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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飛上을 꿈꾸는 한 마리 새가 되어

김영관 2017. 11. 2. 23:27

비상飛上을 꿈꾸는 한 마리 새가 되어

김 영 관

두 다르답니다.도 똑 같아 보이는 우리네 삶이 하나같이 낯설고 생경하다는 말의 또 다른 비유가 아닐는지요?

정년을 앞두고 다가올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공허감을 최소화 한답시고 내 나름대로 그 대비를 잘 해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중 하나가 현역 교수도 포함되긴 했지만 이미 정년을 하여 은퇴중인 선배님들 상당수가 회원인 운동모임에 참여를 한 것이다. 한 달에 한두 번씩을 회동하는 자리이긴 하지만 그분들의 은퇴 후의 삶에 관해 들으면 그게 내 삶에 더 많은 참고가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같은 말의 반복 같지만 나는 나름대로 노년의 삶에 대해 제법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준비를 잘해온 사람으로 생각했고 정년퇴임 날엔 홀가분하게 직장 문을 나서며 모든 것으로부터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는 사람, 그 누군가의 말처럼 그야말로“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퇴직금을 일시불로 수령해서 자식들 사업 뒷바라지로 다 내어준 다음 자식들의 무거운 짐이 되어 결국 초라한 말년을 보내는 선배 퇴직자들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서 안, 나는 80년 대 해직되어 정년까지는 33년의 퇴직기간이 되지 못하여 자비로 5년을 보태어 퇴직연한을 채워 넣은 것은 그야말로 정년 후 단비같을 연금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정년을 몇 년 앞두고 그야말로 나름대로 말년대비를 잘 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년 1,2년 전부터 나를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놀라울 정도로 내 표정이 밝고 맑아 보인다고 말한다.년 대비를 잘 한 덕분이라는 생각에 이런 내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뉴질랜드 웰링턴에 교환교수로 1년 체류 시절, 시내에서 불과 10여분 거리인데도 원시림 속에서 태고의 바람소리와 새소리, 물소리, 아름다운 꽃 등 자연의 신비에 매료된 바 있어 무등산 계곡 너머 담양 남면 소재 누옥을 한 채 구입하여 작은 텃밭이긴 하지만 온갖 종류의 채소를 심고 거두며 주말이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던 것이 어느덧 7년 여 세월이 흘렀다. 큰 재산 모아 놓은 바 없지만 연금으로 욕심 없이 건강하게 말년을 살 수 있는 준비를 해놓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제 2월 말까지 연구실만 치우고 열쇠를 인문대 행정실장에 건네주면 나는 그야말로 새장 안에 갇혀 지낸 새 한 마리가 미련 없이 새장 밖으로 나와 평소 그리도 소망하던 푸른 하늘로 훨훨 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멀리 외국에 살며 10여 년에 고작 세 번 밖에 볼 수 없었던 딸아이가 ‘은퇴자들이 삶의 패턴이 완전히 바뀐 2,3년의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더라며 내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주고 싶어 1월 중순에 귀국을 했다. 앞으로 3년간 매년 한 달 기간 동안 아빠 곁에 머물다 가겠노라고 하는 말에 위안은 되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은퇴 이후의 삶을 잘 설계해둔 내게 딸아이의 그 말은 고맙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오래 전 정년하며 연구실 문을 나서는 선배 문인께서 이제 비로소 글다운 글 좀 써 볼 수 있지 않겠느냐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여 나 역시 열쇠 건네주며 그런 여유로움 보이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년대비를 잘 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나였지만 정작 정년을 맞이하는 순간, 그리고 그 후 짧게는 1,2개월, 길게는 1년 이상은 정말 견디기 힘들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파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공립학교 은퇴자들은 몇 년 간격으로 순환 근무를 하면서 직장 환경이 바뀐 경험을 많이 했을 것이기에 사립학교 은퇴자인 나에 비해서 느끼는 공허감이 덜하리라 믿는다. 수 십 년을 한 곳의 연구실에서만 지내다 보니, 그리고 집과 직장이 가깝다 보니, 연구실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시간 여유가 조금만 나도 연구실로 달려가 책을 읽거나, 교재 준비를 하고, 심지어 애경사에 참석지 못할 경우 폰뱅킹까지를 연구실에서 끝내고 집은 그야말로 TV를 시청한다거나 하는 내 쉼의 장소였던 것이다. 연구열이 치열했던 당시 나는 매년 1권정도의 저서를 발간했는데 그 모든 것이 내 연구실에서의 작업 결과였고 아무리 바쁘다 해도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와 본 적이 없었던 나였다. 이런 습관의 내가 미련 없이 연구실 열쇠를 반납하고 나니 오후에 집에 앉은 나는 그야말로 멍한 공황상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1월 내내 정년대비 서류 제출하느라 정신 없었지만 17일이면 나오던 월급도, 연금일 수령일은 25일이라는 것도 얼마나 생소하던지. 이런 저런 것들이 서서히 충격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방금 들고 간 은행 통장을 어디다 두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방 저 방으로 통장을 찾아 헤매다가 혹시 해서 자동차로 내려가 조수석 서랍을 열었더니 그곳에 통장이 있지 않은가! 문제는 방금 집안에 들어선 내가 그곳에 통장을 넣어둔 기억이 도대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득 겁이 난다. 정년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내 뇌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다.

3월을 조심스럽게 보내면서, 집에서 시간 보내기에 조금은 익숙해지면서 한 평생을 새장 안에만 갇혀 살던 새가 정작 새장 문이 열리자 어디로 날아야 할지를 모르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비록 그곳이 아무리 정들었다 하더라도 이제 서서히 내가 그곳으로부터 멀리 날아야 할 텐데. 정말 그곳을 사랑한다면, 정 또한 매정스럽게 떼어 내야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