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The Crucible)에 나타난 마녀 사냥
<시련>에서 아더 밀러 는 1692년 세일럼에서 실제 있었던 마녀 사냥을 그리고 있다.
몇몇 소녀들이 서인도 제도 출신 하녀 티투바와 함께 악마를 불러내는 놀이를 하다가 그 놀이에 참여했던 패리스 목사의 딸이 몽환 상태에 빠지게 되자 갑자기 유혹과 비난에 혼란스러워 한다. 헤일 목사가 이 놀이에 마법이 작용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불려 온다. 티투바의 소녀들은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 타인을 비난한다. 개인적인 복수와 금전 매수가 사회의 정책중의 하나라고 공언되자 마녀 사냥을 재판하던 법정도 이런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전에 존과 엘리자베스 프락터 부부의 하녀였고 프락터의 정부였던 에비게일은 안 주인 엘리자베스가 마녀라고 고발한다. 법정으로 소환된 프락터는 자신의 간음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아내 엘리자베스를 변호하려 한다. 그러나 그 자백은 아내가 남편 프락터를 지키기 위해 배신하지 않음으로써 힘을 잃는다. 이 일에 실패하자 공식적으로 자백을 백지화시키고 희생자의 이름을 더 밝힌다는 조건으로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제의가 나온다. 프락터는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나는 여전히 존 프락터 이다!"라는 개인 존엄성을 지키며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이 작품 <시련>의 줄거리이다.
아더 밀러는 이 작품이 발표되기 전에도 이미 <세일즈맨의 죽음>, <비시에서의 사건>등을 발표해서 자신이 숨쉬며 살고 있는 사회 문제에 괸심 많은 극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17세기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미국 이민 초기에 마사츄세츠에서 실제 있었던 마녀 사냥을 작품 줄거리로 택했는가를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미국은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중국이 공산주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소련이 자체적으로 원자 폭탄을 만들어 실험하는데 대한 충격으로 미국은 광적인 배반자 색출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사회 상황은 몇몇 극우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존엄성에 대한 타격으로 받아 드려졌던 것이다. 극우파 선봉에 선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메카시 선풍의 장본인인 위스컨신 주 출신 죠세프 매카시 상원의원이었다.
아더 밀러 는 그때 미국 사회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극우파의 정치적, 객관적, 빈틈없는 운동은 새로운 공포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관적 실재, 신비로운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어서 점차 성스러운 공감대를 얻어 가고 있었다....그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광신이 있었다... 새로운 죄가 매 달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죄가 태초부터 있었던 것처럼 참으로 신속하게 수용되고 있었다니 아주 신기했다. 공포심 보다 상위에서, 양심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행정 문제라는 개념이 우선 수용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사람들이 타인들에게 양심을 넘겨주고, 양심을 넘겨 줄 기회를 얻고 나서 타인에게 고마워하는 것을 보았다." (아더 <밀러의 연극론>, 87 쪽)
밀러는 메카시가 몰고 온 미국의 현대판 마녀 사냥을 목격하고 입센의 극 <민중의 적>을 각색코자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심적 주제... 인간 집단이 진리를 위험한 악마의 거짓말이라고 선고할 때 진리라는 민주주의의 꿈이 죄의 원천이 되어야만 하는지 어떤지의 문제" (위의 책, 17쪽)로써 밀러는 입센의 극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입센 극에서 극화된 것보다 귀신론과 소외를 더 철저히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다.
마치 미국 이민 초기의 마녀 사냥에서 처럼 매카시 선풍시절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 예를 들면 <세일즈맨의 죽음>의 연출가였던 엘리아 카잔과 30년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은 극작가 중의 한 사람인 클리포드 오데츠 같은 사람들이, 동료의 이름을 밀고해야 용서를 받는, 곤혹스런 입장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배신을 통해 위대한 미국 시민임을 인정받는 선택은, 마르크스의 신념을 버린지 이미 오래인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이념으로 낙인찍으려는 마녀 사냥에 아더 밀러는 분노의 시각으로 본 것이다.
미국에서 1940년대와 50년대 있었던 낡은 마녀 사냥 수법이 옛날 어느 나라 정치에서 상대의 목을 조이기 위해 심심치 않게 사용되었던 것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