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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1)/ 번역극

김영관 2009. 4. 6. 16:52
 

          안개(1)/번역극


                     유진 오니일 극/ 실개천 (김영관 ) 번역

 

등장인물


시인

사업가

폴란드 여자 농부

죽은 아이

삼등항해사

선원들


시간 -현재



장면: 여객선 구명보트가 뉴파운드랜드의 그랜드 뱅크 멀리에 어쩔 도리 없이 표류하고 있다. 안개가 고요한 바다 위에 짙게 깔려 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바다의 잔잔한 파도가 거의 감지 될 수 없을 정도이다. 파도 표면은 어둡고 적막하여 현실감이 없다. 안개의 분위기처럼 위협적인 침묵이 온 세상에 깔려 있다.


 구명보트에 세 사람이 안개를 잿빛 배경으로 하여 어둡게 윤곽을 드리우고 있다. 두 사람은 중앙의 가로장 위에 서로 가까이 앉아 있다. 그들의 얼굴은 식별하기 어렵다. 동이 이제 막 트려하고 액션이 시작되는 순간 희미한 여명이 바다 위에 나타난다. 점차 이 빛은 짙은 안개를 뚫고 한낮의 밝은 빛으로 변한다.



남자의 목소리: (환경 때문에 오싹할 정도만큼 활달하고 쾌활하게) 어휴! 햇빛이 비추면 좋겠는 걸. 꽤 추운데, 당신은 어떻소? (대답을 듣지 못하자 고독의 두려움이 갑자기 엄습해오는 느낌이 들어 언성을 높인다.) 여보시오, 거기! 잠든 건 아니오?


다른 남자의 목소리: (처음 목소리의 사람보다는 더욱 세련되게, 분명히 그러면서도 지나칠 정도는 아닌 슬픔으로) 아뇨, 잠들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목소리: (매우 안심이 되어) 당신이 졸고 있다고 생각했소. 방금 전에 나도 잠들었었소. - 더 이상 눈을 뜰 수가 없었소. - 깨어나서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소. - 난파되었다는 걸 깜빡 잊었소.


두 번째 목소리: 잠 들 수가 있었다니 다행이로군요. 나도 잠들어 모든 걸 잊을 수가 있다면 좋겠소. - 이 모든 걸 말이오.


첫 번째 목소리: 오, 정신 차려요! 그런 생각을 말아요. 이로울 게 뭐 있겠소. 힘을 내시오! 이제 곧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될 게 분명하오. 내내 생각해봤소. 우리가 난파선과 부딪친 이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당신은 아시겠소? 우리가 부딪친 건 난파선이 틀림없는 거요?


두 번째 목소리: 그렇다고 믿소.


첫 번째 목소리: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무전은 계속 오고 있었소. 항해사 중의 한 사람이 말하길 여러 척의 배들로부터 우리를 도우러 오고 있다는 교신을 많이 받았다고 했소. 분명히 우리를 구하러 올 거요.


두 번째 목소리: 이런 안개 속에서 말이오?


첫 번째 목소리: 해가 떠오르면 안개는 모두 걷힐 것이오. 이처럼 두텁게 끼진 않지만 상태가 형편없는 내 고향 콘넥티커트 해변에도 이곳처럼 안개가 심하다오. 그래도 해가 뜨면 아침이 되기 전에 항상 걷혀 버린다오.


두 번째 목소리: 안개의 본 고장, 그랜드 뱅크스에 우리가 있다는 걸 잊으신 모양이로군요.


첫 번째 목소리: (약간 괴로운 웃음으로) 당신 별로 쾌활한 친구는 아닌 것 같소. 왜 사물을 밝은 쪽으로 보지 못하오? (말이 없다. 그동안 그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랜드 뱅크스라. 그래도 나는 걱정하지 않겠소.


두 번째 목소리: 실제 상황을 비판하고 싶은 뜻은 없소. 결국은 구조 받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소만.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첫 번째 목소리: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소. 그러나 난 낙관주의자일 수밖에 없소.


두 번째 목소리: 배 지나가는 소리 한번 듣지 못했던 어제 당신이 얼마나 낙담했던가 생각나는가요? 안개가 걷히지 않으면 오늘도 마찬가지이기 십상이오. 그러니 너무 희망을 갖지 마시오.


첫 번째 목소리: 어제는 전혀 해가 없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잊고 있군요. 그런 날씨는 다시 없을 거요.


두 번째 목소리: (쌀쌀하게) 아까 우리는 안개 때문에 해를 못 봤을 거요.


첫 번째 목소리: (부드럽게) 그 어린애가 죽은 다음 말이죠?


첫 번째 목소리: (침울하게) 그렇소. 저 여인네가 울음을 안 멈출 거라  생각했소. 우! 소름 끼치는 일이었소. - 그녀의 울음소리, 그리고 안개, 그 밖에 모든 것은 고요한 침묵뿐이었으니 말이오.


두 번째 목소리: 내가 지금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무시무시한 일이었소. 그런 비극을 꿈도 꾼 적이 없었소.


첫 번째 목소리: 분명히 그건 누구나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일이었소. 게다가 내 옷은 젖어 있었고 추위에 떨고 있었소. 지금은 기분이 얼마나 상쾌해졌는지 당신도 짐작할 거요. (투덜거리듯) 지금 옷이 말랐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쩐지 좀 더 따뜻해진 기분이오.


두 번째 목소리: (오래 동안 말이 없다가) 어린아이의 죽음이 무시무시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첫 번째 목소리: (놀라서) 물론이죠. 왜요? 당신은 안 무섭소?


두 번째 목소리: 안 무섭소.


첫 번째 목소리: 그렇지만 좀 전에 당신도 말했잖소.


두 번째 목소리: 나는 그 아이 엄마의 슬픔과 절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소. 그러니 애가 죽은 건 차라리 잘 된 일이었소. 오랜 세월 동안 누추하고 고된 삶을 살아갈 어린애를 죽음이 차라리 구제해준 거요.


첫 번째 목소리: 그 점에 있어서 난 당신 의견과 같지 않소. 누구나 한번의 기회는 가지고 있소. 그러나 우리 모두는 열심히 일해야 하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세상 살아가는 방식이오.


두 번째 목소리: 저 불쌍한 애가 가지게 될 기회란 무엇이겠소? 당연히 못 먹어 병들고 허약할 것이며, 더러운 셋방이나 광산촌의 더러운 오두막집을 옮겨 다니며 살게 될 어린애에게 눅음의 축복이 아니라면 저 애 삶에 어떤 기회가 잇을 것 같소? 저 애가 무식한 폴란드 이민자의 평범한 어린애라는 걸 고려해 볼 때 보통의 능력과 지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오. 짐을 지고 살아가는 짐승이외의 어떤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분명히 없을 거요. 안 그렇소?


첫 번째 목소리: 없지요. 물론 없을 거요. 그러나....


두 번째 목소리: 당신이 저 어린애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당신이 진정으로 저 애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걸 깨워 삶에 직면하게 할 수 있는 말이오? 애 엄마에겐 분명히 기쁨을 주겠지만, 그것이 어린애에겐 과연 기쁨을 주는 일이 되겠소?


첫 번째 목소리: (회의에 빠져)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마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요.


두 번째 목소리: 어떤 다른 관점이란 있을 수 없소. 저 어린애는 태어날 때부터 아팠고 오직 건강한 사람만이 이겨낼 수 있는 유전적인 병에 걸려 있었소.


첫 번째 목소리: 무슨 뜻이요?


두 번째 목소리: 모든 질병들 중에서 가장 무섭고 만연된 병인 가난 말이요.


첫 번째 목소리: (흐뭇해하며) 아, 그것 말이요? 가난이란 꽤 필요한 질병인 것처럼 보이는데 당신은 그것에 대한 치료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군요. 당신이 개신교도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두 번째 목소리: 아 아니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그 모든 것이 매우 공평한 고통을 줄 때가 있단 말이요.


첫 번째 목소리: 난 삶이 꽤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오.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삶을 바꾸고 싶지 않소.


두 번째 목소리: 성공한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당신은 성공한 사람이 틀림없지요? 물질적인 면에서 말이요.


첫 번째 목소리: (아첨하듯이) 그렇소. 당신이 나를 그렇게 말 할 수도 있겠죠. 난 돈을 좀 벌었소. 그러나 돈을 벌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두 번째 목소리: 당신은 삶에 편리한 것들을 누리고 살지요, 안 그렇소? 교육, 먹을 것, 깨끗한 집, 기타 등등 말이요?


첫 번째 목소리: 나는 고등학교를 다녔소. 그리고 물론 당신이 말하는 것들도 소유하고 있소. 내 가족들은 소위 당신이 말하는 가난 따윈 모른답니다. 그러나 결코 부자는 아니요. 왜 그런 것을 묻는 거요?


두 번째 목소리: 저 불쌍한 아이가 살았더라면 몸부림치며 싸워야할 저런 불리한 여건들을 가지고 삶을 시작하면 나중에 성공하고 나서 삶에 만족할 것 같소?


첫 번째 목소리: (조급하게) 오, 모르겠소! 그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 있는 일이요? 세상사라 그런 건 내 책임이 아니잖소.


두 번째 목소리: (조용히) 알겠소. 그것은 당신이 헤쿠바를 위해 물어봐야 하는 경우와 같소.


첫 번째 목소리: (멍해지며) 헤쿠바를 위해서? 오, 당신이 저 여자를 말하는 군. 저기 저 여자에게 내가 아무런 동정심도 없다고 비난할 순 없소. 내 인생에 이렇게 가슴 아파온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 때문에 마음 아파 운 것이 내가 살면서 처음 울어본 울음이니깐 말이요. 그런데 저 여자는 어젯밤 이후로 아무 소리가 없으니 웬 일일까요. 잠들었을까요? 저 여자 보이나요? 나보다 당신이 더 가깝게 앉아 있으니 말이요. (안개가 여전히 짙게 깔려 있으나 점차 밝아지고 있다.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두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식별 된다. - 한 사람은 둥글고, 턱이 튀어나와 있는 깨끗하게 면도를 한 얼굴이다. 또 한사람은 크고 어두운 눈을 가진 타원형 얼굴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은 앞이마로부터 뒤로 밀어 빗어 넘겼다. 구명보트 끝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한 여인의 모습이다. 한쪽 팔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얼굴 위에 쳐들려 있다. 다른 쪽 팔로는 그녀가 하얀 옷 보따리 같은 뭔가를 움켜쥐고 있다.)


피부가 탄 사람: (여인 쪽 가까이 배의 가로장 위에 앉아 있는 두 번째 목소리의 장본인이다. - 몸을 돌려 그녀 쪽을 응시하고 있다. 매우 조용한데, 잠들어 있음에 틀림없소. 그러길 바라오. 불쌍한 여인네!


다른 쪽 사람: 그렇소. 잠시 잠을 자는 것이 그녀에게 좋을 것 같소.


피부가 탄 사람: 그녀 가슴에 어린애를 지금도 껴안고 있군요. (그는 다른 쪽 사람을 향해 원래 위치로 되돌아 앉는다.) 내 생각엔 당신이...


다른 쪽 사람: (기뻐하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날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당신도 아시겠소? 당신이 방금 돌아앉을 때에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들었소. 당신 얼굴을 똑똑히 볼 수가 있고 얼마 전엔 당신의 피부가 흰색인지 갈색인지 구별을 못했소.


피부가 탄 사람: 이제 안개가 걷히기만 하면....


다른 쪽 사람: 걷힐 거요. 기다려 보시오. 나의 낙관주의가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피부가 탄 사람: 배 위에서는 당신이 이 여자를 못 보았으리라고 말하려 했소.


다른 쪽 사람: 본 적이 없소. 나는 대부분의 사간을 브리지 게임을 하면서 끽연실에 있었소. 나는 배를 별로 타 본 적이 없소. - 바다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구요. - 아내와 딸아이들이 고집해서 유럽에 건너갔지만 말이오. 난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소. - 할 수 있는 한 피할 구실을 찾았소. 안 되지. 나 같은 늙은이한테는 새로운 잔꾀를 가르치려 하는 것 말이요. 나는 순전히 사업가여서 사업하고 거리가 먼 이야기엔 불만스럽다오. 나는 맨 주먹으로 사업을 일으켜 세워서 사업은 마치 소중한 내 자식 같은 거요. 사업을 지켜보고 있는 게 내 기쁨이고 잠시 떠나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다오. 모르는 사람에게 사업을 맡기고 싶지 않소. 여행이라면 미국의 작고 오래된 뉴욕이면 나에게 충분하오. (자신의 진정한 애국자적 원칙에 동조해 줄 무슨 말을 기다리며, 그는 인상 깊게 말을 중단한다.) 내가 저 여인네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소? 난 삼등 선실에 내려 간 적이 없기 때문에 본 적이 없는 것 같소. 나는 일등칸 승객을 몇 사람을 본 적이 있다는 기억이 나지만, 별로 호기심은 없었소. 삼등칸은 더러운 굴 같은 곳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