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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최후의 휴매니스트, 이 청준

김영관 2007. 6. 7. 09:46
 

 

 

 전남 문협 주관 제 25회 전남문협 심포지엄 (남도의 뿌리를 찾아서/장흥 문학 편)에서 이 시대 최고의 소설가 이 청준의 작품 세계에 관해 여러 가지로 부족한  이 사람이 이야기할 기회 갖게 된 것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청준 깊이 읽기>라는 책에서 이 만재는 논현동 안세병원 네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 청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빛바래 뵈는 낡은 코트에 잔잔히 휘날리는 순백의 은발, 겨드랑이에 낀 누런 책 봉투는 그냥 평범했다 치더라도 신호 따l라 횡단보도를 건너는 남자로서의 그 몸짓이 과연 그다웠다. 모든 차량을 멈추게 하고 혼자 길을 건너는 게 여간 죄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조심스레 보폭을 조아리며 걷는 것이었는데 제 구두코 5, 6미터 어름의 땅에 시선을 두고 조심조심 걸어가는 그 미소의 표정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연하다. 특유의 동안에 한 없이 온화한 미소! 라고 했고 이어

 

 가끔씩 잠실 뒷골목 번다한 고깃집 장판 마루에 앉아 소주를 마신다. 술을 마시면 그는, 발그레한 얼굴에서 나이가 사라지고 금세 소년이 된다.


라고 쓰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청준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하고 때 묻지 않은, 그러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파리 한 마리 못 죽일 만큼 순하디. 순한 이 청준 아니겠는가?

 그런 그가 <벌레 이야기>를 썼고 그것을 <밀양>이라는 영화로 만들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작가 이청준이 이 작품을 쓴 의도는 5.18로 인해 피해자인 광주 사람들이 아직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가해자는 이미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의기양양해 함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라는 요지의 말을 할 만큼의 대단한  작가가 이청준이다. 과연 그의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부와 명예의 정상에 오른 인물들을 아주 많이 배출했을 장흥, 그들이 고향에 내려와 위풍 당당히 장흥 읍을 걸을 때, 작가 이 청준은 밤늦은 시간에 아무도 몰래 소리 없이 고향에 내려 왔다가가 이른 새벽에 고향을 떠나곤 했다고 자신의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그가 그리도 자신의 삶에 부끄러워했던 것은 영달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 시대의 아픔에 아무런 힘을 보태지 못하는 지극히 무력한 우리 시대의 지식인 고통의 고뇌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동시대인들이 겪는 아픔을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느끼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 시대의 휴매니스트가 작가가 이청준인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장흥엔 부와 명예만을 쫒던 사람들의 이름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청준이라는 이름은 우리 문학사에 기리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팽배한 시대라지만 문화재적 자산으로 치면 이 시대의 국보급에 속하는 이 청준을 가진 장흥인 여러분들이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데오도 드라이저가 <미국의 비극>을 썼을 당시 미국인들은 물질 추구에 지나칠 정도였다. 그 결과 클라이드 그리피스 같은 돈과 명예 밖에 모르는 젊은이를 만들어 냈음을 자탄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드높았던 것이다. 한 사회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작가의 힘은 대단 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토머스 하디의 작품 주인공 테스가 실존했더라면 그 당시에 살았음직한 집을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소개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 있는 작가들의 생가와 집필실을 그대로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자기네 나라의 정신적 자산인 작가들을 영원히 기억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지나친 물질 숭배 풍조로 인해 정신문화와의 균형이 깨어져 가는 현 상황에 작품 곳곳에 장흥을 작품 배경으로 쓴 작가 이 청준 에게 이젠 장흥이 보답을 해야 할 때라 생각이다.

 

  그가 얼마나 고향 장흥을 잊지 못하는 작가를 한번 살펴보자.


  작가 이청준의 작품을 읽어 가노라면 방에 가만 앉아서도 장흥 곳곳이 마치 전부터 친숙한 곳인 양 눈에 선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유년의 세월을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면 그곳들이 자신의 고향인지 작가의 고향인지 혼동되다가 결국 장흥이 내 고향 친숙한 어느 동네로 나타나 유년의 내가 그곳에 서 있는 착각을 갖게 한다.

  이 청준 작가 본인도 <그와의 한 시대는 그래도 아름다웠다>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가 도시의 이기심과 탐욕적인 삶에 환멸과 회한이 들 때면 찾곤 했던 곳이 고향 장흥이다. 그는 마치 정신적 순례지로서, 자궁으로의 회귀 본능으로서 고향을 즐겨 찾고 작품 배경으로 활용 했던 것이다. 그러다 다시 그는 원기가 회복되면 도시의 위선을 벗겨 내는 인고의 작업을 시작하곤 했던 것이다. 도시와 고향을 번갈아 가며 그는 결국 인간의 내면은 아름다운 것임을, 그리고 결국 인간은 용서와 화해를 통해 위대해질 수 있음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눈길>에서

 동구 밖 까지만 바래다주겠다던 노인은 다시 마을 뒷산 잿길까지 나를 좀더 더 바래다주겠다. 우겼고, 그 잿길에 올라선 다음엔 새 신작로가 나설 때까지만 산길을 함께 넘어 가자 우겼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차례씩 애서린 실랑이를 치르고 나면 노인과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중략> 신작로까지 나섰다. 그리고도 아직 그 면소 차부까지는 길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결국 그 면소 차부까지도 노인과 함께 신작로를 걸었다.


 글을 읽고 있던 나는 1950-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소설가 이 청준을 따라 고향집에서 차부까지의 정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1939년생인 이 청준 작가는 본인과 거의 10년 나이 터울인데도, 그리고 본인의 고향이 함평인데도 글을 읽어 가면서 새벽 차 타러 차부까지 걷던 그 시절이 내 일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그가 장흥을 배경을 쓰고 있으면서도 그 정경은 그 당시 시골에서 자랐던 우리 모두의  고향 모습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고향을 무대로 글을 쓸 때는 가장 순수한 휴매니스트가 된다.

  작가 이청준이 <눈길>에 관해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글이 있는데 여기에 소개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눈길>은 그러니까 나 혼자서가 아니라 내 어머니와 아내, 셋이서 함께 쓴 소설인 셈이다. 오랜 세월 가려져 온 그 새벽 헤어짐 이후의 두려운 사연을 당신의 삶속에 혼자 간직해 온 어머니나 그 헌 옷괘의 설운 사연을 실마리 삼아 끝내 그 무고한 아픔의 실체를 드러내 준 아내가 아니었으면 이 소설을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거기에 내가 다듬고 덧붙인 바란 무력하고 모멸스런 자신을 더욱 가책하려는 심사에서 어머니에게 빚이 없다 뻔뻔스럽게 우기고 든다거나 당신을 불손하게 노인이라 부르는 따위의 수사상의 역설적 반어법을 고려한 정도이다.


  작가 이 청춘은 다른 장에서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60년의 4.19학생 혁명으로부터 5.16 군사 쿠데타, 10월 유신, 10.26과 12.12 정변, 5.17 광주 항쟁과 6.29 선언을 거쳐 이후의 민선 정부에 이르기까지 줄곧 극심한 정치. 사회의 격변기였다. 그것도 알다시피 개인과 사회의 퇴행을 초래한 폭력과 어둠의 세월이 대부분이었다. 그 위에 내 의식 속에는 소년기에 겪었던 6.25의 기억이 늘 답답한 가위 눌림 같은 어둠 자국으로 자리해 있었다. 그런 기억 체험의 과정 속에 우리 누구의; 삶도 스스로 부끄러운 죄 의식과 무력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겠지만 나 또한 글쟁이로서 그 짐을 감당해 나갈 길을 쉽게 찾기가 어려웠음이 물론이다.


 그는 특히나 4.19 학생 혁명이 5.16. 군사 쿠데타에 인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힘이 없는 지식인의 나약함, 자신의 무능함에 많은 좌절을 느꼈던 것처럼 보인다. 벼랑처럼 암담한 현실에 부딪치면 그는 곧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순박함과 솔직성에서 힘을 얻고자  고향을 찾거나 고향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썼던 것이다.

  


 <나무 위에서 잠자기>에서 작가 이 청준은

한 나절씩 우거진 잎새 사이에 숨어 익은 팽 열매를 따 먹으며 마을 밖 멀리까지 트인 조망을 즐기곤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그대와 한 시절은 그래도 아름다웠다>에서 고향집을 그리면서도 떠나온 고향집을 그리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묵은 세월의 흔적을 마주 대하기가 두려워 고향집을 찾지 못하는 우리시대의 휴매니스트 중의 휴매니스트가 작가 이 청준 이다.


 하지만 그렇듯 집을 찾아 가진 못했어도 해마다 봄이 오면 지금은 지상에 없는 혈육들과 함께 그 옛집이 생각나고 텃밭의 꽃들과 그날의 편지 속 ‘진섭이네 배꽃’이  내 마음속에 하얗게 피어나곤 했다. 그 꽃들로 하여 나는 마음속으로나마 그동안에도 그 마지막 남은 옛집 골목까지 ‘고향 길 닦기’를 계속해온 셈이었달까. 라고 같은 책에서 작가 이 청준은 고향을 그리고 있다.


 <선학동 나그네>에서 소리가 그 곳을 떠나지 않음은 곧 작가 이 청준 자신의 넋이 먼 훗날까지도 떠나지 않을 것임을 그의 다음글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장흥 한재 고개에서의 글이다. 지금 막 푸른 물결 위를 날아오르려는 바닷새 자태의 선학동 모습들이 차례로 펼쳐져 나갔다. 그런 풍광 속에 아직 누른 풀빛을 띠고 있는 한재 고개 초원에는 과연 수천 포기, 수만 송이를 헤아리는 자주 빛 할미꽃 군락이 산중턱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 진기한 풍경 앞에 우리는 한 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는데, <중략>

 그 할미꽃 군락 앞에서 기인한 느낌을 혼자 중얼 거렸다- 우리 동네 그 노인들이 모두 어디로 가셨나 했더니 여기 와 모여 계시구먼. 우리 한 골목 이웃이던 섭섭이 할머니도 고깔나무집 숙모님도 갯나들 방죽 정문이 할머님도 우리 딸 은지 할머니랑 모두 함께....


  작가 이 청준은 다시 자신의 초등 시절 추억을 되살린다. 1950년대 중반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우리는 그 6년 동안 내내 변변한 학교 건물이 없이 이 동네 저 동네 마을 회관을 빌어 수업을 받았다. 그러다가 6.25 전란을 치른 50년 가을부터 우리가 졸업한 54년 무렵까지는  그 중 규모가 큰 회진 마을회관이 본교 노릇을 하였다.

  그 회진 마을 맨 꼭대기에 자리한 본교 뒤뜰 언덕에 인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름 모를 활엽수 한그루가 서 있었다. 물론 초등학교 졸업 이후 고향 마을을 떠나 외지를 떠돌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까맣게 잊고 지내온 나무였다. 그런데 내 나이 어연 40대로 들어설 무렵 오랜만에 옛 고향 동네를 찾는 길에 그 회진 마을을 지나다보니 옛 학교 회관 건물은 흔적이 없는데 언덕 위의 나무만은  수고가 훌쩍 높아진 채 더욱 청청하게 서 있었다.


 다시 그는 고향에 남은 여자 초등 동창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의 입을 빌어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 터에는 그 나무 한그루 밖에 없어. 하지만 그 나무만 보면 나는 늘 옛날로 돌아가. 어린 옛날로 돌아가서 그 시절 선생님들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고, 그러면서 그 어린 시절처럼  다 정겹고 허물 없어져.

   

 작가 이 청준은 단 몇 차례의 해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자신의 고향을 끼고 도는 남도 여행의 반복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호주머니에 방문지에서 돌멩이 하나씩을 담아와 자신의 집에 두고 지난 시절을 머리에 그리는 것이다. 돈 안 되는 이름 없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사랑 하는 그 심성은 가히 이 시대의 최고의 휴매니스트이다. 가장 온화하기에 가장 강할 수 있는 작가 이 청준은 이제 그는 소리가 되어 남도를 떠돈다.

 

 전라도 보성읍 밖의 한적한 길목 주막으로부터 시작되는 <천년학>은 선학동으로

그래서 그녀의 소리와 함께 선학동은 포구가 되었고, 그녀의 소리는 한 마리 산학과 함께 물위를 노닐었다. 아니 이제는 그 소리가 아니라 여자 자신이 한 마리 학이 되어 선학동 포구 물 위를 끝없이 노닐었다. <중략> 여자는 학이 되어 이 선학동의 학이 되어 버린 거여. 학이 되어서 언제까지나 이 고을을 떠돈단 말이여.


  작가 이 청준은 <자서전을 쓰십시다>에서도 우리 사회의 위선과 가식 못지않게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지나친 신념 또한 경계해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세상 물정을 모를 정도로 순박한 작가 이 청준, 그런 성풍이었기에 세상이 제 길을 가지 못할 때 바른 잣대로 세상을 보고 평가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늘 때 묻지 않고 순박할 수 있었음은 늘 고향인 장흥이 그의 마음 저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최후의 휴매니스트  작가 이 청준님, 당신의 건투를 빕니다.

 

 

장흥 소설문학 현장 재조명
심포지엄 및 문학기행에 200여명 참석 성료
탄탄한 문학 향맥 자랑… 현장 답사도
입력시간 : 2007. 06.08. 00:00


'장흥의 소설문학'을 주제로 지난 6일 전남도내 문학인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흥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심포지엄은 장흥의 소설 향맥을 확인하는 뜻깊은 자리가 됐다.
한국문학의 본향을 지향할만큼 문학의 자원이 풍성하고 출신 작가들의 활동이 왕성한 장흥에서 기억될만한 문학 행사가 치뤄졌다.

지난 6일 장흥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된 '장흥의 소설문학'을 주제로 하는 심포지엄은 현충일임에도 불구하고 전남도내 문학인 200여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한국문협전남지회(회장 조수웅)와 장흥별곡문학동인회(회장 김석중)가 공동으로 마련한 이 행사는 현대소설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을 배출한 장흥의 문학 현장을 재조명 한다는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장흥출신의 소설작가들은 1954년 문예지에서 단편소설 '가잿골'로 등단한 정병우를 필두로 해 송기숙,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에 이어 김석중, 김해림, 김현주, 신동규, 백성우, 윤석우로 이어지는 탄탄한 소설의 향맥을 구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영화화되어 국내는 물론이려니와 국제적으로 발돋음 하는 추세이며, 외국어로 번역된 작품도 10여개국에 100여권을 넘고 있어서 가히 현대소설문학의 본향이라 지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지역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장흥의 소설문학을 부분적으로라도 조명하는 '장흥의 소설문학' 심포지엄은 선주원(광주교대교수)의 '장흥소설문학의 정신사적 흐름'이라는 주제발표와 김영관(조선대교수) 김경희(소설가,조선대강사)등의 발제, 참석회원들의 질의 응답으로 두시간반동안 진지하게 진행 됐다.

특히 '우리시대 최후의 휴머니스트 이청준'을 발제한 김영관 교수의 발표는 참석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에는 안양면의 '한승원 문학산책로' 영화 '천년학촬영장' '이청준 생가' '천관산 문학공원'을 답사하는 문학기행은 김석중의 감칠맛 있는 해설이 곁들여져 재미를 더하는 시간이었다.

심포지엄의 축사에서 김인규 장흥군수는 장흥을 문학의 명소 문학의 테마 지역으로 조성하여 가히 한국문학의 선두 지역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전남 문학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남도문학의 뿌리를 찾는 전남문협의 심포지엄은 알찬 성과를 거두며 장흥의 문학을 확인하는 뜻깊은 행사였다.


장흥=길병국기자        장흥=길병국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