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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단상

김영관 2020. 6. 11. 13:36

글쓰기 단상

 

 

김 영 관

123ykkim@hanmail.net

요즈음 대학들은 서로 시샘하듯 사회교육원에 문예 창작반 과정을 개설하여 사회인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지도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젊은 시절 바쁘고 빠듯한 삶을 살아오면서 자기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던 중년, 특히 중년 주부들이다. 이제 어느 정도 정신적 물질적 여유와 더불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자성이 한 몫 되어 이곳을 찾는다.

어느 날 문창반 지도 교수의 초빙을 받아 희곡 창작에 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강의 이후 지도 교수를 포함에서 수강생들과 식사를 같이 하며 나눈 담소 속에 문학 이론이 먼저라는 의견과 글쓰기가 먼저라는 두 의견이 팽팽히 대립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는 닭과 계란논쟁만큼 소란스러움에 비해 그 해답은 신통치 않다는 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필자의 소견이다.

엘리엇을 포함한 고전주의자들은 훌륭한 시인이 되려면 글쓰기 전에 이미 동서고금의 문학 작품을 다 섭렵해야 하고 탄탄한 문학 이론적 바탕을 지녀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훌륭한 시인이 되려면 고전 작품을 모델로 해서 그 작품에 내재된 정신, 가치관, 심지어 기법까지도 모방할 것을 주장하고, 시에만 쓰는 언어가 따로 존재하니 그것을 끊임없이 갈고 닦도록 가르치고 있다.

고전주의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워즈워드를 필두로 한 낭만주의자들은 고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면 거의 모든 것에 반대를 했다. 글 창작이란 모방이 아니라 시인만이 갖는 상상력과 독창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과, 시어란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들에서 일하는 농부의 언어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글 쓰는 것이 우선 이지 이론이 우선이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양편의 주장에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우리는 문창반에서 글쓰기부터 우선이기를 원하는 수강생들에게 이론을 먼저 공부케 하는 것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문학을 하려면 이론적 바탕이 탄탄해야 한다는 것은 백 번 옳은 주장이지만, 이들이 글을 쓰고 싶어 한다면 먼저 그렇게 하도록 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써 온 글을 읽어보고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를 짚어가면서 지도하고 선배 문인들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비교해 보도록 하고, 다음엔 문학 이론서를 읽어보게 하는 것도 글 지도의 한 방법 아니겠는가? 딱딱한 문학 이론 공부에만 매달리게 해서 글 지망생이 자신의 한계에 스스로 풀죽어 좌절감이나 주는 것보다는 그 방법이 더 나을 것 같다.

훌륭한 문인이 되려면 자기 이야기나 쓰는 신변잡기 류의 글만으로는 한계가 있음까지를 병행해서 지도하는 것도 좋은 문예 창작지도 방법이 아닐까 한다. 대학 입학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작문 대비시키듯 문창반 수강생 지도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해 본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