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 나의 인생 3
나의 문학 나의 인생 3
1-1)나의 인생 김 영 관
나는 전남 함평군 대동면 물방앗간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고향에서 입학졸업하고 대학 4년을 광주에서 보낸 외에는 전반기 30여년을 고향에서 보냈다. 그리고 후반기 삶은 전셋집 전전했던 기억으로만 남는 광주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뿌리내리지 못한 부평초 삶이었다.
겨우 마련한 아파트의 삶은 늘 주변 사람들과의 울타리치고 사는 소외와 고독의 삶이다. 5.18 민주화와 관련되어 직장에서 해직을 당하고 8년 만에 복직한 혹독한 아픔을 겪었던 삶 또한 광주의 삶이었다.
긴 해직 기간으로 인해 대학 교수가 당연히 해야 할 학문 매진의 기회를 놓쳤음에도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나는 밤샘 연구를 했다. 덕택에 교환교수로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유펜에서 1년을 보내는 혜택을 누리기도 했고 영미 문학을 하는 내겐 참으로 귀한 문화체험을 경험했다.
아픔을 겪고 나서 비로소 ‘자신이 서 있는 줄에 서지 않은 사람은 곧 적’이라는 흑백 논리의 삶이 결코 옳지 않았음도 알게 되고, 복수극의 대가 셰익스피어의 말년 극 <템페스트>에서 셰익스피어는 ‘사랑과 용서’가 문학의 최고 주제임을 깨닫기도 했으며 훗날 내 문학의 주제 중의 하나로 삼기도 했다.
매년 함평군에서 개최하는 국화 축제지 바로 아래 대동면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저수지에서 동네 쪽으로 내려오면 물레방앗간 집이 있었는데(지금은 흔적도 없음) 그곳에서 해방 2년전인, 그리고 6.25발발 3년 전인 1947년 1.28(음) 아버지 김효현 어머니 윤길님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내가 태어났다. 형 한분 누나 두분, 그리고 남동생 둘이 내 형제들이다. 당숙모와 어머님이 같은 무렵 임신 중이었는데 당숙모네는 아들, 어머님은 딸을 낳을 것으로 종조할아버님은 생각을 하시고 내 이름은 여자 아이의 이름을 지어작명해 놓았는데 두 아이의 성별이 바뀌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서로을 바꾸어 부르게 되어 훗날 내 이름에 가끔 낯설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 왔다.
물레방앗간에는 3개면 지역(대동면, 손불면, 신광면) 사람들이방아를 찧으러 몰려들어 전기 없는 세상에 물방앗간 전기불을 훤히 밝힌 가운데 방아를 찧었고 그 인근 마을 분들은 물방앗간 동력 덕택에 전등을 켜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물방앗간에서 흘러내리는 쌀보리를 먹기 위해 물고기들이 몰려들어 아버님은 투망을 한 두번 물에 던져 먹을 만큼만 물천어를 잡아 호박, 고추 등을 넣고 끓인 알큰한 물천어 매운탕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
네 살까지 그곳에 살다가 6.25 민족상잔의 발발로 함평읍으로 이사를 나와야만 했다. 읍내는 이미 군인과 경찰이 지배를 하였는데 불갑 산으로 도주한 빨찌산들이 저녁이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불갑산 인근 산골마을에 자주 출몰하였다. 형과 누나가 겪은 6.25의 기억은 생생했지만 4살박이인 나는 흑백사진 몇 장이 순간순간 스쳐가는 듯 내 머리를 스칠 뿐 6.25에 관한 확실한 기억은 없다. 광주 금남로 외갓집에 나를 잠시 피신시킨 적이 있었다지만 내 기억엔 남아 있지 않는다. 아주 우연하게 어느 책에서 읽어 안 사실은 여성 국 극단 단장이었던 함평 출신 임춘앵 여사가 금남로에서 6.25 피신 생활을 했다는 우연에 놀랐다.
내 어린 시절 읍내 골목골목에 창을 배우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함평이 창의 본고장 중에 하나라는 것을 옛 어른들은 기억하고 계신다.
네 살 되던 해 영수천 냇가에 굴러다니는 조약돌 중에 권총 모양의 조약돌을 주워 호주머니에 차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쟁을 겪으며 살다 보니 책 글보다는 총 놀이에 더 관심에 많았음에 지금 생각해도 우리 국민들에게 참으로 불행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지금은 함평 자광원 자리인 곳에 아버님은 다시 정미소를 차렸는데 이번에는 물방앗간은 아니었다. 쌀 정미뿐만 아니라 미영 타는 기계도 설비되어 있었다. 중국에서 그 이름을 따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동면에서 집 앞으로 흘러 영산강으로 흘러가는 천을 영수천이라 했고 거기에서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읍내를 형성케 한 산이 기산이다. 그래서 함평하면 기산과 영수로 유명하다.
이사 온 정미소집에는 오리를 많이 키웠는데 아침이면 막대기 하나들고 그 많은 오리 떼들을 앞세우고 영수천으로 몰고 가곤했다. 해질 무렵이면 다시 내가 나가 오리들을 데리고 오곤 했는데 형제 많은 집에서 내가 주로 그 당시에 맡아한 일이었다. 영수천엔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많았는데 피비병에 된장을 넣고 유속 빠른 물속에 잠깐 넣었다가 건져내면 피리들이 그 속에 가득했고 영산강에서 올라온 민물 장어들도
전기 충전기로 인해 허옇게 배를 뒤집혀 떠오르는 것을 장면도 내긱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엔 초등학교 입학이 늦어 8살에 입학을 하는데 나는 정월생이라 초등하교 입학이 너무 멀어서 온지 함평 공원 가까이 살고 계사는 당숙네 집 종조 할아버니가 운영하는 서당에 다니며 추구와 붓글씨를 배웠다. 학교 입학 전에 한자 뜻 풀이를 배워서 인지 초등하교 입학해서 내 공부 진도는 매우 빠른 편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심어 가득한 벗 나무에 새집을 지어주고 관찰도 하며 그야말로 전형적인 친한경적인 삶을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엔 아버님께서 정미소를 그만 두셔서 구기산 초가집으로 이사 간 우리는 제비가 해마다 찾아와 집을 짓고 새끼들을 기르다가 강남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 볼 수가 있었다. 제비가 거미줄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한 상황에서 내가 장대를 집어 제비를 풀어 날려 보내며 다음에 박 씨를 기대하며 자랐다. 비 오는 날 언덕배기 우리 집에 미꾸라지가 떨어져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그 신비함에 놀라기도 했다. 들판에 가득한 메뚜기, 개울 곳곳에 유영하는 물고기 떼, 지금은 나비 축제로 유명한 대경포에서 미역 감고 모래사장에서 씨름하며 자랐던 내 유년의 고향 함평은 그야말로 자연과 함께했던,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면 모든 것을 던저 버리고 그 시절로 돌아가면 좋겠다.
1-2) 글쓰기는 내 운명이지 싶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 학급 담임선생님은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 대 국문과 출신으로 잠시 고향 모교에 국어 선생님으로 근무 하시다 인근 목포대학 국문교수로 부임하셨다. 그분은 해박한 문학 지식을 가지셨고 젊어서 인지 열정 가득한 수업으로 학생들이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게 하였고, 비록 시골고등학교였지만 배우는 학생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분으로 인해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와 수필 등에 쏟은 열정이 훗날 내 글쓰기에 큰 기저가 되었다.
시화전을 개최할 예정이라며 다음날 까지 시 한편씩을 써 제출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으로 인해 시 한편이 만들어 제출했는데, 시화전 작품으로 선정되어 시화작품 전시 기간 이후 교장실 벽으로 옮겨져 내가 졸업한 후 오랜 세월까지도 게시되었다. 그 한편의 시로 고향 후배들에게 나는 문학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어쩌다가 그런 시상이 떠오를 수가 있었을까를 생각해보지만, 그게 순간 내 머리에 떠 오른 영감(inspiration)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그 시를 기록해 놓은 게 없어 기억에 떠 올려 보려하지만 머리에 가물거릴 뿐이다.
너른 평야와 그리고 들판을 빠른 속도로 나르며 잠자리와 각종 벌레를 잡아 시골집 처마 둥지에서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제비, 가을 황금들판에 가득한 메뚜기, 저수지에서 미역 감고 물고기를 잡으며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친환경적인 삶을 살아온 나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야말로 풍족한 삶을 살았던 고향에서의 그때 그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그 행복한 시절 중 한때인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나는 한번 더 문학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은사를 만나게 된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군대에서 막 제대한 후 독일어 선생님으로 부임하신 더벅머리에 우수 가득한 얼굴의 신임 총각 선생님이 계셨다. 서울에서 학원 강사 생활 하시다가 우리학교로 부임하셨다.
선생님은 이루어지지 못한 첫 사랑이야기를 3학년 세 학급을 다니시며 이야기를 해주셨다. 쉬는 시간에 각기 다른 반 아이들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독일어 선생님의 첫 사랑이야기의 결말은 조금씩 다른 것이었다. 내가 속한 반에서의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는 이루어지지 못한 비극적 결말로, 다른 반에서의 두 사람 사이가 지금은 소원하지만 자신이 노력하면 재회 가능성이 약간 보이는 이야기로, 또 다른 반에서는 아직도 그들의 사랑은 계속되는 그야말로 해피엔딩의 결말이었다.
그분이 바로 훗날 <땅콩깝질의 연가>로 유명한 소설가 송영 선생님이시며 고향은 바로 함평군 이웃인 영광군이다.
작품 집필 겸하여 내가 재학하는 시골 고등학교로 부임하신 선생님은 독자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한 일환으로 교실마다 다른 결말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하셨다고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광주에서 나와 만난 어느 자리에서 송영 선생님이 내게 들려준 일화이다. 그분 역시 훗날 내게 작가가 될 소양을 길러주신 참으로 소중한 분이었다.
광주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1학년 재학 중 여름 방학 동안 고향에 내려온 나는 둘째 형이 집 책장에서 한국대표작가 작품전집을 발견하고 빌려 읽기로 작정을 했다. 김동인의 적품을 읽고 작품 평까지 읽은 바가 있었는데 여름 방학이 끝나고 사범대 학생들 외에 약대생들 까지 합하여 14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교양 국어를 수강하게 되었다. 교양국어 중간고사에 시험지 뒷면 한 장에 김 동인의 작품 세계를 논하라 것이었다. 방학 동안에 관심 있게 읽었던 김동인의 작품 세계를 논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시험지 뒷면에 쓰라는데 뒷면 가득 채우고도 부족할 정도였다. 중간고사 며칠 후 많은 수강생을 앞에 내 이름을 불러 손을 들었는데 일어서보라 하신다. 교양국어 중간시험 1등이라며 수강생들에게 내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그 순간 내가 느꼈던 자부심과 뿌듯함은 나이든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970년 2월 대학 졸업 후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영어 선생으로 3월에 부임하여 학생들 입학 지도에 전념하면서도 노밸 문학상 작품전집, 우리 문학 대표문학 전집,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을 읽으며 글쓰기 보다는 글 감상에 열중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훗날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의 문인들이 젊은 나이에 시골 고등학교에 부임해 와서 같은 직원실 바로 내 옆 자리에 앉아 시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내개 글을 쓰는 운명의 사람으로 한 발작씩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 중 몇 분을 소개하자면 <겨울 공화국>이라는 시로 유명한 저항시인 양성우, 『청명』이라는 첫 시집 준비를 하던 허형만, 희곡작가 한옥근 등이다.
회고컨대 나는 위에 언급한 분들 외에도 많은 문인들을 포함해서 여러 장르의 예술인들과 참 많은 교분을 갖게 된 것도 글쓰는 내겐 큰 행운이었던 같다.
*글을 쓰게 된 계기
2-1)나의 문학
1995년 나는 유펜(University of Pennsylvania) 교환교수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필라델피아에 들어오는 교민들의 편의를 위해 셔틀버스를 타고오가는 정류소 5가 몰 한쪽 코너에 한국 서적만을 판매하는 서점이 있다.
교수보다는 시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것은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평소 같은 대학 복도를 오가며 흔히 마주치는 문 병란 교수의 시집들이 머나먼 미국 필라델피아 교민 대형 서점 진열장 중심부에 꽂혀 있음에 나는 크게 놀랐다.
영문학 전공이긴 하지만, 문학 박사 학위 소지자이고 영미 극 연구를 하며 평생을 살아 왔다고 자부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정작 미국에서 느낀 내 존재의 초라함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리스와 로마 극, 셰익스피어 극을 비롯한 영국 중세 극, 유럽과 러시아 근현대 극, 20세기 철학자 니이체, 그리고 프로이드와 융, 불란서의 실존주의 철학 등, 그리고 미국의 현대극의 1세대 선두주자들이라 할 수 있는 유진 오니일, 테네시 윌리엄즈, 아더 밀러, 그들의 다음 세대인 극작가 군들, 그리고 부조리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 등의 극 연구와 논문으로 제법 자부심을 가졌던 나는, 왜 내가 진즉 단 한편을 남기더라도 내 글을 써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하는 큰 자괴감을 느꼈다.
작가 못된 사람들이 남의 글이나 평하는 비평가가 된다는 말이 문득 내 머리를 스쳤다. 문 교수와 같은 시대를 살다 생을 마감한 후 내게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작가가 떠난 다음에도 작품속의 인물들은 먼 훗날까지 존재할 것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내가 영원한 삶을 사는 길 아니겠는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되자는 결심을 한 것이 바로 1995년 미국 필라델피아 5가 교포 서점에서 였다.
내 박사 학위 논문 심사위원장이었던 이 근삼 교수가 작가의 소질이 보인다며 극을 써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 근삼 교수 역시 미국에서 7년여 영미 극 연구를 하시다 귀국하여 서강 대학에서 후진들 교육에 전념하신 분이었다. 그분은 내게 “영미 극작품 연구 논문으로 이름을 남기면서도 늘 뭔가 덜 채워진 것 같은 불만 속에 살았는데 자신이 작품을 쓰면서부터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김 교수 논문을 읽는 과정에서 글쓰기 쪽에 가능성이 보이니 그 쪽으로 한번 관심을 가져보라”고 논문 심사 후 사석에서 내게 귀엣 말씀해주신 적이 있었다. 이 교수는 영문학자이기도 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국문학 전공 석.박사 과정 학생들의 논문에서 그의 극 연구를 더 많이 하는 극작가가 된 것이다.
이 교수가 내게 해준 격려의 말씀이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의 삶을 살게 하는데 일조했다는 생각이다.
2-2) 나의 글쓰기
사진작가가 소재에 따라 여러 기법을 사용하듯 나의 글쓰기도 소재에 따라 시, 수필, 희곡 등의 장르 중에 한 가지 방법을 택한다. 그렇지만 내 글쓰기 주 장르는 희곡이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를 잠시 우쭐대며 걷다가 사라지는 배우에 불과한 존재”라고 셰익스피어가 말했다. 세상은 무대이고 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말에 나는 공감하는 바가 컸다. 사람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하는, 예를 들면 부모에겐 자식으로, 부부간에는 남편이나 아내로, 자식들에겐 부모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동시대인으로의 자신의 역할을 하며 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를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오늘 처한 상황에 맞춰 주연 도는 조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주연이 조연을, 조연이 주연을 하는 경우 극이 망쳐지는 경우도 생각해보며 나는 점차 극에 매료되어 갔고, 극작가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극 연구와 창작, 번역에 평생을 바쳐왔다. 나는 글 소재에 따라 극작법 표현방식을 달리한다. 소매치기, 도박꾼, 꽃뱀 등의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그릴 땐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때론 한걸음 더 나아가 자연주의적 기법을 동원한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세계를 그리고자할 때는 표현주의 극 기법을 사용한다. 단조로운 삶, 그렇지만 그 단조로운 삶속에서 의미 찾기 구현을 위한 극을 쓰고자 할 때는 부조리 극 기법을 사용한다. 어떤 때는 한편의 극 속에 1막엔 사실주의 기법, 2막엔 표현주의 기법 등을 복합 사용해보기도 한다.
나는 극 속에 가끔씩 상징들을 몇 가지 사용하여 마치 학창 시절 소풍가서 보물찾기 놀이에서 학생들이 보물찾기를 하듯이 관객들이 내가 장치한 상징들의 의미 찾기를해주기 바란다. 내가 의도한 내 작품의 상징 의미를 독자나 관객이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느 좌석에서도 상징에 대한 의도나 의미를 말해본 적이 없다. 가령 <그들만의 방>에서 지금까지 여러 평론가들이 내가 사용한 상징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정작 내가 암시한 “창문”에 관해 내가 의도한 바의 의미 해석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누군가가 그 의미를 찾아주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다.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찾아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 죽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 의해 의미 발굴이 돨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급할 게 무엇인가?
작가는 작품쓰기 못지않게 많은 독서가 필요하다. 후대에 오래 남을 감명 깊은 글, 큰 글을 남기려면 글 담는 그릇이 커야한다. 큰 그릇이어야 많은 물을 담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100편의 작품을 읽으면 100명의 다른 사람의 삶을 간접 경험할 수가 있다. 작품을 읽고 그 작품에 대한 비평서도 읽고 여러 문학 이론도 시간 나면 섭렵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T.S. Eliot와 같은 고전주의자의 입장을 취한다.
극을 쓸 때 나는 플레이타크의 5단계설을 따르고자 내심 노력한다. 소설과 극엔 플롯이 생명이다. 시작 부분에 평범한 듯하지만 어느 순간 관객의 관심을 끌만한 흥미유발점을 장치해둔다. 극 진행은 점차 고조되어가다가 클라이맥스에 도달케하고 그후 극은 급강하한다. 절정점에서 반전을 주어 극을 마무리시키는 현대극 기법을 나는 선호한다. 고대중세극도 좋지만 입센의 사실주의 극이나 스트린드베리의 표현주의 극에도 관심이 크다.
극과 소설의 플롯에 매료되어 나는 틈나면 소설 읽기에도 열심이다. 2015년 한해동안 도서관에서 랜덤 형식으로 빌려 읽은 소설이 200여권이다. 안타까운 일은 글 쓰는 이들이 남의 글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만 너무 도취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읽기를 소홀히 하는 문인의 생명은 결코 길지 못하다는 게 내 주장이다. 생명력이 긴 작가가 되려면 많은 독서를 해야 한다는 점을 나는 늘 가슴에 깊게 새기며 살고 있다.
나의 이력
등단연보
1997. 《문학21》 희곡
1999. 《문학춘추》 수필
2000. 《문예사조》 시
논문
「오니일과 니이체」(박사학위 논문) 외 다수
번역희곡
1994,6 『정숙한 아내』 (유진 오니일 초기 단막극 집) 유진 오니일 작/김영관 번역(도서출판 금문)
수록 단막극
<정숙한 아내>, <거미줄>, <갈증>, <부주의>, <경고>, <안개>, <빵의 삶>
1997.8 『작별의 한잔』 해롤드 핀터 작/ 김영관 번역(조대 출판부)
수록 극
<수평선 너머>/ 유진 오니일, 유진 오니일/ 작 김영관 번역
<강자> 오거스트 스트린드베리 작/ 김영관 번역
<낙태> 유진 오니일 작/ 김영관 번역
<어느 프로렌스인의 비극> 오스카 와일드 작/ 김영관 번역
1998.8 『이상한 막간극』 유진 오니일 작/김영관 번역(조대 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