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꿈에 불과한 것
인생은 꿈에 불과한 것
김 영관
한 세상을 살아온 촘촘히 박힌 그물 같은 그리운 이야기들이 추억으로 쌓였다.
광주에서 30분 거리이지만 1970년대 초반엔 좁고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영산포를 지나 드문드문 다니는 완행버스로 3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에 소재한 작은 면 소재의 시골 중등학교. 광주에 가족을 둔 선생님들은 통근이 어려워 하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들 하숙만을 전문으로 하는 집까지 생겼다. 그 집에서 여덟 분의 선생님들이 하숙을 했는데 한 방에 두 사람씩 쓰면서 살았다. 방과 방 사이는 미닫이 문이어서 옆방 출입이 자유로웠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이던 겨울 어느 날, 총각 선생 Y의 약혼녀가 광주에서 하숙집을 찾아왔다. 이유 인즉 결혼 준비 차라곤 하지만 그가 보고 싶어서 찾아 왔을 것이다. 퇴근시간이라야 만날 수 있으니, 날은 어두워졌고 계속 내리는 눈 때문에 여관까지는 제법 먼 거리여서 Y와 약혼녀는 난감해 했다.
결혼 날짜를 잡아 놓은 사이인지라 하숙집에서 자고 가도 된다며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큰 선심(?)을 쓰듯 하숙에서 머물기를 권했다. 그 저변에는 호기심과 장난기도 약간은 발동했지 않았나 싶다. Y와 같은 방을 사용하는 J 선생님은 자신의 베개를 들고 옆방으로 피해주는 연기를 과장되게 연출해서 모두를 웃게 만들기도 했었다.
겨울밤은 길고, 결혼을 앞두긴 했지만 아직은 처녀 총각이 한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상황에서 세분의 선생님들은 옆방의 숨소리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이불 들썩이는 소리, 점차 거칠어가는 숨소리, 그리고 절정 이후의 고요에 세 분 선생님들도 막 잠이 들려는 순간이었다.
“자기야, 또오~?”
약혼녀의 행복에 겨운 비음 섞인 목소리에 화들짝, 그들의 잠은 천리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다시 귀를 쫑긋하고 옆방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다. 밤새워 사각거리는 눈 내리는 소리만으로도 잠 못 이룬 선생님들은 그 날 밤을 뜬눈으로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Y 선생의 별명은 “자기야, 또오~?”였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하숙집에서 까지 함께 지내며 그야말로 동고동락하며 친하게 지내던 교사들은 하나 둘 인근 도시인 광주나 목포로 직장을 옮겨가게 되었다. 그 때 그 시절. 때론 아름답고 때론 아파했던 삶의 흔적들이 예쁘게 채색되어 가슴속에 추억으로 간직되어 있다.
요즈음엔, 지난 날 아름다웠던 기억들로부터 나를 찾아내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존경하는 원로 교수님 한분이 정년하고 연구실 문을 나서며 혼잣말처럼 하시는 “홀가분해서 좋다. 그 동안 어깨를 짓눌러왔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하고 싶었던 일하면서 자유스럽게 살고 싶다.”는 말씀에 별 감동 없이 “그렇게 하십시오.” 했었다.
세월은 참으로 빨리 흘러 그 분이 하시던 말씀과 똑같은 말을 남기고 나 역시 학교의 문을 나선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주로 독서와 글쓰기로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일주일에 한 두 차례는 고향 친구들과 바둑과 산행 등으로 외롭지 않게 살아 왔지만, 마음속 깊은 곳엔 우리네 인생 잠시 잠깐이라는 허무함까지 비워 낼 수는 없었다.
봄날 가로등 불빛에 흩날리는 벚꽃이 눈부시게 황홀하였다.
사람도 화려하게는 아니지만 추하지 않게 사는 게 뭘까? 후배 한 사람이 ‘방문 교수’로 1년 미국에 체류하다가 고국에 오는 비행기를 타기 바로 직전, 갑작스런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바 있다. 담당 의사의 권유로 귀국 후 꾸준히 수영을 해서 디스크 회복에 큰 도움을 받았다. 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친구와 수영 강습을 받아보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이 들수록 몸이 청결해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공감되어 월 수 금, 수영을 배우고 따뜻한 물에 사우나도 하니 건강도, 기분도 한결 좋아진 것 같다.
수영 강습을 마치고 식당으로 가는데, 40여 년 전 첫 직장으로 시골 중등학교 교사로 함께 하숙했던 자기야 또오~? 선생을 만났다. 염색한 머리 때문인지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깊게 패인 주름살 뒤로 싱긋 웃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수줍기 그지없던 Y 선생의 약혼녀가 어떻게 변했을까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그녀와의 사이에 몇 남매를 두었는지도 묻는다. 마음은 청년시절 그대로인데 세월이 우리를 중늙은이로 만들어 그도, 나도 익숙지 않는 서로의 모습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어이! 생각나나?
시골 마을로 가정방문 가면 학부형들이 날계란 깨주던 기억이 지금도 머리에 선해. 날계란 한 알 먹고 나면 다시 또 한 알... 몇 집 가정 방문 마치고 하숙집으로 돌아올 때면 뱃속에서 출렁이던 날계란들. 아마 두어줄 쯤 되는 날계란이 걸음을 걸을 때마다 뱃속에서 출렁이던 것을.
내 반 학생들 60여명 이름을 출석부 보지 않고도 다 외어 부르던 그야말로 온 정열을 다 쏟았던 젊은 날. 시골 촌놈들이 서울 명문대를 비롯해서 3군 사관학교, 교육대 등을 다수 입학하지 않았던가? 도시로 옮겨와 선생을 해봤지만 그때만큼 행복하고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던 시절은 없었어. 그 시절로 다시 돌아 갈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다.
셰익스피어가 ‘인생은 단지 꿈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요즘엔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