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개인의 재능 /T.S. Eliot
< T.S. Eliot >
전통과 개인의 재능
The 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
T. S. Eliot
이 창배 역
Ⅰ
영어의 저술에서 우리 영국인은 잔통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할 때 전통이라는 말을 가끔 쓰기는 하지만 별로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드물다. 우리는 <전통> 또는 <하나의 전통>에 의거하여 어떤 것을 논할 수 없고 기껏 했자 어느 누구의 시가 <전통적>이니 또는 <너무 전통적>이니 말할 때 이 말을 형용사로 쓸 정도이다. 이 말은 비난에 쓰이는 어구 이외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어떤 정평 있는 작품에 대하여 그것이 고고학적으로 흥미 있이 되살아난 것을 막연히 칭찬할 때 쓰인다. 고고학이라고 하는 확실성 있는 과학에 대한 충분한 관련이 없이는 영국인의 귀에 이 말을 기분 좋게 들려주지 못할 것이다.
확실히 이 말은 현재 또는 과거의 작가를 평가할 때에는 나타나지 않는 성싶다. 국가나 민족은 모두 제각기 독특한 창작 경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비평적 경향을 가졌으며,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창작능력의 단점과 한계를 생각하는 일은 있지만 비평적 습성의 단점과 한계는 오히려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 영국인이 프랑스어로 쓰여진 대량의 비평저술을 통하여 프랑스인의 비평방법이나 습관을 알고 있으며, 또는 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라 프랑스인은 영국민보다 더 <비평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서, 그 사실로써 마치 (영국인은 이처럼 무의식한 국민이다) 프랑스인에게는 영국인보다 자연스런 면이 적은 것처럼 그릇 생각한 나머지 때로 좀 뽐내기까지 한다. 아마 프랑스인은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호흡이나 다름없이 불가피한 것이며,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읽고, 거기에서 감동을 받았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표현하고, 그와 같은 비평활동을 하는 우리 자신의 정신을 비평한들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서 밝혀지는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어떤 시인을 칭찬할 때, 그가 다른 어떤 사람과도 비슷하지 않은 면을 특히 강조하려는 우리의 경향이다. 그의 작품의 이런 면이나 기타 부분에서 개성적인 것 즉, 그 사람의 특성을 발견한 척한다. 우리는 그 시인이 그 이전 사람과 다른 점, 특히 바로 직전 사람들과의 차이점에 주의하여, 다른 작품과 특히 분리시켜서 즐길만한 것이 있는가를 찾고자 애쓴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이러한 선입견 없이 한 시인에 접근해 보면, 그의 작품의 가장 잘 된 부분뿐만 아니라 가장 개성적인 부분까지도 과거의 시인, 즉 그의 선배들이 가장 힘차게 그들의 불멸의 심혼을 경주한 부분인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타인의 영향을 받기 쉬운 청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숙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전통, 즉 전해 내려온다는 것의 유일한 형식이 우리 바로 전세대의 성과를 맹목적으로 또는 조심스럽게 그에 집착하여 그 방식을 그대로 좇는 것이라면, 전통은 확실히 저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단순한 흐름이 모래 속에 파묻히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되풀이보다는 신기가 오히려 낫다. 전통이란 더 넓은 의미를 갖는 문제이며, 그것은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을 얻자면 큰 힘을 들여야 한다. 전통은 첫째 역사적 의식을 내포하는데, 이 의식은 25세 이후에도 계속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이에게는 거의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의식에는 과거의 과거성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그 현재성에 대한 인식도 내포되어 있으며, 이 역사의식으로 말미암아, 작가가 작품을 쓸 때 그는 골수에 박혀있는 자신의 세대를 파악하게 되며, 호머 이래의 유럽의 문학 전체와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자국의 문학 전체가 한 동시적 존재를 가졌고 또한 동시적 질서를 구성한다는 느낌을 반드시 갖게 된다. 이 역사의식은 일시적인 것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항구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며, 문학자에게 전통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한 작가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지하는 자기의 위치와 자신이 속해 있는 시대에 대하여 극히 날카롭게 의식하는 것이다.
시인이건, 어느 분야의 예술가이건 혼자서 완전한 의의를 갖는 자는 없다. 그의 중요성, 즉 그에 대한 평가는 그와 과거의 시인들과 예술가들에 대한 관계의 평가이다. 우리는 그를 단독으로 평가할 수 없고, 대조하고 비교하기 위하여 과거의 예술가들 사이에 놓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만 역사적 비평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미학적 비평의 원칙인 것이다. 작가가 순응해야 하고 일치해야 할 필요성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한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작될 때 일어나는 것은 그 이전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현존하는 고전작품들은 그 작품들 간에 한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고전들 앞에 새로운(진정 새로운) 예술작품이 소개됨으로써 그 질서는 수정된다. 현존 질서는 신 작품이 도래하기 전에는 완전하다. 신기한 것이 계속 일어난 뒤에도 그 질서가 꾸준히 서 나가기 위해서는 현존 모든 질서는 다소라도 변경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전체에 대한 각개 예술작품의 관계와 균형과 가치는 재조정되는데, 이것이 낡은 것과 새것간의 순응이다. 유럽의 문학이나 영국의 문학형태에 있어 이 질서의식을 시인한 자는 누구나 현재가 과거에 의하여 이끌리는 만큼 과거는 현재에 의하여 변개된다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시인은 큰 어려움과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특별한 의미에서, 시인은 또한 과거의 표준에 의하여 반드시 비판받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비판을 받는 것이지 가치의 절하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시인만큼 훌륭하다거나 나쁘다거나 이러한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비평가가 세운 기준에 따라 평가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신구 양측이 서로 신은 구에 의하여, 구는 신에 의하여 측정되는 평가이고 비교이다.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다만 과거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순응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술작품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새 작품이 과거의 기준에 적합하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없지만, 적합하다는 사실은 그 가치의 표준이다. 실상 그 표준은 우리가 다만 서서히 조심해서 응용할 수 있는 표준이다. 왜냐하면 일치 여부를 틀림없이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이다. 일견 일치하는 것 같지만 어쩐지 개성적인 것인지도 모르고, 일견 개성적인 것 같으면서 일치할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면서 다른 것이 아닌 것은 거의 없는 것이다.
시인의 과거에 대한 관계를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 시인은 과거를 하나의 덩어리로, 즉 구분할 수 없는 한 환약뭉치로 생각할 수도 없고, 또는 전적으로 한두 가지 개인적으로 감탄한 것에 기준하여 자신을 형성할 수도 없고, 또는 순전히 자기가 좋아하는 한 시대를 본뜰 수도 없다. 첫째 점은 허용될 수 없지만, 둘째 점은 청년기의 귀중한 경험이며, 셋째는 쾌히 한껏 바랄 수 있는 보충책이다. 시인은, 중심적인 흐름을 깊이 의식할 필요가 있다. 그 흐름은 결코 특출한 명성 사이로만 변함없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결코 개선되는 것이 아닌데 예술의 소재만은 변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또한 유럽의 정신이나 자국의 정신은(그것이 자기자신의 개인적 정신보다는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때가 있겠지만) 변천하는 것이며, 이 변천은 하나의 발전이어서, 그 발전 도상에서는 어떤 것이고 버려지는 것이 없고, 셰익스피어나 호머나 구석기시대 화가의 암벽까지도 폐물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아마 세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확실히 복잡화하는 이 발전은 예술가의 견지에서는 조금도 진보가 아닐 것이고, 심리학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진보는 아닐 것이고, 다만 경제상태나 기계의 복잡화에 관점을 두고 본 결과에서만 진보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 사이의 차이는, 현재를 의식하는 것은 과거를 의식하는 것인데, 그것이 과거가 과거 자체에 대해서 가졌던 의식과는 다른 면에서 그리고 보다 광범위하게 의식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과거의 작가는 우리보다 아는 것이 매우 적었으니까 우리와 거리가 멀다」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 과거의 작가들이다.
이것은 시의 역할에 대한 나의 생각의 분명한 일부인데, 이에 대하여 항상 항의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항의란, 즉 이론상 지나칠 정도로 많은 분량의 현학(衒學)이 요구된다는 것인데, 그런 요구쯤은 만신전에 모신 시인들의 전기를 예로 들기만 해도 능히 물리칠 수 있다. 과도의 학문은 시적 감수성을 죽여버리거나 그르친다고 확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감수능력과 느긋한 마음을 침해하지 않을 정도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굳이 믿는 바이고, 한편 지식을 시험용이나 응접실용이나 또는 더욱 외식적 선전방식을 위해서 어떤 유용한 형체에만 국한하는 것은 재미없다. 어떤 이는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데, 아둔한 이는 그것을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대부분의 기타 사람들이 전 대영박물관에서 얻을 수 있는 이상의 역사의 정수(精髓)를 플루타크로부터 습득하였다. 시인은 반드시 과거의 의식을 발전시키거나 획득하여야 하며, 한평생 그 의식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그 순간의 자기자신을 항상 보다 더 가치 있는 것 앞에 굽히는 것이 된다. 한 예술가의 발전이란 끊임없는 자기희생이요, 개성의 지속적인 탈각(脫却)이다.
이제 남은 일은 이 개성탈각화 과정과 전통의식에 대한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예술이 과학의 상태에 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몰개성화(沒個性化의)의 경우에 있어서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에게 한 암시적인 유추(類推)로서, 한 줄의 가늘게 묶인 백금선이 산소와 이산화유황3)을 담은 용기에 들어갈 때 일어나는 작용을 고찰해 보도록 권유하는 바이다.
Ⅱ
정직한 비평과 예민한 평가는 시인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시로 지향한다. 만약 우리가 신문비평가들의 종잡을 수 없는 부르짖음과 거기에 호응하여 반복하는 일반의 소근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많은 시인의 이름이 들릴 것이다. 우리가 의회보고록과 같은 지식이 아니라 시를 즐기기 위하여 한 수의 시를 찾는다면, 그렇게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한 수의 시와, 쓴 사람이 다른 기타의 모든 시와의 관계의 중요성을 지적하고자 애써왔고, 현재에 이르기까지에 생산된 모든 시의 전체적인 유기체로서의 시의 개념을 시사하였다. 탈개성적 시론의 또 한 가지면은 시와 그 작자와의 관계이다. 이 점에서 나는, 하나의 유추에 의하여, 원숙한 시인의 정신과 미숙한 시인의 정신간의 차이는 확실히 어떤 <개성>의 가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흥미 있는 점이 많다 적다 또는 내용의 풍부 여부 등이 아니라, 그것은 시인의 정신이, 특수하고 다양한 감정을 마음껏 자유로 구사하여 새로운 결합을 이루게 하는, 세련되고 원숙한 매개체가 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 바 있다.
앞서 유추로서 접촉매개체에 관한 것을 말하였거니와, 거기에서 말한 두 가지 기체가 백금선 있는 데서 혼합되면 그것은 아류산4)이 된다. 이 화합은 다만 백금선이 있을 때만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들어진 산에는 백금의 자취가 없을 뿐 아니라 백금 자체는 외관상 영향을 받지 않은 듯이 하등의 화학적 변화도 없이 중성으로 전과 같은 상태를 지속한다. 시인의 정신은 곧 한쪽의 백금과 같아서, 그것이 부분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시인 자신의 경험 위에 작용을 가하지만, 예술가가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경험을 하는 인간과 창조하는 정신이 시인의 심중에서 완전히 분리할 것이고, 그 정신은 더욱 완전히 그 정신의 소재인 열정을 소화하고 변경할 것이다.
독자들은 알겠지만,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제가 있는 데로 들어가는 한 원소인 경험은 두 종류로 되어 있으니, 정서와 감정5)이 그것이다. 한 예술작품이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는, 예술 이외의 어떠한 경험과도 종류가 다른 경험이다. 그 경험은 한가지 정서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몇 가지 정서의 결합일 수도 있는데, 그런 정서에 독특한 언어나 어구나 영상 속에 들어있는 작가가 느낄 수 있는 각양각색의 감정이 첨가되어 최종적 결과를 구성하는 수도 있다. 또는 위대한 시가, 어떠한 정서(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도 직접 쓰이지 않고 단순한 감정만으로써 이루어지는 수도 있다. 『지옥편』 제15가(브루네토 라티니)는 그 장면에 뚜렷한 정서로써 성립되어 있으나, 그 효과는 비록 어떤 예술작품의 효과나 다름없이 단일하지만, 상당히 복잡한 세부적 구조에서 온 것이다. 같은 시의 마지막 4행은 한 영상과 그 영상에 부수된 감정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감정은 <나타난> 것이지, 그 앞장으로부터 단순히 발전한 것이 아니며, 거기에 첨가되기 위하여 시인의 심중에 구체적 결합이 일어날 때까지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시인의 정신은 사실상 무수한 감정이나 어구나 영상을 포착하여 저장하는 용기로서, 그런 것들은 마침내 한 새로운 화합물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모든 분자들이 함께 모일 때까지, 그 용기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수한 시에서 그 중심이 되는 몇 절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결합의 유형이 대단히 다양한 것을 볼 것이고, <장엄>이라는 유사 윤리적 평가기준 따위는 모두 완전히 목표에 어긋난 것임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구성요소인 정서가 위대하냐 강렬하냐가 아니라, 예술적 방법의 강렬성, 즉 용해작용을 일으키는 압력의 강렬성이다. 파올로와 프레체스카의 삽화는 분명한 정서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시의 강렬성은 우리가 그 삽화의 인상을 통하여 상상하는 경험의 강렬성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더구나 이 삽화는 정서에 직접 의존하지 않는 제26가 율리시즈의 항해보다 더 강렬하지 못하다. 정서를 변질시키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다양성이 있을 수 있다. 아가멤논의 살해, 오셀로의 고민 등은 단테의 여러 장면보다 있을 수 있는 진실에 더욱 실감 있는 예술적 효과를 준다. 『아가멤논』에서 예술적 정서는 실제 목격자의 정서에 접근하며, 『오셀로』에서는 주인공 자신의 정서에 접근한다. 그러나 예술과 실제 사건과의 차이는 항상 절대적이고, 아가멤논의 살인으로 되어 나타나는 그 결합은 율리시즈의 항해와 같이 복잡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여러 가지 요소가 융합한 것이다. 키츠의 「나이팅게일 송가」에는 수많은 감정이 들어있는데, 그 감정은 나이팅게일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그 새의 매력 있는 이름으로 인하여, 일부는 그 명성으로 인하여 그 감정이 결합하게 된 것이다.
내가 지금 애써 공격하는 관점은 정신의 본질적 단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과 관련될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는 것은 즉 시인은 개성을 표현할 것이 아니라, 특수한 매개체-즉 여러 인상과 여러 경험이 특이하고 예기를 불허하는 방식으로 결합하는, 개성이 아닌 단순한 매개체-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에게 중요한 인상이나 경험이 시에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고 시에서 중요해지는 인상이나 그 시인 자신이나 개성에서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이상 논한 점에 비추어 (또는 그것에 상관없이) 새로운 관점으로 관찰할 만한 낯선 시를 1연 여기에 인용코자 한다.
그 여자의 죽음에 엄청난 행동으로 복수하려고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반한 내 자신을 꾸짖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누에는 그대 같은 이를 위하여 고치를 짓고
그대 같은 이를 위하여 죽는 것일까.
여자를 길러 한 당황스런 순간의 값싼 보람을 위하여
사나이의 영지(領地)가 팔려야 하는가.
어째서 저 녀석은 이런 일을 곱게 꾸미고자,
목숨을 심판자의 입술에 내맡겨가며
정도(正道)를 어기고,
인마를 길러 여자를 위하여 용맹을 무릅쓰는 것일까.
And now methinks I coulde'en chide myself
For doating on her beauty, though her death
Shall be revenged after no common action
Does the silkworm expend her yellow labours
For thee? For thee does she undo herself?
Are lordships sold to maintain ladyships
For the poor benefit of a bewildering minute?
Why does yon fellow falsify highways,
And put his life between the judge's lips,
To refine such a thing - keeps horse and men
To beat their valours for her?…6)
이 연에는 (문맥상 분명하지만) 적극적 정서와 소극적 정서가 결합되어 있다. 즉, 미(美)에 대한 강한 매력과, 그 미와 대조적으로 미를 파괴하려는 추(醜)에 의하여 끌리는 등등의 힘찬 매혹이다. 여기에서 대조된 정서의 균형이 적절한 대사로 이루어진 극적 장면에 나타나 있는데, 이 극적 장면으로서는 정서의 균형에 불충분하다. 이것은 말하자면 극에서 나오는 구조적 정서이다. 그러나 전체적 효과나 우세한 어조는, 이 정서와 유사점은 있지만 표면으로는 결코 알 수 없고 포촉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이 그 정서와 결합하여 새로운 예술감정을 나타내는 데서 온다.
시인이 어떤 점으로든지 특출하거나 흥미를 끄는 것은, 그의 개인적 정서, 다시 말하면 그의 생활의 어떤 특수한 사건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인 그 사람만이 가진 특수한 정서는 단순하고 생경하고 멋없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 담긴 정서는 대단히 복잡할 것인데 그것은 인간이 그들의 생활에서 갖는 정서가 대단히 복잡하고 특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상 시에서 괴벽을 부리는 사람의 한 가지 잘못은, 새로운 인간정서를 표현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이렇게 그릇된 곳에서 신기를 찾기 때문에, 괴상한 것을 찾게 된다. 시인의 업무는 새 정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정서를 사용하는 것이고, 그것으로써 시를 만들 때 조금도 현실정서에 들어있지 않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경험하지 않은 정서나 그에게 익숙한 정서나 모두 그의 필요에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평온한 상태에서 회상된 정서」7)는 부정확한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시는 정서도 아니오, 회상도 아니오, 말뜻 그대로의 평온도 아니다. 시는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 보면, 조금도 경험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수한 경험의 집중이며, 집중으로 인하여 생겨난 어떤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나 또는 심사숙고 끝에 일어나는 집중이 아니다. 이런 경험은 <회상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결국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결합한다 하더라도, 그 <평온>은 다만 사건에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고, 시를 쓰는데 염두에 두고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사실상 졸렬한 시인은 흔히 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무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의식적이다. 어느 쪽이든지 이런 오류로 말미암아 그 시인은 <개성적>으로 된다. 시는 정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정서에서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에서의 도피이다. 그러나 물론 개성과 정서의 소유자라야 개성과 정서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이유를 알 것이다.
Ⅲ
그러나 이성은 한층 신성해서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 시론은 형이상학 또는 신비주의의 영역에까지 추론하지 않고, 시에 흥미를 갖고 그 사리를 알만한 사람이면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 결론에 국한코자 한다. 시인에게서 시로 흥미를 전환하는 것은 그 의도가 훌륭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시건 나쁜 시건 실제 시에 대하여 좀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진지한 정서의 표현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도, 그 기교의 우수성을 아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정서란 그 생명이 시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시인의 전기(傳記)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데, 이 <중요한> 정서가 표현되어 있을 때, 그것을 분간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예술의 정서는 몰개성적이다. 그리고 시인이 자기가 제작하는 작품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던지지 않고서는, 몰개성 상태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의 현재적 순간에 살지 않으면, 그리고 죽은 것뿐 아니라 이미 살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는 아마 무엇을 제작할 것인가를 모를 것이다.
각주
1) T. S. Eliot, 이창배 역, "전통과 개인의 재능," 「T. S. 엘리엇 문학비평」, 이창배 전집, 3(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99), pp. 3~14.
2) 이 논문은 1919년 The Egoist 지에 실려 발표된 엘리엇의 최초의 주요 논문이다. 그의 시론의 핵심인 전통론과 몰개성시론이 제시된 글이어서 매우 중요시된다.
3) 二酸化硫黃(sulfur dioxide): 황 또는 황화물을 때울 때 생기는 질식적 자극성 냄새가 나는 무색의 기체.
4) 亞硫酸(sulfurous acid): 아황산의 구칭. 이산화황의 수용액. 강한 황산을 가하면 분해되어 이산화황(기체)이 발생함. 산소와 화합하여 황산으로 되려는 경향이 강하여 환원제, 표백제로 쓰임. H2SO3. 황산(Sulphuric acid): 무기산의 하나. 무색 무취의 끈끈한 油狀 액체로서, 저온에서는 결정함. 질산 다음가는 강한 산성을 띠며, 금 및 백금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금속을 녹이고, 물에 혼합하면 다량의 열을 냄. 강한 吸濕性을 지니며 유기물에 닿으면 탄소를 유리시킴. 황을 가열하여 이산화황을 만들어 질산 증기와 함께, 鉛室에 도입한 다음 수증기를 통해서 만드는 연실법 및 이산화황을 백금, 오산화 바나듐 등의 촉매로 산화시켜 물에 녹이는 접촉법 등에 의하여 짙은 황산을 만듬. 수용액에서는 약 90% 이상의 농도의 것을 진한 황산, 이것보다 낮은 농도의 것을 묽은 황산이라 함. 공업상의 용도가 넓어 연산, 질산의 제조, 비료,폭약, 알카리 등의 공업, 유기화합물의 합성, 油脂의 정제 외에 탈수, 건조 등에도 사용됨. 황산 생산량은 그 나라의 화학공업 수준의 척도가 될 정도로 매우 중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