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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니일의 <밤으로의 긴 여로> 에 나타난 애증의 갈등 연구

김영관 2007. 5. 25. 08:19

 

 

 

 


  1940년대는 유진 오니일(Eugene O''Neill 1888-1953)에게 가장 창작열과 실험 정신이 뛰어나던 시기였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 무렵에는 이미 그의 모국인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그는 한물간 작가쯤으로 치부되고 있었고 지난 시절 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이 상이 수여되는 것쯤으로 간주 되었다.
  40년대 이후 오랫 동안 침묵하고 있던 오니일은 세상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라도 한 듯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심정으로 대작 집필에 몰두했다. 대가답게 그가 쓴 말기의 몇 극 작품들,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얼음 장수 오다>(The Iceman Cometh), <휴이>(Hughie)등은 모두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자신의 가족사를 쓴 매우 자서전적 드라마인데 이 작품의 성공을 확신하면서도 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생존해 있어서 그분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한다는 마음에서 그는 자신이 죽은 25년 후에 발표하도록 아내 캘러타에게 유언을 했다.
  그렇지만 출판사측은 그가 죽은 후 아내의 동의로 도서관에 보관되었던 작품 봉인을 뜯고  이 작품을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죽은 오니일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 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 극 서문에서 그는 아내 캘러터에게 헌사를 썼는데 "피와 눈물로 쓴 이 극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친다"는 요지의 글이다

  총 3막으로 구성된 <밤으로의 긴 여로>는
1막은 아침 8시. 타이런 가의 네 사람이 휴가를 보내는 여름 별장. 막이 오르면 타이런 부부가 무대에 보인다. 아내가 지난 밤 남편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 못 잤다는 가벼운 농담으로 이야기는 시작되고 아직도 식사를 끝내지 않은 두 아들이 식당에서 하는 이야기와 웃음 소리가 들린다. 이들에게 신경을 쓰는 제임스는 혹시 자기를 흉보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고 아내 메어리에게 불평한다. 아주 기분 좋은 대화로 시작되는 아침, 그렇지만 두 아들들이 식사가 끝나고 거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대화는 더 진지하고 우울한 방향으로 흐른다.
  34살의 나이의 큰아들 제임스 2세와 24살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유진 오니일의 분신)의 생김새 성격 묘사가 무대 지문을 통해 상세하게 묘사된다.
  아버지 제임스는 부모를 따라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으로 매우 가난하게 살아온 경험을 지니고 있다. 무책임한 제임스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두고 자신만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가 버려 제임스는 어머니와 더불어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다. 지방 공연 온 극단에서 갑작스럽게 출연 배우가 몸이 불편해 대역으로 무대에 오른 후 그는 훗날 인기 있는 연극 배우가 되었다. 셰익스피어 극 배우가 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몬테크리스트 백작>에서 백작 역을 맡아 돈을 벌게 되면서부터 그는 돈 때문에 평생 그 역에 머물고 만 회한을 지닌 채 살고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간만에 대한 추억 때문에 절약이 몸에 배어 두 아들들은 아버지가 인색하다고 제임스를 조롱한다.
  어머니 메어리는 부유한 상인의 딸로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자랐으며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자기 도시에 공연 온 극단의 연극 관람을 갔다가 그날 밤 공연된 <몬테 크리스트 백작>을 보고 주인공 제임스를 연극과 현실을 혼동할 정도만큼 흠모하게 되었다. 같은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친분 때문에 제임스는 메어리의 집에 들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들의 나이가 10살 차이였는데도 이들은 결혼을 했다. 메어리는 연극 배우라는 것이 무대 세계에서와는 달리 끝없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싸구려 여관에서 잠을 자야 하는 매우 피곤한 직업임을 결혼하고 나서야 알고 실망해 한다.
  큰아들 제이미는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술과 방탕으로 세월을 보낸다. 일정한 직업도 없고 아버지가 어렵게 자리를 구해준 무대 배우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작은 아들 에드먼드 역시 대학을 중퇴하고 금광을 찾아 남미 등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건강을 해치고 돌아와 부둣가 싸구려 술집을 헤매고 다니다가 아버지가 구해준 신문사 기자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직업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이 두 아들들에 대해 아버지 제임스의 분노가 서서히 끓어오르고 어머니 메어리는 에드먼드가 한 여름인데도 기침을 해대는 것에 매우 걱정스러워 한다. 혹시 아들의 기침이 중병의 신호 다시 말해 결핵이 아닌지 내심 걱정하고 있다. 그 당시 결핵에 걸리면 곧 죽음이라 할 정도로 결핵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병이고 메어리 친정 아버지 역시 술고래에다가  훗날 결핵으로 죽었다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대화 중에 어머니 메어리가 에드먼드를 낳기 싫어했음과 그 두 아들 사이에 유진이라는 아이가 자라다가 홍역으로 죽었음도 밝혀진다. 에드먼드 출산 이후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어머니 메어리가 아편 중독자가 되었음과 최근까지 아편 요양원에 있다가 이제 겨우 치료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 왔음도 관객은 알게 된다.
  어머니의 아편 중독도 아버지의 인색함 때문이었다는 아들들의 공격과 자신은 최선을 다 했노라 는 아버지 제임스의 이야기가 반복되다가 아버지 제임스와 큰아들 제이미가 앞 뜰 산울타리 나무 전정을 위해 밖으로 나간다. 건강이 좋지 않은 에드먼드와 어머니 메어리가 실내에 남아 있는데 에드먼드는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잠시 쉬러 위층으로 올라가는 어머니 메어리가 다시 아편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닌가 매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막이 내린다.
  2막은 낮 12시. 하녀 캐더린이 밖에서 울타리 전정 일을 하고 잇는 제임스와 제이미를 부르러 현관 앞으로 나가고 에드먼드는 어머니가 위층에서 낮잠을 자고 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편에 대한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점심 식사 후 그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제임스는 자신들의 주치의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는데 대화 내용을 통해서  에드먼드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에드먼드가 결핵에 걸렸음에 대한 암시를 받은 제임스는 사립 요양원보다는 비용이 훨씬 더 저렴한 주립 병원으로 에드먼드를 보내려 한다. 이 말을 들은 큰아들 제이미는 아버지의 인색함에 대해 또 한번 더 공박을 한다.
   3막에서는진료 결과를 들으러 에드먼드가 나가고 제이미도 외출하고 아버지 제임스 마저도 외출한다. 집에 남은 메어리는 하녀 캐더린에게 자신의 학창 시절과, 제임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들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외부인 들과 접촉을 끊고 외톨이로 살고 있는 현재의 삶에 대한 고통을 이야기한다.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시간이 밤을 향해 흘러감에 따라 이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어 나타난다. 밖에 나갔던 남자들이 집에 돌아오고 그들은 점차 술을 통해서 지난 삶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을 한다.
  윗층에서는 잠들지 못하고 유령처럼 걸어 다니고 메어리의 발자국 소리에 이 집 남자들은 마음 아파한다. 반복되는 이야기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효과를 갖게 하고 이 작품에 나타나는 안개, 술, 안개 고동 소리들은 여러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 비극의 클라이맥스는 막이 끝나갈 무렵 어머니 메어리가 위층에서 고등학교 학창 시절 소망했던 피아니스트의 꿈속에 빠져 피아노를 치고 있다가 잡시 후에 이 집 남자들 앞에 결혼 웨딩 가운을 든 채 넋이 나간 채 나타나는 장면이다.
  우리네 인간의 삶은 큰 일 보다는 작은 일들의 기억의 연속이며, 우리네 비극은 과거의 아픔을 잊지 못하고 그것이 현재와 미래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지어 가며 살고 있음을 오니일은 이 작품에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한 가족간의 생길 수 있는 갈등과 반목 그리고 화해와 용서를 그린 이 작품을 미국 대표 비극의 수준까지로 끌어 올린  오니일의 천재성에 우리는 감탄한다.
  현대 미국극은 오니일을 필두로 하여 테네시 윌리엄즈, 아더 밀러 등으로 그 전통이 이어져 간다는 점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