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방/단막극
등장 인물
상준
정순
영기
김 교수
소라
장 소
제 1 장- 정순의 자취방과 마당
제 2 장- 까페
제 3 장- 커피 숖
제 4 장-제 3장과 같은 장소
제 1 장
정순: (영기를 향해) 취업이 잘 되는 학과여서 경쟁률이 세다던데. 네 실력 좋은 줄은 알지만....
상준: 시골 고등학교이긴 하지만 제네 학교에서 영기 성적은 출중하거든. 난 동생이 합격할 거라고 확신한다구.
정순: 오빤 자기 동생만 최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비슷한 점수의 아이들이 시험 보는데 시험 잘 치러야지. 오빠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영기를 너무 아껴서 탈이야. 시기심이 날 정도라니깐. 이제 나는 친구 방으로 가서 잘 테니 잘 주무세요. (영기를 향해) 좋은 꿈 꿔라. 꼭 합격해서 우리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 (상준을 향해) 오빠도 잘 자. 하루 종일 시험장 앞에서 떨 건데. 나도 친구들과 모임 끝난 다음에 시험장으로 곧장 가 볼게. 네가 우리 학교에 입학하면 내가 잘 돌봐 주겠다.
영기: 누나,너무 걱정하지 마.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시험 치를테니...
상준: (동생 영기를 자랑스럽게 쳐다보며 그러나 혼잣말처럼) 젖먹던 기억이 날까? 어머님이 돌아 가시는 순간까지도 영기 걱정 뿐이었는데. 젖 떨어지지도 않은 아이를 남기고 세상 떠나시는 어머님 마음 오죽 하셨겠어. 하지만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지. 벌써 이만큼 자라서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게 됐으니 말이야.
정순: 오빠. 또 옛날 이야기 하시는구려. 나도 오빠네 옆집 살면서 그 사정 족히 아는데 또 슬픈 이야기 끄집어내는 거요?
상준: 너는 정순이 누나를 친 누나 이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영기: (눈물 글썽이며) 알고 있어. 그만해.
상준: (정순을 향해) 그만 가서 자거라. 하여튼 미안하다. 이곳에까지 와서 네 신세를 지게 됐으니 말이다.
영기: 대학생인 누나한테 형 말투가 그게 뭐야. 말을 올려야지.
상준: (어색해 하며)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 쑥스럽게. 안 그래 정순아!
정순: 지금처럼 편하게 말해. 난 상관없어. 그건 그렇고 총각 선생님이 여학교 발령 받아서 고향 여학생들 가슴 설레게 한다고 난리들이던데. 인기 좋은 건 좋지만. (눈을 흘기며) 오빠 한눈 팔지 마. 오빠 곁에 무서운 내가 있다는 걸 항상 잊으면 안돼.
영기: 누난 형 감시를 잘해야 할 걸. 저녁 늦게 까지 여학생들이 집에 노닥거리다가 가기도 하고, 이유 없이 늦은 밤에 찾아오는 여학생들도 있고, 딸 가진 동네 아줌마들이 형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스럽지 않다니깐.
상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라. 정말인 줄 알겠다.
정순: 영기 너는 내 편이지? 네가 감시 잘해야 한다.
영기: 맨 입으로?
정순: 알았어. 네가 대학에 입학하면 우리과 예쁜 후배 여학생 소개해 줄께.
영기: 정말? 그럼 생각을 달리 해봐야 겠는 걸. 그렇담 지금까지 감춰둔 형 비리를 말해줄까, 누나?
정순: 내가 너한테 거짓말 한 적 한번이라도 있었니? 내일 시험 끝나고 너하고 단둘이 만나서 오빠 비리 좀 들어봐야 겠다. 네가 합격해서 이곳으로 올라와 버리면 오빠를 누가 감시하지? 너라도 있어서 안심했는데... (모두가 웃는다.)
영기: 누나가 약대를 졸업하면 고향에 와서 약국 차리겠네? 선생님과 약사 어울리는 한 쌍이겠는 걸.
정순: (눈을 흘기며 그렇지만 싫지 않는 표정으로)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상준: (정순을 향해) 피곤하겠다. 가서 자거라.
정순: (문을 열고 나가며) 오빠 나와봐. (상준이 일어서서 그녀를 따라 나간다.) 여기 문이 자주 고장 나거든. 닫을 때 조심해야 돼. 잘못하면 안에서 문이 안 열리는 경우가 있다구. 밖에서는 잘 열리는데... 큰 방 아저씨께 문 고쳐 달라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이 모양이라니깐.
상준: 알았어. 걱정 마라. 남자 둘이서 문 하나 못 열겠니?
정순: 그럼 잘 자, 오빠. (상준이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영기: 형은 행복한 사람이야.
상준: 그 무슨 소리니?
영기: 고향에서 제일 가는 미인께서 형을 사랑하고 있으니 말이야.
상준: (행복해 하며) 그렇게 보이니?
영기: 정순 누나가 대학 졸업하자 마자 결혼할 거지?
상준: 정순이 부모님들이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단다. 가난하고 부모 없이 자란 우리들을 그 집 사람들은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단 말이다.
영기: 형은 이제 직장도 생겼고 우리가 꿇릴게 뭐 있어? 결혼할 사람들은 당사자들인데 부모가 반대한다고 될 결혼이 안될 리 없지.
상준: 인생살이가 네 말처럼 그렇게 단순하면 오죽이나 좋겠니. 정순이네 집안은 고향에서 손꼽는 부자가 아니냐?
영기: 하여튼 형은 정순이 누날 사랑하는 거지?
상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영기: 얼마큼?
상준: 아주 많이.
영기: 그럼 됐네. 다른 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구.
상준: 이제 보니 너도 다 컸구나.
영기: 나도 대학 졸업하고 직장 생기면 정순이 누나 같은 사람하고 결혼해야 겠어.
상준: 그만 자자. 늦었다.
영기: 형, 나 오줌 마려운데.
상준: 그런 걸 보면 아직도 넌 어린아이 같단 말이야. 그런 것까지 아직도 내게 보고해야 되겠니? 부엌 문 열고 나가서 오른쪽에 화장실 있는 것 알지?
영기: 알았어. (문 열고 나가더니 한참 후에) 형. 부엌문이 안 열려!
상준: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간다. 소리만 들린다.) 이거 어떻게 된 거지? 안 열리네.
영기: 형이 누나 좀 불러봐.
상준: 밤늦게 소란 떨면 어쩌니? 큰방 아줌마가 우리 보는 눈이 곱지 않던데. 여학생 집에 남자들이 찾아 온 게 못 마땅한 모양이더라.
영기: 그럼 어떻게 해. 나 급한데.
상준: 아까 다녀오지 그랬어? 그땐 아무 말이 없다가 이제 왜 그러니?
영기: 사정이 그때와는 다르니깐 그렇지.
상준: (방 문을 열어보며) 저기 콜라 병에다 쉬하면 안 되겠니?
영기: 그건 안 되겠는데. 내일 아침에 누나가 뭐라고 하겠어?
상준: 일찍 내다 버리면 돼지.
영기: 누나가 들어와야 문이 열릴텐데. 쉬한 줄 알면 우릴 어떻게 보겠어?
상준: 다른 방도가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네가 그러니깐 나까지 쉬 마렵다.
영기: 그럼 더 문제 아냐? 두 사람이 어떻게 콜라 병 하나에다 쉬를 해?
상준: 그럼 어떻게 한다?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너 궁즉통이란 말 들어 본 적
있냐? 급하면 좋은 생각이 다 떠오르는 법이란다.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킨다.) 저것 안 보이냐?
영기: 창문 밖에다 쉬 하잔 말이지?
상준: 의자 이쪽으로 가져와 봐라. (영기가 창 밑에다 의자를 옮긴다.) 그 위로 올라가 봐라. 됐지? 창문을 열고... .
영기: 형, 머리가 천장에 닿는 걸. 고개를 숙이면 허리가 뒤로 가잖아? 이렇게 해서는 난 쉬 못 해. 방으로 쉬가 쏟아 지겠어.
상준: (한참 생각에 잠기다가) 그럼 이러면 어쩌겠니? 고개를 뒤로 재쳐 봐. 내가 뒤에서 허리를 밀어 줄 테니깐. 다시 해봐. (뒤에서 허리를 밀어주며) 되겠니? 한번 시작해 봐라.
영기: 힘들지만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런데 골목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면 어떻게 해?
상준: 이 시간에 골목 지나갈 사람이 어디 있겠니? 쉬해 봐. 이러고 있으니까 네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쉬할 때마다 내가 너 데리고 다니던 일 말이야. 싸고 있는 거니?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나면 금방 쉬하는 것 중지해야 한다. 남의 머리에다 오줌 싸면 안된다.
영기: 알았어. (한참 후 의자에서 내려 오면서) 됐어. 겨우 해결했어. 형 차례야. 형도 쉬 마렵다면서?
상준: (의자 위로 올라간다.) 뒤에서 더 세게 밀어라.
영기: (땀을 뻘뻘 흘리며 형의 허리를 뒤에서 민다.) 형은 고개를 더 뒤로 재쳐야 겠어. 형 시작했어?
상준: (힘을 쓰는 소리로) 이제 겨우 나온다.
영기: 형,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데?
상준: 이제 막 시원하게 싸고 있잖니?
영기: 그래도 소리가 들리는데 어째?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남자 목소리: 아이쿠! 왠 날벼락이야? 어떤 놈이 밖에다 물을 버려?
여자 목소리: 여보 어쩐다요? 기차 타고 갈 사람 옷에 왠 물벼락이라요?
남자 목소리: 어? 이게 물이 아닌데?
여자 목소리: 예? 물이 아니면? 이거 오줌 아니요? 어떤 놈이 창 밖에다 오줌을 싸? *을 짤라 개한테나 줄 놈.
(밖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집주인 부부와 세 들어 사는 학생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온다. 정순도 보인다. 집주인 남자가 대문을 열어 주자 50대 나이의 부부가 들어선다.)
50대 남자: 어떤 썩을 놈이?
주인 집 남자: 무슨 일이요? 이 밤중에 왠 소란이요?
50대 여자: (문간방을 가리키며) 저 방에 있는 놈 나오라고 하시오. (안에서 부엌문을 열고 나오려 하지만 문이 안 열린다. 정순이 재빨리 뛰어 가서 부엌문을 열어 주자 상준과 영기 힘 없이 걸어 나온다.) 여보 주인 양반, 가위 좀 가져오쇼. 둘 중에 어떤 놈이야? 어린 놈이 쌌겠군. 저 놈 * 잘라 버리게 빨리 가위 가져 와요! (여인이 영기의 바지 벗기는 시늉을 한다. 영기는 겁 먹고 울음 섞인 표정을 짓고 있다.)
주인 집 여자: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알 것 아니요? 도대체 왜들 이러시오?
50대 남자: 서울 가는 새벽 기차를 타려고 넥타이에 양복 입고 나오는데... (사이) 이 놈들이 골목에다 대고 쉬를 하는 것 아니겠소? 이 옷 좀 보시오. 이 걸 어떻게 입고 서울 가겠소?
상준, 영기: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주인 집 여자: (정순을 흘겨보며) 다 큰 여학생이 남자나 불러들이고.. 동네 부끄러워 살 수가 있어야지.
정순: (상준을 쳐다보며) 어떻게 된 일이에요?
상준: (고개를 숙인 채) 부엌 문이 열리지 않아서 그만.
정순: (주인 집 부부를 쳐다보며) 제가 이 문 좀 고쳐달라고 언제부터 이야기 했나요? 안에서 문을 열 수가 없으니 어떻게 밖으로 나오죠?
주인 집 여자: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더니. 어디다 대고 큰 소리야. 외간 남자들 데려다가 방에 재운 주제에!
정순: 말씀 다 하셨나요? 제 고향 오빠 형제가 와서 하룻밤 재워 준 게 무슨 동네 난리고 창피한 일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내가 방에서 저 사람들하고 잠을 자기라도 했나요? 친구 방에서 잔 내가 품행이 단정치 못 하다니요? (50대 부부를 향하여) 미안해요. 세탁비 드리겠으니 진정하세요.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가세요. (주인 집 부부를 향하여) 방 빼주세요. 이런 집에 거져 살라고 해도 못살겠어요. (상준과 영기를 데리고 그녀가 부엌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다. 사람들이 넋이 나간 듯 서 있는 가운데 조명이 어두워진다.)
제 2 장
(카페 안. 탁자 위에 맥주와 안주 등이 보인다. 세월이 흐른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분장한 정순과 영기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이제 정순과 영기는 40대 중반 남녀로 변해 있다. 그들의 얼굴엔 취기가 감돌고 있다. 영기가 정순의 잔에 맥주를 채운다.)
영기: (회상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고) 형수씬 대단하신 분이에요. 형이 세상을 떠날 때 미연 이는 5살, 수연 이는 2살이었죠? 아빠 장례식에 웃고 따라 다니던 수연이 얼굴이 지금도 선한데 벌써 대학생이 되었군요. 혼자서 약국하면서 이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웠으니 참으로 장하신 거죠.
정순: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영기 도련님, 나는 당신 형이 원망스럽기만 하답니다. 부부는 전생에 서로 원수였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봐요. 그 사람 생각만 하면 증오가 앞선다구요. 그 사람에 대한 내 기억은 전부 나쁜 것들 뿐이랍니다.
영기: 형을 미워 하지 마세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본인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형수님과 두 조카들의 행복을 하늘에서도 빌고 있을 겁니다, 형은. 하여튼, 수연이가 우리 대학에 입학해서 제 연구실을 들어서는 순간. 대학생 시절의 형수님 모습 그대로 였어요.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저는 한 순간 넋이 나가 멍하니 서 있었다구요.
정순: 두 아이들이 곱게 커 줘서 고마울 뿐이에요. 이제 도련님이 수연이를 잘 돌봐줘요. 그 아이 핏줄이라고는 도련님 밖에 또 누가 있나요? 그건 그렇고 도련님도 이제 장가를 드셔야죠?
영기: 이 나이에 무슨 장가입니까? 주책 없다고들 할거요. 그리고 장가 따윈 제게 관심 밖의 일이기도 하구요.
정순: (맥주를 마신 후 그 잔을 영기에게 건네주고 술을 따른다.) 무슨 소리예요. 제 주변에 좋은 여자들 많아요. 제가 그 중에 도련님 취향에 맞을만한 여자를 만나게 해드릴게요.
영기: (무관심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저는 학문하고 결혼했어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씽긋 웃으며) 학문과 항문의 공통점 세 가지가 무언지 아세요? 한번 맞춰 보실래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학문과 항문의 공통점 세 가지...
정순: 또 무슨 실 없는 이야기하려고 그러세요. 난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데 화제를 바꾸면 어떻게 해요?
영기: 학문을 넓힌다. 학문에 힘쓴다. 학문을 닦는다. 항문도 마찬가지죠. 일을 제대로 보려면 항문을 넓힌다. 항문에 힘을 쓴다. 항문을 닦는다.
정순: (모처럼 밝은 웃음을 웃는다.) 그럼 도련님은 학문하기를 항문 하듯 하는군요? 그럴 땐 당신 형님을 꼭 빼 닮았다구요. 내가 머리 아픈 이야기를 하면 다른 우스개스런 이야기로 말을 둘러대기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영기: 조건을 하나 제시 해볼까요? 형수 씨가 먼저 선을 보면 저도 선을 볼께요.
정순: 저하고 도련님 입장은 달라요. 도련님은 혼자니깐 언제든지 결혼이 가능하지만, 전 두 아이들을 결혼 시켜야할 큰 일이 남아 있다구요.
영기: 그런 논리라면 두 조카들 결혼시키고 나서는 외손자들 돌봐야 하니까 선 볼 수 없겠군요. 지금은 옛날하고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 모르시겠어요? 그리고 조카들 결혼시키고 나서도 혼자 살게 되면 그 아이들 마음이 편하겠어요? 그 아이들에게 형수는 귀찮은 존재가 될 뿐이라구요. 게다가 형수님 나이도 생각해봐야지요. 몇 년 후면 형수님이 재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된다구요.
정순: 하여튼 전 안돼요. 도련님, 시간 한번 내주세요. 도련님 성격, 취향, 모든 것을 고려해서 좋은 여자 한 사람 선뵐 테니깐. 우리 약국에 찾아 오는 단골 손님 중에서 한 사람 골라 보겠어요.
영기: 약국의 단골 손님이라면 모두가 병들거나 아픈 사람들 뿐일텐데요.
정순: 실없는 소리 그만 하세요. 약국을 찾는 사람들 모두가 아픈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도련님도 잘 알잖아요?.
영기:형수씨도 제가 소개하는 사람을 한번 만나 보겠다면 그 제안을 고려해보죠.
정순: 못 말려. 당신네 형제들은. 형님 고집이 얼마나 셌는지. 그 당시 내가 형님하고 결혼한다니깐 우리 친정집이 발칵 뒤집혔어요. 저도 막무가내로 부모님께 그 사람하고 결혼하겠다고 밀어 붙혔지만 형님은 나를 데리고 무조건 제주도로 도망쳐 버렸어요. 우리 부모님들께서 그 만용에 기가 꺾여 할 수 없이 우리 결혼을 승낙하셨구요. 그러니깐 우린 신혼 여행 다녀와서 결혼한 셈이죠. 평소에 순하디 순한 사람이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남자의 그런 용기라면 우리 정순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어머님이 먼저 두 손을 드셨지요.
영기: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저였다구요. 제가 형수님 모시고 도망가도록 부추켰다구요. 형은 몹시 망설였죠. (과거를 회상하듯) 그때 고향은 온통 입방아로 난리였어요. "정순이와 상준이 눈맞아 도망 갔다"며 " 두 사람이 그토록 사랑한다면 결혼시켜야 한다"는 쪽 여론이 우세했어요. 백혈병이 뭔지. 이제 그 치료 약이 많이 개발 됐다고 하더군요. 내 하숙방에 와서 눈이 안 보인다고 어쩔 줄 몰라 하던 형.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렇지만 형수씬 이제 그 과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직도 형수님의 모든 것을 형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군요. 동생인 제가 드리는 부탁입니다. 아니 차라리 형이 내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 동안 고생 많았으니 재혼하세요. 내 말 듣고 계세요?
정순: 내 머리를 아직도 그 사람이 지배하고 있다구요? 천만에! 난 그 사람을 증오하고 있어요. 모든 짐을 내 양 어깨에 짊어지게 하고 자기만 나 몰라라하고 훨훨 날아간 사람, 뭐가 좋아 미련 따위를 갖고 있겠어요? 그 사람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아요. 그 사람이 미우니깐 더 혼자 사는 거예요. "너 없이도 잘 살고 있는 나를 봐라. 네 아이들 내가 이렇게 잘 키우고 있다. 약 오르지?" 뭐 그런 심보인거죠.
영기: 말씀은 그렇게 하지만, 형수씨 머리엔 아직도 형님뿐이란 걸 나는 알아요. 이제 형에게서 벗어 나세요. 제발. 몇 번 이야기이지만 이제 벗어나는 겁니다. (한참 말이 없다가 무슨 중대 결심이라도 한듯) 형수씨가 선을 먼저 보면 저도 선을 보겠어요.
정순: 정말이세요? 도련님이 선을 보겠다는 것 그럼 약속한 겁니다. (혼잣 말처럼) 저야 뭐 둘러리 서는 셈치고 도련님이 말하는 사람 못 만날 이유는 없지요. 마음에 안 드는 남자를 억지로 도련님이 성사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약속만 하면 한번 만나 볼 수는 있지요.
영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여자를 만난다고 해서 꼭 결혼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순: 알았어요. 제가 곧 연락 드리겠어요. 이제 그만 일어서 갈까요?
영기: 한잔 더 하고 가요. 모처럼 만났는데...
정순: 도련님을 만나고 있으면 마음이 가벼워야 할텐데, 그렇지가 않아요. 그 사람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구요. 잊혔던 일들이 다시 떠올라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니깐요. 도련님을 만나고 가는 날에는 하루 종일 일손이 안 잡히고 서성대기만 하니 어쩌면 좋아요?
영기: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형수씨 연 날리기 중계를 들어 볼래요? 민속 보존 차원에서 연날리기 대회가 있었답니다. 아나운서가 한 줄에 매달린 두 연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중계하는데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아 멋지군요. 쌍년이 하늘 높게 날고 있습니다." 그랬대요.
정순:(씽긋 웃으며) 교수가 그런 표현을 써도 돼나요?
영기: (그 말을 못들은 척하며) 꼬리 달린 연을 보고는 "꼬리 년이 꼬리를 치며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하더래요.
정순: (깔깔대며 웃으며) 그만 하세요. 배꼽 빠지겠어요. (혼잣 말처럼) 어쩌면 저 목소리, 손짓 하나까지도 자기 형을 꼭 빼닮았을까. 내가 우울해 하면 웃기려고 별의 별 우스개 소리를 다하던 그 사람...
영기: (계속해서 농담을 한다.) "끈 떨어진 년이 훨훨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하더래요. 줄 떨어진 연을 보면서 말에요. 어때요, 그럴 듯 했나요?
정순: 그만 하세요. 이젠 우울한 이야기따윈 하지 않을게요.
영기: (이제 그가 갑자기 심각해지며) 연 이야기를 하다보니 형 생각이 나는군요. 형과 나는 고향 뒷산 언덕으로 연 날리러 자주 올라 갔어요. 형수님도 알다시피.
정순: 아무렴요. 당신 형제의 지난 일들에 대해선 내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자부 할 수 있어요.
영기: 형과 나는 자신의 연이 더 높게 날도록 경쟁 했어요. 그러던 중 나는 높게 비상하는 연이 연실에는 꿈쩍을 못하는 것에 갑자기 신기하더라구요.. 아무리 멀리 날더라도 연실에 감겨 다시 내게 돌아 오는 연을 보면서 가느다란 연실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형의 연이 실에서 떨어져 나가 멀리 멀리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안타까워 하는 형의 모습이 눈에 선해요. 그게 이제 꿈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형수님이 연을 날리는 거에요. 우리 형제는 하나의 연실에 매달린 두 개의 연이 되어 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던 중 내 위에 떠있던 형이 실에서 떨어져 나가는 거에요. 나만이 외로운 연이 되어 실에 매달려 있는 거지요. (울듯한 표정으로) 두려워 하면서, 떠나는 형을 안타깝게 쳐다만 본다구요. 저 밑 땅에 서 있는 형수님 역시 발을 동동 거리며 애태우고 있는 것아니겠어요? 형과 나는 형수님이 날리고 있는 연이 된 거에요. 하나를 날려 보내고 남은 하나의 연을 연실로 애처롭게 쥐고 있는 형수님이 꿈에 자주 나타난다구요. 그런데 제겐 그 연실이 형과 나, 형수님을 연결 해주는 탯줄처럼 느껴진답니다. 형은 탯줄을 끊고 멀리 떠나 가 버리고 나만 그것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라구요..
정순: 제가 당신 형제를 연으로 만들어 하늘에 날린다고 했나요? 그리고 그 연실을 내가 쥐고 있다고 하셨나요? 당신 형제를 밀폐된 방에 가두어 놓고 꿈쩍 못하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단 말입니까? (화를 내며) 그만 하세요! 이제 일어 서야 겠어요. 다시는 도련님을 만나지 않을테니 그리 아세요!
영기: (제 정신으로 돌아 온 듯 정순을 바라보며) 쓸데 없는 소리를 해서 형수님을 화나게 했나요? 용서하세요. 꿈이 그랬다는 뜻이지 실제 상황은 아니잖아요? 형수님, 오해 푸세요.
정순: (약간 화가 풀어지면서) 아무리 꿈이라 하지만... 그리고 설령 그런 꿈을 꾼다하더라도 제게 그런 말을 할 것 까지는 없잖아요? (사실을 인정하듯) 나도 모르게 남편 대신 도련님에게 너무 많은 걸 의존하고 있어서 때문인가봐요. 부담주지 않으려 더욱 노력할께요. 제게도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요. 도련님을 안보면 보고 싶고, 그래서 만나면 머리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이제 다른 이야기 해요. 이런 분위기가 싫어요. 유학 시절의 로맨스 따위라도 하나 들려주세요.
영기: 외국에서 어렵게 공부하느라 여자를 쳐다볼 여유가 없었어요.
정순: (믿기지 않은 듯) 정말이세요?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예요? ( 그러지만 내심으로는 안도하는 듯) 그렇게 재미없는 삶을 살면 되나요?
영기: 제 성격에 문제가 있나봐요.
정순: 도련님 성격에 문제가 있다구요?
영기: 글쎄, 제 주변에 전혀 여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정순: 아니었지만?
영기: 문제는 제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이거예요. 가슴 두근거리는 것 있잖아요? 그게 없다구요, 제 가슴엔...
정순: 아직 도련님 마음을 확 끌만한 인연을 못 만나서 그런 거라구요. 지금 근무하는 대학에 동료 교수나, 대학원생, 아니면 대학생들 중에 총각 교수를 좋아할 만한 여인이 있을 법도 한데요?
영기: 내 눈엔 모두가 둉료나 제자일 뿐 특별한 감정은 없어요.
정순: 그럴 리가 있나요?
영기: 그러니깐 내게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정순: 도련님의 이상형 여성이란 어떤 건지 생각해 보셨어요?
영기: (얼굴을 붉히며 말을 못한다. 한참 후) 형수님 같은 여인이라면...
정순: (정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게 보이는데요?
영기: 내 어릴 적 형수님에 대한 기억 때문일 거예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회상에 빠진 듯)형수는 제 우상이었어요. 평생을 살면서 나를 그토록 사로잡은 여인은 없었어요.
정순: (싫지는 않는 듯) 그렇지만 나라고 다른 여성과 특별히 다른 건 아네요. 그리고 도련님은 공부만 하느라고 좋은 여성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만 것 뿐이라구요.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시야를 좀더 넓게 가져 봐요. 틀림없이 좋은 반려자가 나타날 거예요.
영기: (씩 웃으며) 공부를 한 게 아니라 항문을 한 거라니까요. 나는 항문을 넓히고 힘쓰고 닦고 돌아 온 사람입니다.
정순: 또 실 없는 농담으로 흘려 버리는군요. (술을 권한다.) 이제 일어서요.
영기: 그럽시다. (그들이 탁자에서 일어선다.)
(조명이 어두워진다.)
제 3 장
(커피 숍. 영기와 어떤 남자가 앉아있다. 밝은 옷차림의 정순이 들어선다. 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들이 서로 인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영기: 형수님 차 한잔하세요. 오늘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정순: (부끄러워하면서도 결코 싫지 않은 표정으로) 쑥스럽게 왜 그러세요? 도련님 눈에나 제가 미인으로 보이는 모양이에요.
남자 (김 교수): 제 눈에도 아름답게 보이는 걸요.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영기: 김 교수님, 제 말이 맞죠? 우리 형수 미인이죠?
김 교수: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정말 미인이시군요. 저를 소개 하겠어요. 이 친구와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김 **입니다. 잘 부탁해요. 자기 형수가 대단한 미인이라며 한번 만나 보라고 얼마나 졸라 대던지, 주책 없이 이렇게 따라 나섰습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나오길 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영기: (자신감이 생긴 듯) 제가 언제 실 없는 소리하는 걸 보신 적 있나요?
정순: (어색해 하며) 도련님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긴 했지만...
김 교수: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삶이란 게 원래 만남의 연속 아니던가요? (영기에게 동의를 구하듯), 안 그런가, 친구?
영기: 그럼요. 형수님, 김 교수님께서는 사모님과 사별했어요. 아들 하나 있는데 결혼 시켜 놓고 넓디 넓은 아파트에서 혼자서 외롭게 살고 계신답니다. 마음이 따뜻한 분이시기도 하고, 우리 과에서 저를 제일 아껴 주시는 분이기도 하구요.
정순: 도련님을 아껴 주신다니 참으로 고맙군요. 저 나이가 되도록 장가도 들지 못하는 도련님이 안타까워 죽겠어요.
영기: 지금 내 걱정하자고 만나는 자리가 아닙니다. 제 관심은 제발 좀 꺼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아시겠죠, 두 분?
김 교수: 알았네, 아무튼 이 자리를 만들어 준 자네에게 감사 드리네. 그건 그렇고 자네,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셈인가? 눈치도 없이?
영기: (그 말뜻을 이해하고) 알았습니다. 이 몸은 이쯤해서 일어나 보겠습니다. 두 분 즐거운 시간 나누세요. (그가 일어 서 나간다. 그러자 정순도 따라 일어선다. 김 교수가 당황하여 엉거주춤한 채 서 있다.)
영기: (정순이 따라 나오는 것을 보며) 형수님, 왜 그러세요? 내 체면은 뭐가 됩니까?
정순: 제가 말하지 않던가요?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고. (정순이 총총히 사라져 버린다. 멍하니 서 있는 영기 곁으로 김 교수가 다가와 한마디 한다.) 이게 뭔가? 사람을 이렇게 난감하게 하다니. 나도 처량한 사람이긴 하지만 자넨 더 한심하군! 그러니깐 지금까지 장가도 못 갔지! 내가 저런 사람 말을 믿고 이런 델 나오다니. 나 먼저 가네! (김 교수는 발걸음을 갑자기 멈춰 서더니 영기를 돌아 보며) 자네 형수, 혹시 자넬 사랑하고 있는 거 아냐?
(그가 퇴장한다.)
영기: 뭐라구요? (영기 혼자서만 당황해 하는 가운데 조명이 어두워진다.)
:
제 4 장
(같은 장소 커피 숍. 정순과 영기가 앉아 있다.)
영기: 이런 자리 나오기 싫다고 했잖아요.
정순: 지난 번 일 때문에 화가 나셨나요, 도련님?
영기: 어디 그럴 수가 있어요? 내 체면이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정순: 그 일은 이제 잊어 버려요. 내가 몇 번이나 사과 드렸잖아요? 용서 하는 거죠, 도련님?
영기: (화가 좀 풀린 듯) 알았어요. 다음부턴 형수씨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정순: 생각 잘 하셨어요. (시계를 보며 혼잣말처럼) 올 시간이 됐는데. (그 순간 30대 초반의 아가씨가 들어선다.) 여기야, 소라씨 (그녀가 그들 자리로 걸어온다. 앞 장에서 처럼 서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소라씨, 우리 도련님이에요. 외국에서 박사 학위 받아 오고 지금 자기 모교인 ** 대학에 근무하거든요.
소라: 안녕하세요? 언니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언니께서 교수님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몰라요.
영기: (무관심한 표정으로) 정 영기라고 합니다.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정순: 도련님, 소라씨는 우리 나라의 일류 대학에다, 대학원까지 나오고 여성 문제 상담 전문가예요. 다시 말해 대단한 사회 운동가라구요. 이 지방에서는 소라씨 모르면 간첩이랍니다.
소라: (싫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칭찬이 너무 과분한데요.
영기: 여성 문제 전문가라고 하셨나요? 구체적으로 하시는 일이?
소라: (웅변 어투로) 아직도 우리 사회에 대접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아요. 성 차별 문제가 아직도 심각하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 아직도 사회 곳곳에 많답니다. 그런 문제를 주로 상담하는 사람이죠. 저를 무서워 하는 남성들이 많아요. 내면은 그렇지 않는데... 알고 보면 저도 순한 양 같은 여성이랍니다.
영기 (겁먹은 표정으로 혼잣말을 한다.) 선생님이 순한 양 같다구요?
소라: 뭐라구 하셨나요?
영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뇨, 아무 말 안 했는데요. (정순을 바라보며) 나 약속이 있는데... 오늘은 좀 바빠서. 이만 (자리를 일어 서려 한다.)
정순: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영기에게 속삭인다.) 도련님, 가만히 앉아 있어요! 지난 번 일에 대한 복수심 때문인가요? 내가 얼마나 난감해 하는가 보려고 그러는 거죠? 도련님이 얼마나 당황했었나 한번 느껴 보라 이거죠?
영기: (머뭇거린다.) 그게 아니라... 바쁜 일이 좀 있어서..
정순: 혼자 사는 사람이 뭐가 그리 바빠요? 가만 있지 않음 다신 도련님하고 상종하지 않을 거예요.
영기: 알았어요.
소라: 두 분이 사이가 마치 연인처럼 좋게 보이네요. 무슨 말씀인지 저도 듣고 싶은데요.
정순: 아녜요, 아무 것도 아녜요.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두 사람이 딱 어울린다고 제가 말하던 중이었어요. 한 사람은 학자, 또 한 사람은 사회 개혁가. 이 지역 사람들이 모두 주목할만한 한 쌍이 되겠는 걸요.
소라: 그럴 수도 있죠.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난 그 사람을 최고의 인물로 만들어 낼 겁니다. 그 사람을 훌륭한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 할테니깐요.
영기: 최고의 상픔으로 만든다구요? 그럼 내가 물건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소라: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현대 인간은 일종의 세일 품목이라고 할 수 있죠. 짧은 시간에자신을 가장 잘 포장해서 보여야 하니깐 기술이 필요한 거죠. 극대화 시키는 기술 말이에요.
영기: 자신을 짧은 순간에 효과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포장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거군요. 그렇지만 저는 학생들과 최소한 한 학기나 일년을 강의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니 짧은 순간에 나를 포장시켜 그들에게 보여야 할 포장술은 필요가 없겠군요. 결국 저는 선생님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는 사람이란 말씀입니다.
소라: 하여튼 나는 남편을 내조해서 그를 훌륭한 인물로 키워 내고 말 겁니다.
영기: 그런 적극적인 분이 아직도 훌륭한 남편감을 못 만났다니 이상하군요.
소라: 제 눈이 너무 높기 때문이죠. 오늘도 이 자리에 안 나오려고 했지만, 교수님의 타이틀이 좋았고 외국에 오래 계셨다니 진보적인 성격의 남자이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본 거에요. 나는 결혼하면 남편 하는 일과 내가 하는 일을 별개로 존재시킬 생각이에요. 서로가 하는 일이나 수입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는 사람을 원하거든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성장하도록 그냥 놔둘 겁니다. 물론 그가 힘들어 하면 내가 적극 개입해서 일으켜 세울 각오도 되어 있구요.
영기: (비웃는 어투로) 대단하십니다. 아가씨를 만나는 남자는 정말 행복하겠군요.
정순: (영기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말한다.) 그런 말투가 어딨어요? 싫어도 가만 계세요.꾹 참고 앉아 있어요!
영기: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소라: 아까부터 두 분은 귓속말을 자주 하는데 그런 건 대인 관계에서 좋지 못한 태도입니다. 대화는 함께 말하는 거예요. 상대가 없이 하는 말을 우리가 독백이라고 하지요? 독백을 하려면 이 자리에 왜 나오신 거죠? 그런 태도는앞에 앉은 사람을 왕따 시키는 거라구요. 요즈음 교육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왕따 시키는 것쯤은 알고 계시지요? 그런 태도는 옳지 못해요. 여성들 모임에서 제가 가장 힘 있게 주장하는 문제가 바로 상대를 소외시키는 왕따 문제라구요!
영기: 알았습니다. 조심할게요. (다시 정순 에게 속삭인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 벌받고 있는 기분이군요. 제가 왜 계속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가요?
정순: (꾸중하는 어투로) 아이처럼 굴기에요? 가만히 좀 앉아 있으라구요!
소라: 교수님에 대한 제 느낌을 말씀드리자면 매우 실망했다는 겁니다. 외국 유학 물을 먹었으면 상당히 적극적인 성격의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하군요. 그렇지만 상관 없어요. 제가 적극적인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 낼 자신이 있으니깐.
영기: 저를 다른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 이겁니까?
소라: 아무렴요. 제가 상담하는 사람들 거의가 소극적인 삶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용기를 갖고 시회에 참여토록 하는 게 제가 하는 일 아닙니까?
영기: 그러니깐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투사가 된다 이거군요? 인생이 무슨 전투 장이라도 된 기분이 듭니다 그려.
소라: 그렇죠. 수요에 비해 공급 과잉 상태에서는 인생이 전투장 일 수밖에 없는 거죠. 살아 존재하느냐 아니면 쓰러져 패배하느냐 거든요.
영기: 오늘 강의 참 감명 깊었습니다. 형수님 이제 제가 일어서도 되는 거죠? 저는 안된다니깐요. 여자라면 모두가 무사워요. (혼잣말처럼) 형과 함께 형수님 자취방에 갔을 때 기억하세요? 그때 어떤 아줌마가 제 생식기를 가위로 잘라 버린다고 했거든요. 그 이후로 가끔씩 내가 거세 되어 버린 남자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어요. 거세되어 피를 뚝뚝 흘리고 서 있는 악몽을 꾸기도 하구요. 깨어나서 보면 내 몸은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거예요.
소라: 교수님이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까지 올라 갔는지 모르지만 너무 나약한 분이로군요. 피해 망상증 환자같이 보여요. 증상이 꽤 심하군요. 제가 보살펴 드려야 겠어요. 어머니처럼 보살펴 드릴께요. 그리고 인생의 영원한 상담자가 되어 드리겠어요. (정순의 동의를 구하려는 듯) 안 그런가요, 언니?
정순: (갑자기 흥분한 얼굴로) 소라씨가 우리 도련님의 상담자가 되겠다구요? 모성애로 보살펴 준다고 했나요? (현실을 망각한한 사람처럼) 우리 도련님의 내부 깊숙히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관찰하면서 나만큼 도련님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구요. 어머니 역할을 할 사람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됐어요, 소라씨, 우리 도련님은 지금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가 보세요. 제가 실수를 했군요. 우리 도련님을 당신에게 소개한 게 제 실수였다구요. 도련님은 항상 제 품안에 있어야 해요! (갑자기 영기를
자신의 가슴에 끌어 안으며) 도련님 됐어요. 불안해 하지 말아요. 내가 곁에 있으니 염려 말아요. 저 하나면 족해요. 도련님 곁에 다른 여성은 필요가 없다구요. 제가 항상 도련님을 보살필께요! (정순과 영기의 태도에 이해 할 수 없다는 소라의 표정을 강하게 조명 한다.)
(서서히 조명이 어두워진다.)
*필자의 희곡집 <미로>에 수록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