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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 상봉, 그리고 그 이후

김영관 2017. 11. 2. 22:06

극적 상봉, 그리고 그 이후 ]

김 영 관

123ykkim@hanmail.net

 

영화 남과 북의 주제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라는 노래와 함께 KBS TV 기획프로 이산가족 찾기의 이산가족 상봉 장면은 내 지금도 가슴을 찡하게 한다. 북에서 남으로 피란 내려오면서, 혹은 남진해오는 북괴군에 쫒겨 서울 등지에 거주했던 피란민들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헤어진 부모 형제를 찾는 프로였다.

시청자들 눈에도 어쩌면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혈연들은 만남의 장소에 듷들어서는 순간 시청자들 눈으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생김새가 닮았을까? 서로의 고향과 부모 형제, 일가친척들, 형제자매들의 나이와 이름 등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찾는 이산가족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들은 서로 껴안고 오열하고 그 장면을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함께 울던 그 프로를 어찌 세월이 흘렀다고 잊겠는가?

 

회고해 보건데 내게도 그에 못지않은 극적 상봉의 순간들이 몇 차례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극적 상봉이란 예기치 못한 이별로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뚯 밖에 만나는 경우를 말함)

첫 번째 경우라 할 수 있는 극적 상봉의 사건은 다음과 같다.

서울에 사는 큰 집 형이 내게 급한 목소리로 알려 온 소식은 그야말로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형이 지방 출장 중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흘러나온 라디오 방송청취 중이었는데 중국 연변에 살고 있는 동포가족이 대한민국에 거주 중인 일가친척 찾는데 고향 주소, 찾는 사람 성명이 모두 형의 기억 속의 생생한 이름들이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당숙네 다섯 형제들 중 세 형제들이 중국 연변으로 이주해가서 잠시 살다가 막내 당숙네 식구만 남겨 놓고 두 당숙네 식구들은 고국에 돌아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형도 나도 어린 시절 가끔 들은 바가 있었다.

 

내 기억의 두 번째 극적 상봉은 고등학교 졸입 이후 내 오십대 중반의 시절에 나타난, 그러니까 30여년에 모습을 드러낸 초등학교 여자 동창과의 해후였다. 친구들 어느 누구도 그녀가 고향을 떠난 이유를 알지 못했던 동창 여학생이 수십 년 만의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세 번째 극적 상봉은 최근에 발생한 것이다.

올 늦은 봄 어느 저녁 시간, 대학 3학년 시절 어떤 모임의 결성 때 회원으로 인연을 맺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동안의 세월을 손꼽아 보니 50년도 넘은 세월이었다. 이 또한 내 극적 만남에 해당되는 일 아니겠는가?

 

, 중국에 살던 당숙모, 오랜 세월 소식 궁금했던 여자동창생, 대학 졸업 후 소식 두절 됐던 친구, ()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내겐 모두 극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건들이었다.

이산가족이 상봉할 때의 기쁨은 잠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씁쓸한 뒷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상봉 가족들 간에 경제적 문화적 격차가 심했을 경우, 어느 한쪽에게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쪽이 부자 쪽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만큼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 마는 피보다 물질적이 더 중시 되는 현실이 이산가족들을 두 번 울리는 아픔이 아닐까? 이산가족 상봉의 기쁨 이후에 내 가족이 부담스러운 존재’, ‘거머리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비애가 얼마나 컷겠는가?

막내 당숙모가 고국에 와서 당숙네 식구들을 만나려고 고향 방문을 했지만 당숙들은 모두가 이승을 떠나고 셋째 당숙모만 살아 남아있어서, 다른 가족들은 두 분의 느끼는 상봉의 감회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미 많이 변해 버린 고향, 익숙하지 얼굴들만을 쳐다보며 느끼며 어색해하는 막내 당숙모가 안타까웠다. 함께 부디 끼며 고락을 함께 한 적이 없는 당숙모네 가족을 대하는 우리 역시 공통적인 대화의 부재가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음에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리도 마음에 그리던 고향을 찾아 왔는데, 할 말을 잃어버린 막내 당숙모는 실어증에 걸려버린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이별의 시간이 너무 길다보니 공통의 대화거리가 없어져 일 것이다..

일본에서 귀국해서 만난 여자 동창은 머릿속으로 그리던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다른 데서 만났더라면 서로 모른 채 지나칠 정도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내가 봐도 낯선데 왜 그녀의 변한 모습에 놀라야 하는가? 그녀 역시 그리던 고향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은 모두가 떠나고 없음에 낯설어 하는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여자 동창의 부모 형제 안부를 묻고 그들의 소식을 들은 다음의 공통의 대화거리 부족으로 오는 침묵이 나를 슬프게 했다.

50여년 만에 목소리를 들은 대학 친구를 남 광주 시장 술집에서 만났다. 우리는 술잔을 들고 재회의 기념하는 축배를 들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광주를 떠나 살아야 했던 이유, 어느 정도 축재를 해서 예전 친구를 당당하게 만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한다.

대학 시절 함께 했던 모임 친구들의 근황을 이야기한 다음, 극적 만남 이후에 겪는 공황 비슷한 두려움이 내게 엄습해온다.. 우리가 함께 기억하는 것들을 다 말해버린 후, 공통된 이야기 거리가 없으면 무슨 이야기로 긴 세월의 공백의 이야기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 순간 중국의 막내 당숙모의, 여자 동창생의 난감해 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랜 이별 후의 만남 다음에 오는 공통의 대화거리 부족으로 오는 낯설음에 나는 서럽다.

평생을 함께 하려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든 오래 떨어져 살면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