 

현수: 안녕하세요. 방금 사회자분께서 소개해주신대로 저는
김 병석 시인의 외 아들인 김 현수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그분의 유일한 혈육인 셈이죠.

 

(참석한 문인들이 술렁인다.)

시인중 한 사람: 무슨 소리야? 해마다 참석하던 사람이? 참
석 못할 만한 무슨 긴급한 일이라도 생겼다는 말인가? (모
두가 현수를 쳐다본다.)

 

현수: 아버님께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시다며 제게 대신
이 행사에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다음 해부
터는 몸이 못오시면 마음이라도 반드시 와 계시겠다고 하  
셨습니다.

 

시인중 다른 한 사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몸 대신에 마음이 오겠다니 무슨 말인줄 모르겠는 걸.

(현수를 향해) 여보게, 젊은이! 아버님께서 어디 몸이라 
도 불편하신가? 

 

현수: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말씀을 자세히 올
리기로 하고 아버님의 최근 창작 시를 여기에서 낭송하겠습
니다. 아버님의 간곡한 부탁이었으니깐요.

 

일동: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

 

현수: (메모지를 끄집어 내어 시를 낭송하기 시작한다.)

 

   바람의 노래4

                    김 병 석

 

책을 읽다가 생각이 잠깐 발을 헛디디면 거기엔
어느새 그대가 있습니다 그대는 오늘도 혼자 있지
않고 우울한 스웨터와 아픈 기억- 기적이 밤 하늘에
푸르고 두터운 붓자욱을 남긴 채 별빛 사이로 
스러져 가던 밤, 혹은 도서관 너머의 깜깜한 길로
흰 새처럼 꽂히며 사라져 가던 그대의 모습-등과
같이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언제나 과거의 기억 속에
인화되어 있는 그대, 나는 그대가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두려워 서둘러 그대를 내보내고 피흘리는 
그 자리를 못자국처럼 만져 봅니다 슬픈 사랑, 나는
결코 그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요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거짓이라는 것을,
정말 두렵습니다 나는 서둘러 아픈 그대를 지우고
책 속으로 힘겹게 돌아 옵니다 그대는 아시겠지요
이 더딘 발걸음을

 

(문인들을 향해)

아버님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
습니다. 연세에 걸맞지 않게 해마다 이 모임에 다녀 오신 뒤
에는 시에 대한 열정에 타오르셨습니다. 젊은 날 사랑에 빠
지신 분처럼 삶에 활력을 되찾은 표정이셨습니다. 아버님의
시 창작에 치열한 불을 일으켜준 여인이라도 이 자리에 계
시는지 모르겠군요. 기왕에 이 자리에 나온 김에 아버님의
시 한편 더 낭송하고 싶은데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시인 한 사람: 아무렴, 그렇게 하게! 자넨 아버님을 꼭 빼닮
았네 그려. 안 그렇소 여러분?

 

일동: 그렇구만요!

 

현수: (다시 호주머니에서 메모지를 끄집어내어 펼쳐 든다.
그리고 낭송하기 시작한다.)

 

바람의 노래5

 

그대를 생각하면 길은 언제나 끊기고 맙니다
오전내내 나무 둥치에 기대어 그대를 생각하다가
아픔이 없다면 이런 나무마져도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정말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아픔의 소산이고, 패인 운명의 손금을 따라 흐르다
흔적 없이 사라지면 멈추는 시냇물처럼 우리의 생이
아픔의 형량이라면, 상처와 상처가 단단히 엇물린 채
달밤의 환한 꽃으로 피어난 것이 우리들 사랑일까요?
그렇게 고통의 전율에 부대끼다가 마침내 텅빈 무의식의
공간으로 쓰러져 흔적마져 지워져버린다면
그것이 우리들의 완성된 사랑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나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오, 진정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경청해주셔서.

 

 (시인들은 시에 취한 듯 눈을 감고 있다. 낭송이 끝나자 현수는

문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무대 밖

으로 사라진다. 자리에 앉았던 미경이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나간다.)

                         (조명이 어두워 진다.)

 

(조명이 밝아 진다. 뒷편으로 모래 사장이 보이고 미경과 현
수는 바닷가 나무 아래에 서 있다. 현수는 20대 중반의 젊은
이이다. 두 사람의 시선은 수평선을 향하고 있다.)

 

현수: 선생님이 미경씨라는 분인가요?

 

미경: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현수: 아버님의 작업 노트에 적혀 있더군요. 목포, 외달도,
신안 비치, 갈매기, 모래 사장, 미경 등이 갈겨 쓰여져 있었
어요. 아버님은 선생님을 사랑하셨던 모양이예요?

 

미경: (말없이 바다를 쳐다본다.) 아버님께 무슨 일이 생기셨
나요?

 

현수: 미경씨에게만 말씀드립니다. 아버님은 돌아 가셨습니
다. 당분간 다른 분들께는 절대로 비밀로 해주세요. 아버님
의 유언이셨습니다.

 

미경: (매우 놀라는 표정을 보이며) 뭐라구요? 뭐라고 하셨
나요? 돌아 가셨다고 하셨나요??

 

현수: (목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하며) 조용히 하세요. 주변
분들이 듣겠습니다.

 

미경: 언제 돌아 가셨습니까?

 

현수: 며칠 전입니다.

 

미경: 어디서 어떻게?

 

현수: 병원에서요. 저 외는 아무도 아버님의 임종을 지켜 본
분이 없었어요. 간암으로 돌아가신 겁니다. 아버님은 자신의
병을 꽤 오래 전부터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만 주위     
사람 누구에게도 감추셨던 모양이예요. 술을 너무 좋아하셨
어요.

 

미경: (손수건을 내어 눈물을 닦는다.) 그토록 시를 사랑하던
분이.. 자기 몸 하나 지키지 못하다니... 

 

 

 

 

현수: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아버님의 넋은 바람이
되어 이곳에 와 계신 겁니다. 지금 선생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제겐 느껴진답니다. 아까 낭송해 드린 아버님 시는
제 어머님과 미경 씨, 두 분 모두를 위해 지은 시라고 저는
확신할 수 있어요. 아버님은 제 어머님 밖에 모르셨어요. 어
머님이 돌아 가시자, 아버지는 주말이면 혼자서 바람처럼 사
라지셨다가 집에 돌아 오시곤 했어요. 그 때 나는 학교의 기
숙사에 들어가서 살게 되어 아버님은 그 때부터 혼자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아요. 마치 넋나 간나간 분처럼,
옷과 신발은 온통 흙을 뭍혀 오고... 집을 나간지 며칠 만에,
아니, 한달도 더 어딘가를 돌아 다니시다가 집에 들어오곤
하셨다고 아버님 친구들이 이야기 해주더군요. 친구들이 "어
디서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으면 그냥 쓸쓸한 미소만 지으
시더래요. 제 생각은 아버님이 자학과 자책 때문에 방황하셨
던 것 같아요. 아버님 작업 노트에는 꾸겨진 종이 쪽지들이
많았답니다. 거기에 깨알 같이 적힌 것들이 모두가 시였어
요. 아버님 친구분께 그것들을 보여 드렸더니 그분은 깜짝
놀라시더군요. 그 모두가 소중한 시라면서. 아버지 유품을
더 찾아 보라고 하더군요. 제가 찾은 100여편의 시를 그분께
보여드렸더니 "네 아버지는 결코 세상을 헛되게 산 게 아니
다. 불후의 명작시들을 남기고 홀연히 바람처럼 세상을 떠나
신 거다. 이걸 모아 시집을 만드는 거다. 그것이 네 아버지
에게 해드리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아니겠니?" 라고 말씀 하시더군요. 그렇지만 아버님은 건
강에 그토록 무관심하셨으면서도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
라도 갑작스럽게 창작열이 치열해지셨어요. 아버님은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그러
다가 아버님 작업 노트에서 미경씨 이름을 발견했거든요.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만나서 이야기 하다보면 아버님
에 대해 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여인은 틀림없이
내 어머니를 닮았을 것이다"라는 짐작했는데, 맞았군요. 사람을
포근하게 해주는 그런 여성이셨거든요, 어머님은. 그게 아버님의
이상적 여성형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저는 이곳에 내려 온 겁니다.   
     (조명이 어두워 진다. 파도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린다.)

 

(4년 전 같은 장소에 병석과 미경이 앉아 있다.)

 

병석: 아름다우십니다, 아가씨.

 

미경: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 오셨다
면서요?

 

병석: 친구가 이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면서 꼭 내려 오라고
하더군요. (미경을 쳐다 보며) 미경씨라고 했나요, 아가씬?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미경씨의 시 낭송     
잘 들었어요. 시가 좋더군요.

 

미경: (수줍어 하며) 시를 쓴 지가 얼마 안됐어요. 서투른 대
목이 많지요?

 

병석: (미소를 보이며) 시에 내포된 생각은 좋은데...

 

미경: 그런데요?

 

병석: 표현 방법을 조금 바꾸시면...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
한 것이 아니죠.

 

미경: 시에 대한 전문 서적을 별로 읽지 않은 채 시부터 쓰
게 되서 그러나 봐요. 이론 서적을 좀 읽어야 되겠다 하면서
도 막상 시간이 나면 시부터 쓰게 되니 그게 문젠 것 같아
요.   

 

병석: 시 이론을 너무 알게 되면 시가 쓰여지지 않는답니다.
그냥 느낀대로 쓰시는 지금이 좋아 보이는데요, 제게는. 시
를 쓰면서 혼자서 감지하고 터득한 내 느낌이랄까요? 뭐 그 
런 정도밖에 저도 아는 게 없어요.

 

미경: 그걸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는 걸요.

 

병석: 가령 "바람이 분다" 라는 건 시가 아니지요. 어떤 바
람이 어떻게 부는가를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거예요. 그
리고 아까 선생님이 낭송하신 자작시에서 "우리가 서     
로 사랑할까?"라는 표현이 있었지요? 우리 시는 영미 시와
달리 내재율을 지니고 있거든요. 그러니 물음표는 사용하지
말고 "우리가 서로 사랑했었을까"라고 자신에게 반추하는
그런 표현법을 사용하면 더 좋겠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내
말이꼭 옳다는 건 아닙니다.  

 

미경: 참 좋은 조언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고맙습니다, 지도해
주셔서. 앞으로 그렇게 시를 쓰도록 노력해 보겠어요. (모래
밭에 구두를 벗는 현수를 바라보다가 구멍난 그의 양말을  
보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병석: (어색하게 웃으며) 내 양말 때문에 그러세요?

 

미경: (고개를 끄덕인다.) 자주 그런 일이 있나보죠? 별로 놀
란 표정이 아니니 말이에요.

 

병석: 저는 집안의 별의 별 일을 직접하는 걸요.

 

미경: 사모님한테서 후한 점수를 받겠군요?

 

병석: (화제를 바꾸려는 듯) 그런데 어쩌나? 시인들은 가난
한데. 마음이 너무 좋아서 남의 어려움을 못본 척 그냥 넘기
지 않거든요. 그래서 시인들은 거의 모두가 마음은 풍요롭  
지만 물질적으로는 가난하답니다.

 

미경: 두 분은 아주 행복하신가보죠? (얼굴을 돌리는 현수의
얼굴에는 쓸쓸한 미소가 감돈다.) 이 행사가 끝나면 곧장 서
울로 올라 가시겠네요?

 

병석: 기차를 타고 가려고 해요. (농담스런 어투로) 미경씨
가 곁에 있어주면 막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답니다.

                            (조명이 어두워진다.)

 

(다시 조명이 밝아진다. 같은 장소에 현수와 미경이 서 있
다.)

 

현수: 그래서 아버님은 막차를 타셨나요?

 

미경: 그래요. 그렇지만..

 

현수: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지만?

 

미경: 막차 탈 시간 여유가 조금 있어서 그 사이 내가 선생
님을 신안 비치 호텔 옆 모래 사장으로 모시고 갔어요. 바다
가 보이는 술집에 앉아 있었는데...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바 
다와 나를 번갈아 쳐다 보시더군요. 그러면서 맥주를 물 마
시듯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말없이 긴 한 숨만 내 쉬더라구
요. "무슨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나요?"라고 물었는데     
제 말을 못 들으신 것 같았어요. 한참 후에 바다를 손으로 가
리키면서 그 분 말씀이 "바다가 나를 부르는 군요. 바다에게
유혹받은 경험이 있나요, 미경씨? 저는 그런 경험이     
많아요. 너무 많아서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구요. 한
번은 인천 송도 앞바다에 나갔는데 아내가 바다 저쪽에서
손짓을 하더라구요. 어서 오라는 듯 말이요. 그냥 정신  
없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 가다가 정신을 차렸지 뭐요."라고
하시더라구요.

 

현수: 제 어머님 이야기를 하셨다구요?

 

미경: 아뇨. "아내가 바다에서 부른다구요?" 라는 내 물음에
그 분은 화제를 금방 바꾸어 버리더군요. 시를 쓰기 위해 바
친 자신의 열정 등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대단한  
분이셨죠. 자신이 쓴 싯귀들을 거의 전부 외우고 계셨답니
다. 깜짝 놀라 물으니 그 싯귀들은 모두가 자기 자식처럼 소
중하다고 말씀하더라구요.

 

현수: 아버님은 그런 분이셨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제 아버
님을 사랑하셨나요?

 

미경: (고개를 떨구고 한참 있다가 눈물을 글썽인다.) 그래
요. 사랑했어요. 특히 그 분의 시 사랑에 대한 자세를 사랑
했답니다. 

 

현수: 말씀하지 않아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시와
여성을 똑같이 사랑하셨는데 여성에 대한 사랑은 구태여 말
로 표현 하자면, 여성 그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이었답니다. 
일종의 페미니스트셨다고나 할까요? 지치면 기댈 수 있는,
그래서 안식을 취하고 여성에게서 생명력을 찾으려는, 그러
니까 아버님에게 있어서의 여성은 대지, 즉 땅이며 흙인    
셈이죠. 영미 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Earth Mother를, 여성
에게서 아버님은 기대하시는 겁니다. 아뭇튼 아버지는 돌아
가셨지만 미경 씨 같은 분이 계셨으니 행복하셨군요. 해변에
서 맥주를 마신 다음 아버지는 곧 바로 서울로 올라 가셨나
요?

 

미경: 술집에서 나와 방파제쪽으로 갔어요. 거기에 앉아서
그 분은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흐느껴 울다가 내 품에서
잠이 들었어요. 순한 아이처럼 말이에요. 자장가라도 불러주
고 싶은 충동이 들더라구요. 그 순간 제가 그 분한테 느낀
감정은 일종의 연민의 정 같은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어요.
그 분은 잠들기 전에 "어머니,여보”라는 등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씀들을 중얼 거리시더군요. 

 

현수: 가엾으신 분! (궁금한 듯) 그래서 주무시고 갔나요?
목포에서?

 

미경: 기차 출발 시간이 다 되어 비틀거리는 그분을 역까지
모셔다 드렸어요. 밤 기차를 타고 떠나는 그 분 표정이 너무
쓸쓸해 보였어요. 아마 그때부터 나는 다음 해의 선상 시   
낭송회를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는지 모르죠. 

 

현수: 강하면서도 참으로 나약한 분이 제 아버님이셨답니다.
정이 많은 분이셨구요,

 

미경: (말이 없다.)....

                    

           (조명이 어두워진다.)


(다시 조명이 밝아진다. 같은 장소. 병석과 미경이 앉아 있
다.)

 

미경: 1년 만이군요, 선생님.

 

병석: 잘 지냈소? 그 사이 더욱 예뻐졌구려.

 

미경: (약간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보이시나요?

 

병석: 그럼요. 1년 전 고주망태가 된 나를 역까지 배웅해 것
에 대해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미경: 감사 인사를 1년만에 받는군요. 그때 너무 취하셨는
데... 괜찮으셨어요, 서울엔 잘 도착 하셨어요?

 

병석: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가끔씩 그럴 때가 있어요. 필
름이 끊긴다는 말 들어 본 적이 있나요? 미경씨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소?

 

미경: 그럭 저럭 살았어요.

 

병석: 오늘 미경씨가 낭송한 시 참 좋았어요. 많이 발전했
다고 하면 실례가 되는 말인 줄 알지만. 하여튼 작년 작품에
비하면 월등히 나아졌어요. 

 

미경: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결코 그 말이 싫지 않은 듯) 고
마워요. 실은 작년 선생님 이야기가 제게 크게 도움되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선생님의 이야기가 약간은 불만스러웠는 
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말씀이 옳은 것 같았어요.

 

병석: 도움됐다니 기쁘구려. 기왕에 문단에 나왔으니 프로가
되어야지요. 제가 말하는 프로란 글을 쓰는 테크닉 만을 말
하는 것이 아니에요. 프로 근성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겠군요.

 

미경: 프로 근성이라구요?

 

병석: 그래요. 제 삶에 도움되었던 친구 이야기를 해드릴까
요?

 

미경: (궁금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야기 해 주세요.

 

병석: 도박을 하는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미경: 도박하는 사람과 프로 근성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병석: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세요. 그 친구가 도박을
하면서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 돈을 몽땅 다 따버리지 않겠
어요? 도박하는 친구에게 제가 나무란 적이 있었습니다. 평
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친구가 어떻게 가까운 친구
돈을 몽땅 다 따버릴 수 있느냐고 내가 따졌어요. 그런데 그
친구 대답인 즉은... 

 

미경: (의아스런 표정으로) 그런 사람도 선생님의 친군가요?
그래서 그 사람이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병석: 그 친구 대답이 참으로 걸작 아니겠어요? "나는 도박
꾼이다. 다른 일에는 모든 것을 양보할 수 있어도 도박만은
져 줄 수가 없지. 이건 내 직업 아니냐?" 라고 하더군요.   
(진지한 표정으로) 그 친구의 평범한 말 속에서 저는 진리를
발견한 겁니다. 아니 일종의 생활 철학을 배웠다고나 할까
요?

 

미경: 진리를 배웠다구요? 도박꾼에게서?

 

병석: 그렇소. 그게 바로 프로이고, 그런 정신이 바로 프로
정신이라고 하는 거요. 이걸 미경씨 삶에 적용 시켜 봅시다.
미경씨는 지금 문인입니다. 생활의 다른 모든 것은 친구들 
에게 양보하더라도 글을 쓰는 것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저서
는 안됩니다. 내 말 뜻 아시겠어요?

 

미경: (이해가 간다는 듯) 그렇군요. 그 말씀이 맞는 것 같군
요. 요즈음은 정말 글쓰는 보람으로 살고 있거든요. 그리고
영원히 남을 내 글을 쓰고 싶어요. 가성이 아닌 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그런 글 말이에요.

 

병석: 그럼 됐소. 당신은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오.

 

미경: 고마워요. 1년만이긴 하지만 선생님과의 만남이 제겐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병석: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소. 그래야 내년에 제가 다시
오는, 그래서 우리 미경씨를 만난다는, 설레임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요. 

 

미경: (얼굴을 붉히며) 실은 오늘을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병석: (농담으로 받아 넘기는 듯) 저도 미경씨가 얼마나 보
고 싶었는지 알아요? 이 날을 손꼽아 (자신의 신발을 내려
다 보며) 발꼽아 기다렸는지 몰라요... (그들이 밝은 웃음을 
웃는다.)
     
                       (조명이 어두워 진다.)

 

(목소리만으로 다음의 시가 낭송된다. 낮은 배경 음악과
파도 소리만이 들려 온다.)

    

  바람의 노래 1

그대를 처음 만날 때부터 시종 관류하는
작은 시냇 물 하나 있습니다 소리죽어 흐르는
맑은 슬픔 있습니다 메마른 지상 위의
아름다운 상처로 태어나 서로를 핥는 일은
소금 꽃으로 서럽습니다 가을 꽃 피고 지고
봄 풀이 짙어갈 때마다 더욱 싱싱히 푸르러 가는
슬픔을 보며 우리는 묵묵히 사랑의 나이테를
확인합니다 진정,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은
언제나 더 나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더 맑아질 수 없는 곳에서 안간힘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사랑 아닌 모든 것들을 꽃답게 산화한 뒤,
눈물 하나 유성처럼 가슴에 금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조명이 밝아 진다. 같은 장소에 현수와 미경이 보이
는데 현수는 서 있고 미경은 앉아 있다. 뒤쪽 멀리 그늘 아
래서는 시 낭송회가 계속 되고 있다.)

사회자: 다음은 보성 문인 협회의 회원이신 최 영배 시인의
"외달도 섬새"를 낭송해 주시겠습니다.

 

시인2: (일어서서 마이크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 보인다.)

   

외달도 섬새

해음이 좋아
포말의 백색이 좋아
짜릿한
소금기 먹음은
바윗 돌 위에 서 있는

외달도 섬새.
  (낭송 소리가 작아진다.)

 

현수: 제 아버님이 목포에 15개월간 머무르신 적이 있다는
이야기 해 주시던가요?

 

미경: (깜짝 놀라며) 여기에 계셨다구요?

 

현수: (씩 웃으며) 원래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분
이라 모르실 줄 알았어요. 1980년 서울의 봄 시절, 자유를
갈망하는 저항시를 쓰셨어요. 그걸 신문에 기고한  것 때문 
에 아버님은 훗날 계엄령이 저녁 12시에 발효되었는데 바로
그 시간 문 앞에서 아버님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국보위

사람들한테 끌려 가셨답니다.

 

미경: 그래서요?

 

현수: 그 당시 저는 중학생이어서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돌아 가신 어머님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둑컴컴한
방으로 끌려 들어 가셨는데 거기에는 수사관이 좌석에 딱
버티고 앉아 있더랍니다. 그 방 벽에는 핏자욱이 곳곳에 묻
어 있고, 수사관이 서랍에서 여러 고문 기구들을 책상 앞에
놔두고 겁을 주더랍니다. 옆 방에는 다른 사람들이 두들겨  
맞고 있는 지 비명 소리가 들려 오고...

 

미경: 정말 그 분이 그런 무서운 곳에 끌려 갔었단 말이에
요?

 

현수: (고개를 끄덕인다.) 국보위 사람은 아버님이 쓰신 시를
내 놓고 단어 하나 하나, 행한 줄 한 줄까지를 짚어 가면서
그 시를 쓴 아버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더라는 거였    
어요. 광주 항쟁의 기폭제가 될만한 시 내용과는 달리 막상
그 시를 쓴 아버님을 잡아놓고 그들은 실망했던 모양이에요.
그 사람들 눈에는 아버님이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채 그런
시를 쓴 나약한 문인 정도로 보였던지 그들은 다음 날 아버
님을 풀어 주셨답니다. 자술서 정도를 쓰게 하고 말입니다.

 

미경: 무사하게 나왔으니 다행이군요.

 

현수: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수 많은 죄 없는 광주 시민이
죽었는데 자신만 비겁하게 살아나와 충장로를 걷고 있다는
죄책감같은 것을 느끼셨던 모양이에요, 내심으로는. 그 때부 
터 아버님의 방랑벽이 시작되었다고 해요. 방랑 시인 김 삿
갓처럼 말이요. 상당 기간 아버님은 시쓰기를 중단하셨어요.
집을 나가시면 한달도 넘게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지     
친 몸으로 돌아 오시곤 했어요. 처음에 걱정하던 어머님도
차츰 체념을 배우시게 되더군요. 생활을 꾸려 가야할 아버님
이 그렇게 사셨으니 우리 가정 형편이 어땠는지 짐작하실
수 있겠죠? 자연히 어머님의 양 어깨가 무거울 수 밖에요.
어머니와 저는 그런 아버님을 이해하려고 많은 애를 썼답니
다. (그가 잠시 말을 중단하고 바다를 본다. 시 낭송 소리가
다시 크게 들려 온다.)


비 오는 날
바다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네
아무도 없는 바다에서
끊임없이 이어 들리는 교신
그리움의 이름으로
출렁 거리는 몸부림을 보았네
가슴 속에만 있던 말들이
젖은 채로 어디론다
마구 떠밀려 가고 있었네
                  (다시 소리가 작아 진다.)


(조명이 밝아진다. 병석과 미경이 같은 장소에 있다. 이제

병석이 자리에 앉아 있고 미경이 그의 곁에 서 있다.)

 

미경: 올해도 오셨군요.

 

병석: 벌써 3회 째인가? 세월이 참으로 빠르구려.

 

미경: (병석의 병약하고 초췌한 모습에 신경이 쓰이는 듯)
얼굴이 창백하게 보이는군요.

 

병석: 나는 괜찮은데 주변 사람들이 내 건강이 안 좋아 보인
다고들 합디다.

 

미경: 과음하시는 것 아녜요?

 

병석: 그런 말 어디서 많이 듣던 것 같구려. 내 마나님 같으
셔, 미경씨는.

 

미경: (얼굴을 붉히며) 내가 사모님 같다구요?

 

병석: (미경 씨를 보면 내 아내 젊은 모습 그대로야. 어쩌면
나는 미경이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딸이 내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구. 내가 말을 편하게 해도 되는 거지?

 

미경: 그렇게 하세요. 전에도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렸잖아
요?

 

병석: 미경이가 오늘 낭송한 시는 수준급이라고 할 수 있어.

 

미경: 농담 마세요. 아직 멀었어요.

 

병석: 아냐. 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미경의 시에는 혼이
담겨 있어. 노래할 때 목에서 나는 소리가 있고 가슴에서 우
러나는 소리가 있는데 미경의 시는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흘
러 나오고 있어.

 

미경: 칭찬 고마워요. 선생님은 시 많이 쓰셨어요?

 

병석: (천진한 미소로) 미경이를 만나서인지 요즈음은 옛날
시를 시작하던 당시의 활력을 찾았어.

 

미경: 그런데 얼굴은 더욱 창백해 가는 것 같은데요.

 

병석: (소년같은 웃음으로) 마지막 정열을 시에 불사르느라
그러는 모양이지. (수줍음을 감추며) 지난 1년을 거의 외딴
암자에 있었지. 아무도 없는 암자에 나 혼자 밥해 먹으며.

 

미경: (깜짝 놀란다.) 혼자서 외딴 암자에 계셨다구요?

 

병석: (고개를 끄덕이며) 섬진강이 내려다 보니는 해발 8백
미터 고지에 빈 암자가 있지. 스님 한 분이 그곳에서 지내다
가 비워둔 곳이었지.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그걸 알게된  
나는 내가 그곳에 살게 해달라고 했지.처음에는 스님께서 거
절하더니 내 부탁이 너무도 진지했던 모양인지 마지 못해
승락하더라구. 이 세상에 하나 남은 아들은 좋은 회사에    
들어가 그곳 기숙사에 살고 있는데. 장가는 본인이 좋은 여
자 만나서 하면 되는거고. 난 세상에 미련이라곤 남은 게 없
어. 그래서 나는 어디에서나 머무르면 그곳이 곧 내 거처   
가 되는 거지. 그 암자에서 꼬박 1년을 보내고 오늘 이 행사
에 참석키 위해 하산을 한 거지. 

 

미경: 그럼 이 행사가 끝나면 다시 그곳으로 가시겠네요?

 

병석: 아니. 이제 그곳도 싫어졌어. 다시 서울로 가야겠어.
겨울에 사람 하나 없는 산속에 뻐가 시리게 불어대는 바람
소리. 사람이 그토록 보고 싶다는 생각, 그 때 처음 해봤어. 
나 그곳에서 시 몇 편 건졌지. 한번 들어 볼래? (그가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 산에서는 섬진강이 한눈에 보인다구. 그
래서 주로 섬진강에 내 생각을 실었다고나할까? (그가 암송
을 시작한다.)


             섬진강

 

휘파람새가 끌고가는 적요의 세상, 별들이 하나, 둘
밤의 나루터에 푸른 꽃등을 거네 그리움의 덤불을
눞히며 바람이 부네 밀항처럼, 밤의 내밀한 품속으로
나도 떠나 가야지 신의 가슴을 향해 향수의 닻을
올려야지 숨죽였던 눈물 힘으로 노를 저어 가야지
아픔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저 달 속에 드리웠던가 외로움을 행구어
그리움으로 하늘에 내걸었던가 눈 내리던 날 지상에
홀로 남아 날아 오르는 새들을 부러워했던가, 지금은
흔들릴수록 아름다운 유형의 길
휘파람이 반딧불처럼 잦아들면서 휘파람새가 고삐를
당기면 박명의 산이 섶을 열어 기다림을 드리우네
아픔수록 맑아지는 내 안의 사랑 비밀처럼, 신은 내 안에
살고 있었네 치맛자락 여미며 서산 아래 달이 먼저 내리면
이제 다왔네 지상이라는 이름의, 신의 새벽 나루터 

(둘은 한참 말이 없다.)

 

미경: 그걸 모두 암송할 수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병석: 전에도 내가 말했지? 내 시는, 내 언어는 모두가 내
소중한 자식이거든. 지금까지 쓴 모든 작품을 다 외울 수가
있어. 한 번 들어 볼래? (문득 어떤 말이 떠올랐는지 시 암 
송할 것을 단념한다.) 나는 이제 미경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어. 단 하나 이것만은 명심하라구.

 

미경: (호기심있는 표정으로) 그게 뭔데요?

 

 

병석: 다작보다는 과작을 택하라구. 시 한편을 세상에 남겨
도 충분하다는 생각 말이야. 훗 날 우리 젊은이들 머리에 깊
게 깊게 각인시킬 수 있는 단 한편으로 만족한다는 자세로 
글을 쓰란 말이야. 1년에 단 한편 써도 좋다는 여유를 갖도
록하라구. 서 정주는 다작이지만 김 현승은 과작이었지. 물론
다작이 꼭 나쁘다는 거은 아니지. 그렇지만 나는 과작을    
권하고 싶어. 습작한 시가 호주머니에서 닳아 문드러질 때
까지 고치고 또 고치고 그러다보면 좋은 시가 될 거야. 내
말 명심해, 미경이.

 

미경: 알았어요, 명심할께요. 선생님은 지금까지 시를 몇 편
이나 쓰셨나요?

 

병석: (씩 웃는다.) 나? 이 나이 동안 시집 한권 남긴 것 없
어. 그리고 전에 써 놓은 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
이 찢어 없애 버리지. 쓰고, 버리고, 그렇기를 반복하다 보  
니 내게 남은 시는 불과 몇 편 안돼.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
어. 그냥 바람이나 물처럼 살다가 가는 거지 뭘.

 

미경: 마치 세상을 금방 하직하실 분처럼 이야기하고 계시는
군요.

 

병석: 꼭 그렇다기보다는. 원래 나는 세상에 대한 별 미련이
없는 사람이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한 때 삶에 너무 애
착을 가진 나머지 두려움으로 떨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미경: 그 무슨 말씀이세요?

 

병석: (화제를 바꾸어) 잠깐 내가 여기 누워도 되겠어?

 

미경: 피곤하면 그렇게 하세요. 많이 지친 모양이군요.

 

병석: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어. (농담처럼 말하나 진지하
다.) 내년에 내 몸이 여기에 내려 오지 못하면 지금 미경이
볼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해줘.  

 

미경: (불길한 예감으로 불안해 하는 표정이다. 혼잣말처럼)
그래요, 당신은 바람, 어느 한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구름처
럼 떠돌다 삶을 끝마칠 사람, 재능이 안타까워라.
 
                    (조명이 어두워진다.)

 

(다시 조명이 밝아진다. 현수와 미경이 같은 장소에 있다.)

 

현수: 글이 현실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그 당시 아버님은
뼈저리게 느끼셨던 모양이예요. 그렇게 필을 놓은 아버님이
몸은 비록 여러 곳을 방황하고 다니셨지만, 다시 글을 쓰신 
것만은 분명해요. 외달도 첫 행사에 참여한 다음부터 인 모
양이예요. 그런데 이번에 아버님의 시 경향이 달라지신 겁니
다. 현실에서 한발 물러서 자연을 노래하기 시작한 거라구
요. 초탈한 부처님처럼, 아무튼 아버님의 시에는 불교적 색
채가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공수래공수거란 말 있지요? 빈
손으로 태어났다가 다시 빈 손으로 돌아가는, 아버님은 자연
으로 돌아가는, 다시 말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미경: 아까 아버님과 같이 왔다고 하셨지요? 아버님이 어디
계세요?

 

현수: 화장한 아버님 유골 중의 일부는 인천 앞바다에 날려
보냈어요. 어머님이 계시는 곳 말이예요. 두 분은 바람이 되
어 다정스럽게 인천 앞바다에 출렁이고 계실 거예요.

 

미경: 유골의 일부라고 하셨나요?

 

현수: 그렇소. 아버님 유골 일부는 제 가방 속 상자 안에 계
십니다. 외달도 앞 바다에 흩어 뿌려 달라는 아버님의 유언
이 계셨어요.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물론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는 다른 분들게 아버님의 부음을, 그
리고 늦게 알리게 된 이유를 설명해드릴 겁니다. 모두들 안
타까워 하시겠지만 그게 아버님의 유언이신 걸 아시면 이  
해해 주시겠지요. 미경씨는 아버님 마음 속에 자리잡고 계
셨던 분이니 함께 이 의식에 참여하지 않으실래요?

(현수가 가방속에서 조심스럽게 아버님 유골이 든 작은 상자를     
끄집어 낸다. 그들은 나란히 바닷가로 걸어 나간다. 현수가
바다에 아버지 유골 가루를 흩어 뿌린다. 미경은 뒤에 서서
흐느껴 울고 있다.)

아버님, 당신의 유언대로 저는 지금 외달도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 육신의 일부가 외달도 바다에 눕게 되시는

순간입니다. 제 곁에 미경씨가 계시는 것이 보이시죠? 아버님

뒤를 이어 해마다 제가 이 행사에 참가할 것입니다. 편히 잠드

세요.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도 모르게 흥얼대듯 자신의

즉흥시를 암송한다.)

    
세상의 모든 강이 흐느끼며 바다로 가듯
지상의 모든 그리움은 향수의 배를 타고
펄럭이며 펄럭이며 적멸로 가네 단 한번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밤마다 벼리었던
가슴들은 이토록 창호지 빛이었구나 눈물빛
이었구나 장막같은 밤이 내리면서 참을 수
없었던 비밀들은 하나 둘, 가슴에 촛불을 켜네
어둠속에 별빛을 거네
보이는가? 저 아름다운 이별 의식이? 대낮에
길 잃었던 모든 길들이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떠오르면서 하나 둘, 저 여윈 강처럼 돛을 달고
있지 아니한가 사랑도 그리움도 우리들의 어떤
아픔도 아름다운 죽음을 향해 저마다 돌아가고
있지 아니한가 푸르게 푸르게 울면서 손 흔들고
있지 아니한가 보이는가? 저 적멸을 향한
아름다운 이별 의식이?
지상의 모든 강이 제 가슴 벼리고 벼리면서
바다로 가듯, 모든 이별은 맑히고 맑아지며
당신의 가슴보다 더 맑은, 적멸 위에서 만나네
단 한번의 아름다운 만남을 위한 이별 맹세는
지금은 눈불 빛이네 새벽빛이네 세상의 모든
그리움은 적멸의 황홀을 향한 지상의 비밀 이정표,
강변에 새벽 내린 뒤 이 땅의 모든 연인들은 눈물로
씻기운 새벽꽃이네 천지의 모든 강은 새벽강이네

 

(흐느껴 울며) 잘 가세요, 아버지. 내년에 제가 다시 오겠
어요.  

 

미경: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방백처럼) 선생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신 거라구요. 항상 저희 곁에 계시는 겁니
다. 선생님은 아들에게 당신 이상의 시적 재능을 남겨 주셨 
군요. 어쩜 정말 슬픈 사람은 나뿐인지 모르겠군요. 선생님
의 아들에게서도 저는 바람을 느낀답니다. 선생님과 아드님
이 바람이라면 나는 외달도란 말입니까? 언제까지나 당    
신들의 출렁임을 가슴으로 감싸기만 해야 하는 그런 외달도
로 남아 있으라는 말인가요? (지친 듯 모래 사장에 주저 앉
는 현수를 그녀는 감싸 안는다.)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와 함께 멀리서 시 낭송 소리가
들린다.)

 

바다가 고향인가
임은 바다로 갔습니다

푸른 물 가득 채워
콸콸 넘치고

고기떼 불러 모으러
임은 바다로 갔습니다

산호초 그늘 아래
시 한 수 지으시고

이승 일 다 잊으시고
날 잊으시고

바다가 고향인가
임은 바다로 갔습니다.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