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 거미줄에 걸리다
고향 가기로 작정한 날은 밤잠을 설치곤 한다. 평생 직장에 매달리면서 습관으로 베어든 다람쥐 채바퀴 인생에 어느덧 반백이 되었다. 오늘은 모든 일로부터 벗어나 고향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 밤새워 정담 나누리라. 고향에서 병원을 개원하여 원장님으로 친구 광모에게 읍내 친구들을 불러 모아 밤새울 준비를 하라고 전화를 해 놓았다.
장거리를 달리는데 이상이 없도록 자동차 점검을 끝내고, 세차도 말끔히 하고 고향을 향해 출발을 했다.. 마누라에겐 하룻밤을 묵고 올 예정이니 전화하지 말라고 당부해 두었다. 전화가 모처럼의 여유로움에 올가미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고향 행은 내게 번거로움으로 부터의 탈출이며 자궁으로의 회귀이다. 단 하룻밤일망정 고향에서 보내는 시간은 단조로운 내 삶에 재충전이 되겠지. 날씨가 우중충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인가. 일찍 출발해서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내가 태어났던 물방앗간 집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살았던 꿈과 낭만으로 가득했던 구기산 집을 찾아 가보리라. 아무리 바빠도 군데만은 꼭 가보리라 작정한다.
일찍 출발한 덕택으로 정오 무렵 태생지인 물방앗간에 도착했다. 물방앗간 흔적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방아를 찧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 인기척에 집 모퉁이에서 주인인 듯싶은 할머니가 걸어 나온다. 나는 그분께 나를 소개한다.
기억을 더듬던 할머니는 반가운 얼굴로 집안에 있는 남편을 부른다. 이미 노쇠해서 거동조차도 불편한 남편에게 여기 물방앗간에서 태어난 통골 양반 셋째 아들 까살이가 왔어라우. 거의 연년 생이나 다름없이 태어난 동생 때문에 젖이 부족해서 까살만 부려 통골덕 애를 무던히도 맥이던 그 까살이가 왔어라우. 어디서 어떻게 지내다가 이제사 여그를 옹거시어? 고향을 아조 잊은 줄 알았제. 통덕이 저그 보이는 곳에 단쑤시를 심었제. 까살이가 단쑤시를 좋아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것 먹고 싶어 하면 통골덕이 베어다가 가져다 주면 그것 아니랑께 저것 먹고 싶어 그것은 다시 지 자리에 붙여 놓고 저것 가져와 라고 통을 파면 통골덕은 발을 동동 구르고. 그래서 자네 별명이 까살잉겨, 앙 그러요 여보? 그 말이 마저. 통골 양반 통골덕 모두 돌아 가셨담서? 아들들을 따라 도시로 떠난 양반들이 이곳을 못 잊어서 눈이나 제대로 감았을까? 요 며칠 깐치가 소란스럽게 울어 싸트니만 통골 양반 아들이 왔구먼. 그 양반들이 깐치로 환생한 것 아니 것어? 그래가꼬 앞 뒷산 헤매고 다니시는 것 아니어? 통골 양반이 이곳 물방아깐 할 적에는 3개면 사람들이 방아를 찔라고 나락을 구루마에 가득 싣고 와서 밤샘하며 기다리기도 했는디. 그 양반이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왔는지 여그 정미소에서 전기를 만들어 온 동네 사람들이 밤에도 대낮처럼 훤하게 불 발켜 썼당만. 아무튼 자네 아부지 대단한 분이셨제. 자네 큰 성도 고향 떠난지 상당히 오래 됐다던디? 뭐라고? 큰 성이 죽었어? 언제? 바로 얼마 전이라고? 아직 멀쩡할 나이인디. 뭣 때문에 죽었땅가? 저런 안 �네. 세상 한번 오면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거시 이치 아니당가? 여보 영감, 그미테 여동생도 있었제? 이름이 영자 였지라우? 맞제, 영자는 어떻게 사능가? 저의 매씨 말씀인가요? 제가 사는 도시에 함께 살고 계십니다. 집도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사신답니다. 통골덕 아이들이 고상 많이 했제. 여기 물방아깐을 우리한테 그냥 주다시피하고 떠날 때 통골덕이 얼마나 울어싸턴지, 지금도 눈에 선하당께. 그런데 자네가 뭐슬 한다고 하든디. 선생질 한다고 글 안 업디어? 지난 번 여그왔던 망치 양반 아들이 글 안 합디어? 맞아요. 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방학했능가? 그렇게 여그를 통 안오든 사람이 옹 것봉께 뭔 일 있능가? 아네요, 그냥 한 번 들렀어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봐요. 자꾸만 고향 생각이 나고, 제가 태어난 곳을 이번에 꼭 한번 들러 보고 싶었어요. 통골 양반이 이 앞에다 투망을 한번 던지면 방아깐에 흘러 들어가는 곡식을 먹을라고 몰려 있던 물고기들이 그 안에 가득 올라 왔었당께. 그것들을 배따서 무시 가득너코 조리면 그 맛이 얼마나 조았던지. 그런데 지금 이 물 좀 보소. 강 상류인데 이렇게 물이 더러워져서, 물고기들이 씨알도 업당께. 온 산과 바다가 오염되서 마실 물도 업단 말이시. 여보 호랑이 담배피던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을라요? 점심 때가 되어 까실이 배 고프 것소. 내가 금방 밥상 차려 올텡께. 당신은 까실이 애랬을 적 이야그나 계속하고 이스시오잉? 글고 내가 자네 엄니한테 성님이라고 했응께 자네한테 말을 유치해도 암시랑 안을꺼네. 여보 뭣하고 있소? 얼른 안으로 데리고 들어 가지 안코? 알었서. 안으로 들어가세. 괜찮습니다.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점심은 거기에서 먹을 겁니다. 그래도 여그까지 왔는디 그냥가면 어쩐당가. 찬은 없지만 내가 준비할텡께. 우리 아그들도 모두가 서울로 가버리고 우리 둘만 덜렁 이곳을 지키고 산다네. 자네 영환이 아제 소식 듣고 사능가? 새 아짐한테서 난 아들들은 어떻게들 지내고 있는지 궁금허단 말이세.
철들기 전의 내 집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한사코 붙잡는 그분들을 뒤로 하고 다음에 내가 찾아 간 곳은 읍내 기산 집이었다. 이곳으로 이사와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살았다. 언덕배기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영수천과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집이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세월이 거꾸로 흘러 8살 초등학생이 돼버린 기분이다. 이제 막 학교에서 파해 돌아와 책가방을 마루 위에 던져 놓고 샘 집 병구를 만나러 뛰어가던 그 시절의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 아닌가?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대꾸가 없다.
잠시 집을 한바퀴 돌아본다. 뒤뜰에 감나무, 대나무 밭이 그대로구나! 우리 집 감나무는 땡감, 옆집 재우 형네 감나무는 단감이 연다. 그런데 옆집 감나무 가지가 우리 울타리 너머로 뻗어 있어 재우 형네 몰래 가슴 조이며 단감을 따먹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마음씨 좋은 재우 형 어머니가 우리 집 울타리로 넘어온 감은 내가 따먹어도 좋다고 말씀하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대신 우리 감이 익으면 재우 형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라시던 그분은 지금은 이미 이승분이 아니라고 들었다. 그곳을 돌아 대나무 밭을 쳐다본다.
그 당시 군대에 가면 모두가 죽어서 돌아오던 시절. 얼마 전 돌아가신 큰 형이 군대를 기피하려고 집에 숨어 있다가 경찰이 오면 집 뒤 대밭으로 도망가고 식구 모두가 가슴 조이며 형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겨울바람이 대밭을 스치며 내는 바람 소리에 잠 못 이루던 어린 시절.
대밭 뒤로 외딴 집 한 채 거기에는 이수네 가족이 살았는데. 이수 아버지가 빨찌산 사람들하고 가까이 지내다가 감옥에 갔다 와서 이웃 사람들과 단절하고 살았던 집이라고들 했다. 어른들이 이수네 집에는 못 가게 했어도 우리는 뒷산 언덕에서 사이좋게 지냈다. 그 이수가 지금은 미국 동부 델라웨어에서 살고 있다. 내가 몇 년 전 그곳에 가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이곳 외딴 집 이야기를 하자 그냥 웃기만 하던 이수 생각이 난다.
세탁소를 경영하며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가 이수를 닮아 건장하다. 한국말이 서툴러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이수 막내아들 놈이 보고 싶다. 그 아이는 축구를 좋아하고 델라웨어 고등학생 대표라고 했다. "아빠 용돈지금 빨리라는 말만은 우리말로 제일 자신 있다는 이수 막내아들 놈. 지금쯤은 대학생이 됐겠다. 그런 이수가 자기 아들 보다 더 어렸을 때 저기 저 외딴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이수가 미국에서 막내아들이 어느 날부턴가 제 아버지를 학교에 부르지 않아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버지 영어 때문에 학교에 오면 자기네들이 창피하다더라고 말하던 이수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다시 한국에 돌아가 살고 싶다. 그런데 이제 내가 어떻게 내 나라에 돌아가서 살겠니? 여기 어디 무덤에 묻혀 있을 내 몸뚱이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쓸쓸하게 웃던 이수가 저 집에서 살았던 것이다..
나는 다시 앞마당 쪽으로 돌아온다. 저기 문간채가 있는 대문 앞에 접시꽃, 그 옆에 무궁화 꽃은 그대로구나. 그 위로 거미가 쳐 놓은 줄에 제비가 걸려 몸부림치던 생각이 난다. 곧바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장대를 가지고 나와서 제비를 끌어 내린다. 내가 온몸에 감긴 거미줄을 풀어 제비를 다시 하늘로 날려 보냈는데 다음 해에 그 제비는 박씨를 결코 물어 오지 않았다. 흥부의 이야기가 현실 세계와 결코 같을 수 없음을 그 당시에 벌써 알았으니 내가 조숙한 아이였을까?
저기 앞산. 겨울이면 연을 만들어 날리던 산. 사금파리를 밥풀에 짓이겨 연줄에 발라서 연을 날린다. 친구의 연줄과 얽히게 해서 서로 연줄을 풀었다가 당겼다가 그래서 친구의 연줄이 끊기거나 내 연줄이 끊기는 것을 우리는 연 싸움이라고 했다. 친구 연 줄을 끓었을 때의 우쭐대다가 반대로 내 연줄이 끊기었을 때는 다시 집에 와서 줄에다 더 많은 사금파리를 갈아 짓이겨 밥풀을 먹였던 일들. 어느 날 내 연 줄이 끊기어 하늘로 둥실둥실 떠올라갈 때 금방이라도 그 줄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발을 헛딛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기절 했던 적도 있었다.
저 앞산에 얽힌 가슴 아픈 일이 또 있다. 어느 날 저 산 등허리 어딘가에서 어린아이를 묻어 버린 일이 생겨 이 동네에 경찰들이 며칠에 걸쳐 조사를 했다. 춘수 누나가 동네 젊은이와 눈이 맞아 처녀로 임신을 해서 지금과는 다른 세상인지라 유산도 못하고 자기 아버지 몰래 배가 불러 오다가 아이를 낳아 자기 집 뒷터에 묻었다가 발각된 것이다. 경찰차에 실려 목포 교도소로 이송된다는 말에 이곳 사람들이 동구 밖까지 나와 눈물 글썽이던 기억이 난다. 누나는 춘수 누나와 우 아랫집 살며 가까이 지내면서도 몰랐다며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도 못되는 사람 속은 정말 모르겠더라는 말을 했다.
저기 영수천은 어떤가. 동네 형들이 개구리처럼 수영을 잘하는 것에 당연히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알고 물 속에 들어갔다가 허우적거리며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며 사경을 해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그 긴박한 순간에도 머리에 떠올랐으니 말이다. 그런데 물속에 헤엄치던 종혁이 형이 순간 내가 허우적 거리는 광경을 보고 머리카락을 붙잡아 수심이 얕은 쪽으로 나를 밀어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나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한참이나 물이 무서워 물가에 가지 못했지만 물가에 사는 우리는 금방 물에 익숙해져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수영을 잘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종혁이 형은 내 생명의 은인이 되어 그 형의 똘만이가 되어 잔 심루름은 내가 다하고 다녔다. 지금도 영수천 옆에 서 있는 저 팽나무 위에 올라가서 팽나무 열매로 팽총을 쏘던 그 유년시절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해마다 영수천에서 한두 건의 익사 사고가 있었다. 어느 해에는 친구 창녕이 여 동생이 물에 빠져 죽어 우리 모두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리 선배 남수 형이 우리가 물속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바로 옆에서 헤엄치다 심장 마비로 물속에 가라 앉아 버린 것도 모르고 그곳에서 놀았다.. 우리는 해가 뉘엿뉘엿해질 무렵 집으로 오고 있었는데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여러 사람들이 우리가 금방 놀다 나온 곳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도 따라 갔는데 우리가 놀았던 바로 그곳에서 남수 형의 시체를 건져 내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남수 형이 물에 빠져 죽은 그 자리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니? 다음해 바로 그 영수천 냇가에서 무당이 남수 형의 영혼과 어느 죽은 처녀의 영혼과 결혼시키는 일이 있었다. 다시 말해 처녀 총각으로 죽은 혼들이 지상에서 배회하지 않도록 원혼을 달래 주는 영혼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긴 대나무로 남수 형의 혼을 건져내는 순서가 있었는데 물에 들어있던 대나무가 마구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당이 남수 어머니에게 그 대나무 붙잡게 하는데 참으로 놀랍게도 남수 어머니는 그 대나무를 붙잡고 온몸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궁금하다.
앞산 옆으로 보이는 공원 또한 옛날 그대로다. 저기 앞산과 공원 중간쯤에 당숙모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분들 모두 돌아 가셨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한살 전인, 6살 때 그곳에 살고 계시는 종조할아버지는 한학이 뛰어나신 분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서당을 열어 한학을 공부하려는 후학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아버지를 따라 종조할아버지 앞에서 열심히 공부하겠노라고 다짐을 하던 그날이 새롭다. 방에는 특이한 냄새가 났는데 후에 알고 보니 먹 냄새였다. 인쇄술이 전혀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어서 할아버지 손수 붓으로 쓰신 추구 한권을 내 놓으셨다. 학동들 사이에 내가 가장 어렸는데도 글 읽고 붓글씨 쓰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간다고 할아버지 칭찬은 대단하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대신에 할아버지 밑에서 계속 한학을 하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1년 한문 수학 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버렸지만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한학은 훗날 대학 다니면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학동들 중에 나이가 든 사람들도 있었는데 5일장에서 그 사람 어머니가 팥죽 장사를 하였다. 점심시간에 잠시 가까이에 있는 장터에 나가서 팥죽 한 그릇씩 먹고 돌아 왔는데 시간이 조금 늦었다. 내 딴에는 종조할아버지인데 조금 늦는다 치더라도 그게 별 대수로운 일일까 싶었는데 왠 같이간 나이든 학동과 나를 할아버지는 침목 위에 세워 놓고 회초리질을 하는 것 아닌가? 얼마나 아프게 때리시는 지 다음 날부터 서당을 나가지 않았다. 집에서는 서당에 간다고 해 놓고 서당 가까운 곳 공원 벚나무 밑에서 낮잠을 잤다. 그늘 위 벚나무 사이를 날라 다니며 새들이 버찌를 따먹는 것이 신기해서 풀을 뽑아 예쁘게 새집을 만들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새집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며칠 중간 치기를 했는데 발각되고 말았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다시 할아버지 앞에 선나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노라는 약속을 하고 그 남은 세월 동안 서당에 다녔다. 1년이 지나 추구를 다 뗀 기념으로 떡을 해가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한마디로 책 걸이를 한 것이다. 같이 공부했던 선배 학동들이 공원 어딘가에 지금도 부르면 나타날 것만 같은데 벌써 세월은 한참 흘러 세월 이편에 서 있단 말인가?
당숙네 집에는 영학, 영훈, 영기 등이 있었는데 위는 내 형이고 아래로는 둘은 동생 뻘이다. 영학이 형이 해병대 지원을 해서 월남에 파병됐다. 수색을 나갔다가 월맹군 총에 죽었다는 전사 통보가 왔다. 후에 같은 작전에 참가했던 내 친구 말을 들으니 우리 안에 있는 돼지를 보고 경계를 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고개를 쳐들었다가 숨어 있던 월맹군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그 아래 영훈이는 밤낚시를 갔다가 물에 빠져 죽고, 그 슬픔으로 같은 해에 당숙마저 돌아 가셨다.. 한 해에 두 사람, 몇 년 사이에 장정 세 사람이 죽어 나간 슬픔을 당숙네 집안은 겪어야 했다. 앞산과 공원 사이의 당숙네 집이 우울한 자태로 내 시야에 들어온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기억으로 간직하다가 죽는 것일까? 왜 세월을 중지 시키거나 뒤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일까?
친구들이 모여 있는 광모 병원에 들어섰다. 모두가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덕기의 반백의 머리칼을 보며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모처럼 고향에 내려왔으니 마음껏 놀다 가거라고 성일이가 말한다. 술자리를 막 시작하려는 무렵 핸드폰으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여보. 당신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어요. 숙희를 그 사람한테 시집보낼 거라구요" 아내는 요즈음 내 말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니 신경을 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시하거나 나를 깔아뭉개기 까지 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8살 시절부터 삶을 다시 시작할 수는 없을까? 나 가봐야겠다 라는 내 말에 친구들은 깜짝 놀라며 방금 너 뭐라고 했냐? 인자 막 온 놈이 그냥 간다고? 뭔 소리여라 한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어디에서도 차분하지 못하니 말이다. 용서해라. 도시 생활이 너를 이 꼴로 만들은 거냐? 니 몰골이 그게 뭐냐? 뭔가에 �기고 있는 놈 같으니 말이다. 불원간에 다시 오마. 하여튼 나는 지금 올라 가봐야 해. 잘 있거라. 친구들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가운데 다시 집을 향한다. 순간 내가 마치 어린 시절에 보았던 거미줄에 걸려 몸부림치던 제비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