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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김영관 2007. 4. 8. 16:50

   

 

 

   등장인물                    

  

   성기, 40대 후반의 교수
   명희,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
   민주, 성기의 아내

   은주, 성기의 처형  
                     

   시간: 현재
   장소: 같은 장소에서 소도구만 약간 바꾸어 처리하면서 처음에는 교수 연구실, 다음에는 술집, 그리고 술 집 안의 다른 한 쪽은 성기와 민주의 신혼 여행지의 호텔 방. 이곳에는 침대가 하나 준비 되어 있어야 한다.

 


장면- 성기의 교수 연구실. 연구실 창으로 저녁 노을이 환하게 비쳐 들어 오는 어느 늦 가을 오후.  그    가 창 밖을 응시하고 앉아 있다. 전화가 걸려 오자 한참 후에 그가 천천히 전화기 쪽으로 다다가서 수화기를 든다.

 

성기: 여보세요, 어디라구요? 미국? 아니 이게 누구야? 명희?

 

명희: 오랜만이죠? 그동안 잘 살으셨어요?

 

성기: 잘 살고 있지. 무슨 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명희: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하나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고국 생각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는 걸 모르세요? 미국에 일년 계시면서 경험하시지 않았던 가요? 특히 교수님, 아니, 마이 다링께서 늦 가을되던 무렵, 그렇게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안달하던 기억을 벌써 잊으셨나요?

 

성기: (회상에 잠기듯) 그래, 맞아. 필라델피아의 가을은 이곳 광주의 가을 보다 더 빨리오는 것 같던데. 지금 그곳은 어때? 이곳 TV에서는 내장사 단풍이 한창 절정이라고 하던데. 롱우드 가든의 단풍을 잊을 수가 없다구.

 

명희: 하니, 아니, 하니는 내 남편 애칭이고, 마이 다링, 그게 내가 당신을 부르는 호칭이니 깐, 마이 다링! 얼마전 남편과 셀리, 그리고 나, 셋이서 벨리 포즈에 갔었다구요. 다링과 함께 갔던 곳 말이예요. 처음 그곳에 다링과 단 둘이 갔을 때, 그때가 봄이었나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 하던 때가?

 

성기: 벨리 포즈? (혼잣 말처럼) 워싱턴 장군이 영국군과 싸웠던 전적지... 전쟁 당시의 대포들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 되어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었어. 워싱턴 장군이 부하들을 진두 지휘하면서 사용하던 사령관 숙소, 그분이 사용하던 여러 유품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지, 명희? 그런데 말이야,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은 가장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나라에서 사령관 숙소는 그럴듯하던데 사병들이 사용했던 막사는 통나무 집이었지 않아? 인간 차별이 극명하게 드러나 보이던 걸! 새삼스럽게 명희가 오늘은 센티맨탈 해진 모양이군. 벨리 포즈 시절 이야기를 다하고?

 

명희: 남편이 출장을 떠나고 셀리와 단 둘만이 있거든요. 오랜만에 아이와 단 둘이 있으면서 지난 날들을 앨범 한 장, 한 장 넘기듯 되돌아 보고 있는거라구요. 그곳 언덕을 넘어 설 때 어미 노루가 새끼를 데리고 나타나던 것 기억 나세요? 그날 명희는 그 새끼 노루가 얼마나 귀여웠던지... 그 순간 나도 아이를 갖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더군요. 그리고 5월 어느 날 공원의 야외 음악당에서 공연하는 필라델피아 필 하모니 콘서트에 나와 함께 갔던 기억 나세요?

 

성기: 그럼, 기억 나고 말고. 피라델피아 필하모니는 미국에서 두 번 째로 유명한 필하모니라고 명희가 그랬지?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가 어제 같은데. 아내 직장 때문에 나 혼자 낯선 미국 땅에 혼자 지내고 있을 때, 명희는 내게 참 잘해 주었지. 그날 티켓 두 장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지?

 

명희: 처음 내가 미국에 혼자 와서 지낼 때가 생각나서 다링한테 잘해줬나봐요. 그 때도 남편이 오늘처럼 LA로 출장을 가서 남편 대신에 당신과 갔었다구요.

 

성기: 음악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명희 덕에 뭔가 좀 알게 됐지. 가늘고 높은 음조의 음악 소리는 여성의 대화로, 굵고 낮은 음조의 음악 소리는 남성의 대화로 생각하면서, 감상하면 뭔가가 들릴 거라고 내게 말을 했었지, 명희?

 

명희: 한국에서는 음악회에 자주 가나요?

 

성기: 가끔씩 가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회상에 잠긴 듯) 잔디밭에 누워 한가로운 마음으로 음악을 듣던 그곳의 젊은이들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 그들은 세월이 한참 지나서도 그런 낭만을 잊지 못할거구. 나이든 부부들 역시, 벤취에 앉아서 진지하게 음악을 듣던 모습... 음악은 그들에게 젊은 시절의 추억을 기억나게 해주는 촉매 역할을 할 거야.

 

명희: 그날 밤 나는 주리엣, 그리고 다링은 로미오가 돼 버렸지요? 봄날의 신비한 마술이 다링을 멋진 사나이로 보이게 만들었단 말이예요. 그래서 명희는 다링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답니다. 다링을 소유해야겠다는 결심 말이예요.

 

성기: 외국에서의 고독감을 이기지 못한 내 탓도 컸겠지, 그게 명희 때문이라고만 할 수가 있겠어?

 

명희: (깔깔대며) 다링! 버나드 쇼라는 영국의 극작가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그 사람의 생명력 이론을 알고 있나요? 낭만주의 작품에 나타나는 여성들의 대부분은 나약하고 수  동적이라며 그런 여성을 그는 제일 싫어 했답니다. 외형상으로 보기엔 수동적이지만 여성은 거미줄을 처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에게 맞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 남성이 거미줄에 걸려 들기가 무섭게 계속 거미줄로 묶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적극성을 갖고 있는게 여성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답니다. 후손의 번식을 위한 생명력이 남성 보다 여성에게 더 강하다는게 그 사람이 말하는 생명력 이론이랍니다.

 

성기: 명희는 기억력이 참으로 좋은 걸.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누구였지? 벨리 포즈에 갔을 때 바로 내가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으니 말이야.

 

명희: 너무도 인상적인 이야기라 기억하고 있었나 봐요. 다링, 당신이 고국에 돌아가던 날, 5가에서 서틀 버스를 타던 기억 나세요?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가기 위해서 말이예요. 그때 저는 임신 중이었답니다.

 

성기: 그랬었나? 몰랐는 걸. 우리 모두 축하할 일이었는데 왜 그때 말하지 않았지? 남편이 좋아 했겠는데. (서랍을 더듬거리다가 사진 한 장을 끄집어 내 보면서) 그리고 보내준 사진 잘 받았어. 아이가 제 아빠를 꼭 빼닮았던 걸.

 

명희: 제 아빨 닮았다구요? 거짓말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나요? 날 닮았다면 몰라도.

 

성기: 다시 보니 애가 명희를 닮은 것 같은데.... 하지만 궁금하단 말이야. 아이를 자랑하고 싶어서인 줄은 알지만, 내게까지 그 아이 사진을 보내 주다니...

 

명희: 우리 셀리 예쁘죠? 당신 눈을 닮은 것 같지는 않나요? 그 이야기말고 다른 이야기해 주세요. 광주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걸요. 광주 많이 변하지 않았나요?

 

성기: 변했지. 나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추억으로 기억할만한 곳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단 말이야. 금남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지금의 광주은행 자리에는 법원이 있었거든.   아름드리 나무들이 수 없이 많이 있었고, 그 우거진 숲 속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 그걸 기억하고 있는 광주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을 걸. 그뿐인 줄 알아? 옛날 계림동에는 경양 방죽이란게 있었지. 명희도 그건 알고 있다고? 그리고 그 근방에 왕자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이 있었고. 아주 옛날 옛적에는 극락강에서 무등산 아래까지 호수가 있었으며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는 거야. 그곳을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다녔다는 말이 있지. 그런 것들 중 어느 것 하나 지금은 광주에 남아 있지 않아. 낭만이란 것이 남아 있지 않단 말이야. 내겐 현재의 광주와 머릿 속의 또 하나의 광주가 자리 잡고 있는 거야. 어느 땐 둘의 광주가 동시에 존재해서 도무지 혼동스러울 때가 있거든. 나같이 나이들어 가는 사람이 마음 붙일 곳이 없는 광주, 현재의 난 뿌리를 잃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평초 신세와 같다고나 할까?

 

명희: 그런 말하는 걸 보면 다링은 낭만적인데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전화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갈대 우거진 광주 호수라고 했나요? 10여년 전에 내가 그곳에 갔을 때,   나를 반겨주는 것은 오직 무등산 밖에 없더라구요. 만사가 다 그런 거 아녜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테니깐요.

 

성기: 그래, 변하지 않는 건 없지. 내가 그곳 어퍼 다비에서 살았던 집 앞에 한국인이 운영하던 진고개 식당은 지금도 잘 되고 있어? 이국 땅에서 잠 못이루는 밤이면 그곳에 가서 술 한 잔씩 하곤 했는데...

 

명희: 작년에 주인이 바뀌었어요. 중국 음식점으로 바뀌었다구요.

 

성기: 안타까운 일인 걸! 펜스 랜딩은 지금도 자주 가나?

 

명희: 초 가을 어느 날 저녁에 하니와 셀리, 우리 가족 모두 그곳에 갔었어요. 유럽인들이 맨 처음 대서양을 건너와 이곳에 상륙했던 곳, 그중의 지도자 펜의 이름을 따서 펜스 랜딩이라고 했다는 것 알고 있지요? 펜실바니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펜이라는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펜, 실바니아라는 말은 숲이라는 뜻이래요. 그러니깐 펜실바니아는 펜이란 사람이 건설한 숲이 우거진 지역이라는 뜻이 아니겠어요?

 

성기: 그럤었나? 명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단 말씀이야. 5가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어. 그중에 최 사장 소식이 제일 궁금한 걸.

 

명희: 그분과 함께 하는 모임이 있어요. 다링도 알고 있지? 매달 한 차례씩 만난다는 걸?

 

성기: 알고 말고. 최 사장이 내게 참 잘해줬는데. 그분과 함께 애틀랜틱 시티에 갔던 기억이 나는 걸. 그곳에서 내 평생 처음 대서양을 보았던 인상은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거야. 그리고 밤새 내내 스럿 머신에다 쿼터를 집어 넣던 일도 말이야. 당첨되어 쿼터가 쏟아져 나올 때, 그 쾌감은 이루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없었다구. 하지만 아침엔 결국 호주머니가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지만. 그 양반은 다른 한쪽에서 블랙 잭을 하고 있었는데, 돈을 조금 땄노라고 근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사주었던 일하며... 지금도 그런 일들이 기억에 생생한데... 

 

명희: 그 사람이 우리 셀리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더라구요. 우리 부부를 전혀 닮지 않은 것 같다면서... 어디에서 본 것 같은 낯익은 얼굴이 생각 난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게 누군지 알듯하면서도 기억이 안 난단 말씀이야라고 하더라니깐요.

 

성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명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모르겠어.(다시 한번 사진을 보면서) 왜 그 아이가 자기 부모를 닮지 않았다는 거지?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명희를 닮은 것 같은데...

 

명희: (명랑한 웃음으로) 그러게 말이예요. 셀리가 다른 누구를 닮을리 있겠어요? 쌍거풀이 안된 눈이 그 어떤 사람을 닮았다는 것 외에는. 

 

성기: (사진을 더 가까이 보면서) 그렇군. 그래도 예쁜 걸.

 

명희: 우리 다른 이야기해요. 다링이 최 사장님 집에 갔다 오다가 길을 잃었던 이야기 말이예요. 그 이야기는 들을수록 재미있었답니다.

 

성기: (회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으며) 최 사장이 백인 구역에 비싼 집을 사서 이사간 다음, 우리를 초대했었지. 풀장이 있었는데 갑자기 수영을 하자는 거야. 밤에 비추는 수영장 조명이 일품이어서 우린 모두 그곳으로 갔었다구. 그런데 우린 수영복이 없어서 팬티차림으로 물 속에 들어 갔었지. 수영이 끝나고 옷을 입을 때 팬티는 벗은 다음 물을 꽉짜서 내 차의 조수석에 놔두고 운전을 하고 오는데 하체가 허전한 거 있지?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276번 도로를 타고 오다가 476번 도로로 들어서야 하는데, 그냥 76번 도로로 접어들고 말았어. 밤 12시가 넘었는데 집과는 자꾸만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것 같더라구. 도로 표지판을 보고 금방 눈치 챘지만 출구가 있어야지... 그냥 피츠버그 쪽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밖은 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등골이 오싹하더라니깐. 그 순간에도 팬티 안걸친 하체가 허전함이 느껴 지면서 말이야. (쓴 웃음을 웃으며 혼잣 말처럼 중얼 거린다.) 원래 하체는 내 것이 아    니었으니깐! 인생 시작부터 하체를 도둑 맞은 놈이 아니겠어? (다시 명희에게) 겁없이 도로 변 어느 불켜진 공장 건물로 꺾어 들어가 사람을 찾았는데 아무도 없더라구. 생각해보니 미국인들은 퇴근 후에도 건물에 불을 켜 놓고 간다는 것을 순간 깨달았지. 소름이 끼치고 겁이 나서 재빨리 그 건물에서 차를 빼 나와 계속 피츠버그 쪽을 향해 달렸어. 그때 느낀 초조감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어?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도로 변에 순찰차가 있는 게 보이더라구. 하느님을 만난 기분이었지. 백인 경찰 둘이가 차안에 있더라구. 차를 그곳에 대고 "길을 잃었다"고 했지. 필라델피아 시내로 가고 싶은데 얼마쯤 가면 출구가 있느냐고 했더니 친절하게 앞으로 10여 마일을 더 달려야 한다며 자기네가 페트롤해주겠다며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라고 하더라니깐. 내가 출구로 나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손을 흔들어 주는데 그 순간 미국 경찰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렇게 해서 집에 돌와 왔는데 새벽 1시 반이 되었더라구. 집에 돌아와서는 한참 동안이나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앉아 있었지. 그 순간에도 하체가 허전함을 느낄 수가 있었지. 팬티 안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그 사람들은 길을 걸을 때면 얼마나 하체가 허전할까?

 

명희: (깔깔대며 웃는 웃음 소리가 들린다.) 정말 혼이 나갔겠어요? 다링, 내가 너무 오랫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나봐요. 갑자기 광주가 그립고 다링이 그리워서 전화를 건거예요. 항상 건강하세요. 몇 년 후에 당신이 미국에 오면 많이 자란 셀리를 보게 될 거예요. 당신처럼 시를 쓰는 사람으로 키우겠어요. 아이가 책을 항상 끼고 다니는 것이 정말 뭐가 되긴 될 모양이예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유펜 도서관에 책 빌리러 다니던 다링 생각이 나는군요.

 

성기: 그곳 도서관의 장서가 무려 삼 백만권에 육박한다더군. 내 전공의 책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내가 그곳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이 사장 가게의 카피 머신에서 복사한 책이   얼마인 줄 알아? 거의 삼 백권에 달하지. 지금 내 연구실 책장에 저렇게 꽂혀 있다구.

 

명희: 지금 내 눈에도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그것들을 잘 활용하고 있나요?

 

성기: 아무렴. 무척 도움이 커. 아뭇튼 나라 살림이 좀 더 좋아지면 방학을 이용해서라도 그곳에 한 번 가보고 싶어. 유난히 올해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요즈음  뭔가 미로에 빠져 있는 기분이 들거든.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속을 해매고 있는 기분이 들어. (혼잣 말처럼) 술이 내 유일한 낙이 되어 가고 있으니...

 

명희: 너무 술을 마시지 마세요. 저 역시 지금 와인 때문에 약간 취하긴 했지만...

 

성기: 술 마시고 있는거야? 지금 그곳은 새벽이겠는데? 그럼 밤새 내내 잠 안자고 술 마시고 있었단 말이야, 명희?

 

명희: 요즘 향수 병에 걸렸나봐요, 그렇지만 이제 됐어요. 오늘부터 달라 질거예요. 가면을 쓰고, 나를 감추고 그리고 열심히 살아 갈꺼니깐요. 셀리는 내 아이라구요. 그 누구의 아이가 아닌 내 아이라구요. 이제 그 아이와 그 누구도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셀리를 통해서 당신을 연상하는 그 따위 짓은 다시는 안할 겁니다. 자 그럼 이만 전화 끊겠어요. 앞으로 전화 없더라도 이해하세요. 안녕!

 

성기: 잠깐! 명희! 그 무슨 소리야? 셀리를 통해서 나를 생각한다구? 셀리와 내가 무슨 상관이라도 있다는 거야? 명희, 제발 말해봐! 왜 내가 명희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를!

 

명희: 명희가 술에 취해 그냥 해본 말에 불과하다구요. 제 말따위에 신경 쓰지 마세요. 다링, 열심히 사세요, 열심히 살아야 한다구요, 그래서 이 명희에게 용기를 주어야 해요, 안녕! (그녀의 흐느껴 우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긴다.).

 

성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도대체 내가 그 아이의 아빠라도 된다는 말 투가 아닌가? (한참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다. 회상에 잠긴 듯) 내 삶이 어쩌다  가 이렇게 뒤죽 박죽이 된 걸까? 그래, 맞아. 결혼 시작 날부터, 그러니깐 결혼 초야부터 내 삶이 이렇게 엉망이 되버린 거다. 뭔가 내 삶을 망가뜨린 그 음흉한 음모를 밝혀 나가는 일부터 시작하는 거다. 모조리 밝혀 내서 바로 거기에서부터 내 삶을 다시 시작하는 거다. (전화의 다이얼을 돌린 후) 여보세요! 처형이세요? 좀 만날까요? 왠일 이냐구요? 난 지금 심각하답니다. 오늘 꼭 만나고 싶어서 그래요. 어디가 좋겠느냐구요? 조용한 장소면 어디든 좋겠는데... 융 푸라우라구요? 그곳이 좋겠군요. 한 시간 후 라구요? 알았습니다. 그곳으로 갈께요. (전화를 끊고 그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앉아 있는 중에)
                                   (조명이 어두워진다.) 


              
(무대 오른쪽에는 호텔방의 침대가 하나 준비되어 있으며 젊은 날의 성기와 그의 처가 보이는데 그들의 대화가 관객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들려야 한다.)

 

성기: 매우 취하는 걸. 몽롱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민주: 오늘 같은 날 조금 취한들 무슨 상관있겠어요? 한 잔 더 하실래요?

 

성기: 왜 자꾸만 내게 술을 권하는거요?

 

민주: 성기씨는 원래 애주가 잖아요?

 

성기: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그렇다고 술만 마시면 어떻게 해? 우리 삶의 설계를 해야 하는데...

 

민주: 그런 이야기는 우리가 만난 이래로 계속했잖아요. 또 무슨 설계를 하자는 거예요?

 

성기: 아이는 몇이나 가져야 할지 말이요. (부끄러워하는 민주를 향해 손가락을 펴 보이며) 하나?, 둘? 셋? 그럼 아들 하나에 딸 하나, 그렇게 해서 둘만 낳을까?

 

민주: 늦 결혼에 아이를 무슨 둘 씩이나. 하나만 낳아서 잘 길러요. 난 지금의 직장을 잃고 싶지 않으니깐요. 난 일과 가정 둘다 가질 거라구요.

 

성기: 욕심도 많지. 자기 원하는 대로 하구려. (맥주를 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민주: 한잔 더하세요. (잔에 맥주를 따른다. 그리고 그에게 권한다.)

 

성기: (손을 저으며) 그만 마시겠소. 속이 거북하단 말이요. 짧은 시간에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본 적이 없소.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화장실에 가서 버뮤팅하고 와야겠어. (성기의 버뮤팅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참 후에 그가 비틀거리며 들어 온다.)

 

민주: (다시 잔에 맥주를 채운다.) 우리 오늘 저녁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구요. 신혼 때 남편의 군기를 바로 잡아야 한다더군요.

 

성기: 노처녀 구해주니깐 이제 별소리를 다하고 있군.

 

민주: 무슨 소리예요. 나 아니었으면 당신같은 고물을 누가 처리해주었겠어요?

 

성기: (술잔을 들며- 손의 감각이 둔하여 맥주를 마시는 동안 바닥에 술이 쏟아져 내린다.) 음, 취한다. (눈이 반쯤 감긴 채) 학문이 뭐길래, 책과 결혼했었다니깐. 연구도 너무 많이 하면 해가 된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런지 여자 앞에만 서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줄도 모르는 쑥맥이 되버렸어.   

 

민주: 그러니깐 내가 당신을 구해준 거 아녜요? 내가 번 돈은 내가 쓸테니깐 그렇게 아세요.

 

성기: (과장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요. 내 이래봬도 시시하게 아내 수입이나 넘보는 놈은 아니요.

 

민주: 그럼 됐어요. (빈잔에 또 맥주를 채워 성기에게 건네준다.)

 

성기: (술잔을 받아들며) 아! 그 말하려고 계속 술을 먹인 거요?. 본론이 바로 그거였구려. (하품 소리가 들리며) 아 졸려. 이제 잡시다. 이러다가 신랑 구실 못하는거 아냐?

 

민주: 어서 씻고 오세요!

 

성기: 아까 씻었는 걸.

 

민주: 그래도 시간이 꽤 지났잖아요. 술을 많이 마셨으니깐 화장실 일도 차분히 보고 몸도 천천히 깨끗하게 씻고 오세요. 화장실에서 돌아와서는 일체의 말도 하면 안 된다는 것 잊지 말아요. 불도 켜지 말구요. 부끄러워서 그러니 내 말 명심해요. 불을 켜거나 말을 걸면 그것으로 우리 사이는 끝장이란 걸 아세요. 아무리 취해도 첫날 밤은 치뤄야 하다는 것도 명심하세요. 다음 날 아무 일이 없었다면 남들이 얼마나 비웃겠어요. 남자다움을 보여 줘야한다구요.

 

성기: (마지 못해 하면서 비틀거리며 화장실 쪽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 온다. 잠깐의 순간이다.) 노처녀 시집 오게 해줬더니 부끄러움도 다 잊은 모양이야. 알았어요. 시키는대로 다 할테니 준비나 단단히 하고 있어요. 히히히. (조명이 어두워진다. 한참 후 불꺼진 침대로 성기가 비틀거리며 올라간다.) 준비 단단히 했어? 어? 벌써 옷을 다 벗었네? 내가 벗겨줘 야 하는 건데. (손이 민주의 가슴을 더듬어 내려 가다가) 가슴에 이게 뭐야? 조그만 사마귀가 있네? 당신을 잊어 버리면 가슴의 사마귀만 찾으면 되겠는 걸.. 히히히...(그녀가 아무 말을 하지 말라는 듯 손으로 그의 입을 막는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성기가 잠에 취한 듯 하품을 하며) 이제 나는 잘거요. 첫날 밤은 분명히 치렀다는 것 잊  지 말아요. 히히히... 좋은 꿈꿔요. (그가 잠을 자기 시작한다. 그녀가 조용히 일어나 나간다. 성기가 어렴푸시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가는 아내의 옆 얼굴을 희미한 불빛 사이로 바라본다.) 아니? 내가 취했나? 아내 얼굴이 아니 것 같은데?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부부도 이방인처럼 느껴진다더군. 내가 분명 취하긴 취한 모양이야. (그가 곧 잠에 곯아 떨어진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그녀가 들어와 침대 위 그의 곁에 눞는다.)  

 

(융 푸라우에 성기가 먼저 도착해서 술을 몇 잔 마신 듯 탁자 위에는 맥주 너덧 병과 술잔이 놓여 있고, 그의 얼굴은 홍조를 띄고있다. 성기의 처형인 은주가 들어 서는데, 그녀는 성기와 같은 나이 또래인 40대 후반이다. 젊은 시절에는 아주 미인이었을 성 싶다.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임이 그녀의 복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녀가 들어서자 그가 일어서며 인사를 한다.)          

 

성기: 어서 오세요, 처형. 오랫만이군요!

 

은주: 어쩐 일이세요, 초 저녁부터 술을 다 마시고?

 

성기: 원래 제 인생은 술로 시작된 놈 아닙니까? 이런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은주: 민주가 걱정을 많이 하던 걸요, 요즈음은 매일 과음하고 집에 들어 가신다면서요? 이젠 젊은 시절의 제낭이 아니란 걸 알으셔야지요.

 

성기: 이따위 인생 좀 더 먼저 떠난들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입니까? 내가 죽은 뒤 울어줄 자식 하나없는 신세인데...

 

은주: 그렇지 않아요, 제낭!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구요. 옛날처럼 자식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성기: (그녀의 말을 가로 막으며) 그런 처형께서는 왜 아이를 갖기 위해 그토록 안달이셨나요?

 

은주: (얼굴을 붉히며) 무슨 말이세요? 벌써 취하셨나요?

 

성기: (맥주를 한 숨에 들이키며) 취했습니다. 아니 오늘 밤 취할 겁니다. 제 술주정을 다받아 주셔야 합니다, 처형!

 

은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

 

성기: 불만이라기 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온통 수수께끼 같다 이 말입니다. 미로를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이 말씀입니다.

 

은주: 뭐가 수수께끼같다는 말씀이세요?

 

성기: 내 아내의 가슴에 있었던 사마귀가 어디로 가버렸다니깐요.

 

은주: (주변을 돌아 보며 소리를 낯추라는 손짓을 하며) 남들이 들을까 두렵군요. 동생의 가슴에 사마귀라니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예요?

 

성기: 분명히 그 날 저녁엔 있었단 말입니다.

 

은주: 그 날 저녁이라니요?

 

성기: 신혼 초야엔 있었다구요, 그녀의 가슴에 사마귀가.

 

은주: 그날도 오늘처럼 취했던 모양이군요.

 

성기: (맥주를 잔에 가득 부어 한숨에 들이키면서) 그렇소. 그렇지만 그건 아내의 음모였다구요. 계속 술을 마시게 했으니깐.

 

은주: 저는 제낭을 지성인으로 알고 있는데 자기 행동을 남의 탓으로 돌리시다니! 술마신것도 아내 탓이란 말이예요?

 

성기: 아내의 행동에 의심가는데가 많아요. 처조카들이 많은데 왜 하필 창민이만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요.

 

은주: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그게 뭐가 의심스럽다는 거예요?

 

성기: 처제들이 몇인가요? 그 사람들에게는 아이들이 없나요? 왜 하필 내 아내는 창민에게만 유난스럽게 애정을 쏟는지 모르겠단 말이요.

 

은주: 어떤 점이 그렇게 유난스럽단 말인가요?

 

성기: 자신의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체념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창민이에게 별의 별 선물을 다 사주고... 옷, 노트, 입학금, 무슨 대회에 나가면 빠지지 않고 함께 참가하고... 마치 자기 친자식이나 되는 것처럼... 그리고는 집에 들어와서 어떤 때는 기뻐하고, 어떤 때는 처형을 마구 욕하고. 그게 애증의 양면 갈등이 아니고 뭐겠어요? 언니와 아이 하나를 놔두고 마치 애정 쟁취를 위한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 같이 내 눈엔 보인단 말이요.

 

은주: 나도 그게 고통스럽답니다. 아이를 왜 동생이 가만 놔두지 못하는지 안타깝다구요. 자기 혼자 잘 할 수 있는 아이를... 그런 동생이 고맙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미웁기까지 하답니다.

 

성기: 왜 그럴까요, 내 아내가 유달리 창민이 한테만 애착을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은주: 나도 그걸 모르겠단 말이예요. 남편의 직장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게 안타까울 뿐이예요. 동생과 멀리 떨어져 살고 싶다니깐요.

 

성기: (뭔가 지금까지 묻어 두었던 말을 하는 듯 진지하게) 신혼 초야 때 방을 나선 여인의 옆 얼굴은 바로 처형이었습니다.

 

은주: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글을 쓰시는 분들은 모두가 이렇게 터무니 없는 건가요? 병이 깊어지셨군요. 이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는 걸요! 지금 소설을 쓰고 계시는    겁니까?

 

성기: 지금 나를 정신 병자로 몰고 가는 겁니까?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럼 내가 병원에가서 창민이가 내 자식인 아닌지를  친자확인이라도 해 볼까요? 그 아이 혈액형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은주: (당황해 하며) 혈액형이 어떻다는 거예요?

 

성기: 처형은 혈액형이 B형이고, 동서의 혈액형은 O형, 그런데 창민이 혈액형은 뭔지 아세요? A형이더라구요. B형과 O형 사이에는 A형의 후손이 태어 날 수가 없다는 걸 처형도 잘 아실텐데. 내가 다 조사해봤다구요.

 

은주: 잘도 조사를 해보셨군요. 그렇지만 그건 초.중등학교 시절에 학생들이 배우는 초보적 지식인 줄 모르세요? 지금은 이상 체질이라고 해서 그 보다 훨씬 복잡한 형태의 혈액  형의 후손이 태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래뵈도 저는 그런 분야를 전공한 사람이랍니다. 하여튼 그런 별난 생각을 하면서 살고 계시는 제낭이란 걸 몰랐군요. 제 동생이 이런 고통을 받고 사는 줄을 전혀 몰랐어요.

 

성기: (확신감을 잃은 표정으로) 다른 혈액형의 아이가 출생할 수있다구요?

 

은주: 그럼요. 이제 제 말을 믿을 수가 있나요? 그리고 그 부질없는 공상 따위는 오늘부터 날려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사세요.

 

성기: 그렇다면 내 아내의 가슴에 있었던 사마귀는 어떻게 된 걸까요?

 

은주: (맥주를 자신과 성기의 잔에 딸아서) 우리 한 잔씩하면서 이야기해요. (그들이 술을 마신다. 다시 또 그녀가 잔을 채운다.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다.) 아까부터 사마귀 이야기를 하시는데 도대체 그건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예요?

 

성기: 내가 아내의 가슴을 더듬었을 때 분명히 가슴 위에 조그만 사마귀가 있었다구요. 그래서 취중에도 아내를 찾으려면 가슴을 더듬으면 되겠다고 말했었소.

 

은주: 취중에 보는 세상과 현실은 아주 다르답니다.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취중에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겠지요. 그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말아요. 그리고 아내의 가슴에 사마귀 따윈 잊어 버리세요. 잘못된 집착으로 살다보면 제낭은 자꾸만 나락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나이에 비해 이렇게 망가진 제낭을 보면 가슴이 아프군요. 꿈속에서 살지 말고 현실로 돌아 오세요. 스트린드베리의 "아버지"라는 작품이 생각 나는군요. 남편이 딸을 너무 예뻐하니깐 아내가 질투하여 그 아이가 당신의 아이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거든요. 그때부터 남편은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속에 살다가 결국 정신 병원으로 실려 갔답니다. 아주 평범한 것 같은 말 한 마디가 인간을 미치게 하기도 하지요. 제낭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이런 게 깊어지면 제낭은 정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할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구요.

 

성기: 스트린드베리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총각 시절 내가 아내와 처형이 있는 자리에서 해준 것 아닙니까? 그런 이야기를 이제 내가 처형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다니 어처구니 없군요.내가 정신 병원에 가야한다구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소. 그걸 들어 주시면 이런 생각에서 벗어 날 수 있겠는데...

 

은주: 말하세요. 제낭을 돕는 일이라면...

 

성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처형의 가슴을 내게 보여주실 순 없겠소? 사마귀를 확인하고 싶은거요.

 

은주: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세요? 처형의 가슴을 보고 싶다 이 말입니까? 그게 말이되는 소리예요?

 

성기: 나도 이런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답니다. (흐느끼듯) 제발 부탁입니다. 날 도와주세요.

 

은주: 다른 부탁이라면 다 들어 줄 수 있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유교적 전통이란게 있고 그런 뿌리 속에 살고 있는게 우리 한국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제낭이 미국에서 지내고  오셨다지만 이곳을 미국 사회와 혼동하지 마세요. 어떻게 감히 처형의 가슴을 보여 달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이예요?

 

성기: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고 있는게 아닙니까? 나도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그런다구요.

 

은주: 사마귀 따윈 잊어 버리세요. 그리고 간호부장을 하고 있는 제가 제낭이 의심하는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제 가슴 위에 그것을 지금까지 그냥 놔뒀겠어요? 그걸 없애는 수술 따위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는 일인데. 사마귀 따윈 없었던 일로 제낭의 머리속에서 완전히 지우도록 하세요. 제 말 아시겠어요?

 

성기: 전 어린애가 아니라구요!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해봤자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평생을 이런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겁니다.

 

은주: 우리가 불확실성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모르세요? 어떤 실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 해드릴께요. 사람들이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겁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앉혀 놓고 갑자기 조명을 어둡게 한 가운데 불쑥 어떤 사람이 들어 왔다가 잠깐 사이에 나가게 했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답니다. 그 인물의 신장이 어느 정도 되더냐고 물으니깐 그들은 1m 55cm에서부터 1m 8oc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대답들을 하더라는 거예요. 몸집에 대해서 물으니 여윈 몸매에서부터 뚱뚱한 거인이라는 등 아주 다양하더래요. 이만큼 인간은 같은 사물을 보는데도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다구요. 인간의 사고는 객관적이 아니라 매우 주관적이랍니다. 금방 드린 이야기는 제낭이 호텔 방에서 저를 보았다는 생각이 얼마나 망상일 수 있으며 터무니 없는가를 잘 증명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제낭이 왜 그 순간의 사람이 나였을거라고 생각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건 전혀 망상일 수가 있다는 거죠. 이제 그런 생각에서 하루 빨리 벗어 나세요. 제 말 알아 들으시겠죠? 전 바빠서 이만 일어 설께요. 그리고 우리 이런 만남은 그 누구에게도 비밀로 할테니 밝은 마음으로 살도록 하세요! 동생이 행복하기를 빌어요. 하루 빨리 우리 가족이 이곳을 떠나 살겠다는 결심이 오늘로 인해서 더욱 강하게 드는군요, 이제 창민이가 대학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만이 라도 기다리려했는데,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군요. 동생 부부가 헹복하기를 진심으로 두 손 모아 빈다는 의미에서라도 저희들은 하루 빨리 이곳을 떠나겠어요.

 

성기: (비꼬는 어조로) 인간이 매우 주관적일 수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도 제가 옛날에 처형에게 들려 준 이야기 아닌가요? 참으로 고맙군요. 현실 도피를 하시겠다는 말이군요?

 

은주: (일어서려다가 다시 주저 앉으며) 모든 걸 다 알려고 하시는 성격은 버리세요.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너무 많아요. 입센의 "와일드 덕"을 읽어 보셨나요? 거짓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려는 그레거를 아시나요? 그는 아버지의 하녀였던 여성이 자신의 친구와 살면서 딸을 기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들 사이의 아이가 자기 아버지 그레거의 자식임을 직감합니다. 친구에게 그 사실을 밝혀 진실에 직면하며 살게 하나, 그 가정은 어떻게 된 줄 아세요. 딸은 죽고 가정은 파탄이 나 버렸답니다. 거짓일 망정 그걸 믿고 살던 때가 차라리 행복했었지요. 입센의 입장이 바로 그거였답니다. 사람들이 거짓일 망정 거기에서 행복을 찾고 살게 그냥 놔두세요. 그것이 행복으로 알고 살게 말이예요. 제낭 미래의 삶을 위해 충고해 주는 말이예요. (그녀가 일어서서 나간다. 성기는 고개를 떨군채 계속 앉아 있다. 그녀가 나가면서 성기 쪽 테이블을 가리키면서 카운터에서 돈을 계산 한다. 술 몇 병을 더 가져다 주라는 손짓도하는 듯 보인다.) 

 

성기: 아니, 왜 나는 오늘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과거에 내 입을 통해서 내뱉었던 말들을 그대로 들어야만 하는가? 그레거 같은 인물이 되지 말라고? 그럼 나는 도대체 어떤 인물로 살아가란 말인가? 남의 아이나 낳아 주고 다니는 종마의 신세로 세상을 살다 가란 말인가? (갑자기 성기가 일어서면서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는다. 그웃음 소리는 마치 말 울음 소리를 연상 시킨다.) 나는 종마! 종마! 여기에서도 미국에서도! 나는 종마, 종마란 말이다! (효과음으로 히히잉하는 말 울음 소리가 반복해서 울려 퍼지고 말달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며 조명이 어두워 진다.)  

                             (막이 내린다.)

 

 

 

 

                         *문학지에 개제된 작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