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막간극 같은 인생
낯선 막간극 같은 인생
김 영 관
요즘 아내의 건강에 적신호가 와서 아내와 함께 병원 드나드는 일이 빈번해졌다. 자연히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나 링거병을 달고 휠체어를 밀고 가는 환자가족들과도 마주치게 된다. 어쩌다가 임종이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은 환자들을 보며 나는 지난 날 나와 내 주변에서 일어났던 아픈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버님은 칠십 중반의 연세에도 멱살잡이하며 싸우는 젊은이 두 사람을 양손에 한명씩 힘들이지 않고 떼어내 말리실 정도로 건장하시던 아버님이셨는데 시골 병원의 권유로 내가 살고 있는 광주의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장수하시리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아버님의 임종이 멀지 않았다는 병원 측의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우리 형제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식들의 충격도 충격이지만 아버님 본인이 알면 얼마나 실망과 좌절이 클 것인가 때문에 우리는 당분간 아버님께 이 소식을 알리지 말자고 밀약을 했다.
병원에 조금 늦게 도착한 큰 누나가 병실 밖에서 형제들로 부터 아버님의 임종이 멀지 않았음을 듣더니 곧바로 눈물을 쏟는다.
칠남매 중에 가장 속마음을 많이 털어놓고 지내던 큰 누나를 반갑게 맞던 아버님은 방금 전까지 병실 밖에서 울어 붉어진 누나의 눈을 보며 “내가 얼마 살지 못할 병에 걸린 것이 맞지?”하며 자신의 삶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하시는 것 같았다. 가족들의 함구에도 불구하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아버님은 스스로 판단하고 정리하시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의연하셨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처음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병원 측이나 가족으로부터 들었을 때 환자는 실망하지만 남은 삶을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과 이별할 마음 준비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고마움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표시를 하거나, 살아오면서 본의 아니게 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과의 관계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성격에 따라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려주자 바로 그날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완전히 좌절하여 한숨만 쉬다가 세상을 마감하더라며 환자에게 절대 알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예전과는 달리 환자 본인에게 알려줘야 마음정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한다는 주장이 더 우세한 것 같다.
얼마 전 아내를 동반해간 병원에서 암 수술을 받은 환자의 보호자와 담당 의사가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아주 드문 경우가 발생하게 된 모양이다. 수술 팀이 환자를 수술하는 과정에서 절개를 해보니 예상과 달리 암이 여러 장기로 전이 되어 손을 댈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러 그대로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참으로 미안하다”는 담당의사의 진정어린 대화가 가슴을 찡하게 하였다.
며칠 후 그 환자 가족들은 회복과정이 좋아 완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발병이후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으로 병원에서 실시하는 항암 치료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환자를 보며 가슴만 태우고 있었다.
환자에게 진실을 말해주어 삶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한다는 주장과 그 반대의 경우를 나는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이 환자에게는 어떻게 해줘야 하는 것이 최선일까? 우리 아버님처럼 본인이 알아차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정리 해주다면 서로 간에 충격이 덜 할 텐데.
이건 우리 모두의 고민이자,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 왔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는 각자의 몫이니까.
요즘 나는 유진 오니일의 <낯선 단막극>에서 처럼 우리는 낯설기 그지없는 인생을 살다 마감하는 단막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