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인물
영민: 40대 초반의 공무원
귀식: 같은 나이 또래의 도박꾼
형철: 귀식의 고향 친구, 공무원
그외의 인물들: 정민, 두만, 박 사장, 혜정,
기타 도박판에 모인 사람들.
장면 I: 1980년대 초반 3월 어느 날 오후, 아파트 거실.
장면 II: 8개월 후 어느 날 오후 3시 경, 장면 I과 같은 장소.
장면 III: 같은 날 오후 5시 경, 어느 아파트.
장면 IV: 이틀 후, 다방.
장면 I
3월 어느날 오후, 아파트 거실
( 평범하게 세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다. 손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집주인과는 달리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다. 말투나 행동, 옷 매무새 등으로 보아 세상 물정에 어두운 가정과 집만을 오가며 살아온 전형적인 봉급장이 이다. 반면에 집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평생을 사무실에 ?매어 살아 본 적이 없는 들판의 야생초 같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그 나름대로 제법 세상을 아는 표정과 세상 물정을 모르는 두 사람을 비웃는 듯한 말투이다. 손님으로 온 사람 중의 한 사람과 이 집주인은 같은 고향의 국민학교 동창생으로 서로 다른 삶의 방식 때문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함께 온 사람의 어떤 일 때문에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듯 싶다.)
형철: (집주인을 향해) 여보게 귀식이, ( 같이 온 사람을 가리키며) 이분이 며칠 째 식음을 전폐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 말도 않고 이불 만 뒤집어쓰고 있다네. 사모님이 얼마나 걱정이 되셨던지 내게 부탁을 하더라구. 무슨 일인 지 물어도 통 대답을 안한다는 거야. 뭔가 짐작은 가지만 남편 자존심 때문에 직접 물어 볼 수가 없었나 봐. 그래서 사모님이 내게 부탁하더라구. 함께 차라도 한잔하면서 고민이 뭔가를 물어 봐 달라구. 함께 사는 부부가 어려울 땐 도와야 하는 데 뭣 때문에 그러는 지 알 수가 없다면서 내게 전후 사정을 알아 봐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오늘 최 형을 다방에서 만나자고 하여 사연을 들어 봤다네. 기가 막히더군.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가...( 같이 온 사람을 쳐다보며) 최 형이 아까 다방에서 했던 이야기를 이 친구에게 다시 한번 소상하게 이야기 해보슈.
영민: (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떨구고 있다.) 다름이 아니고 제가... ( 말을 더듬거린다.)
귀식: ( 상대의 어려움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여유 있는 표정으로) 아까 형철이 한테 전화로 이야기를 대충 들어서 알고 있소. 걱정하지 말고 내게 전후 사정을 말 하시오. 모든 정황을 숨김 없이 이야기해야 내가 돕든지 할 수가 있소.
영민: ( 계속 고개를 떨군 채)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한가한 마음으로 TV를 보고 있는데 전임지에서 함께 근무했던 옛 동료 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하더라구요. 자기 친구들과 심심풀이로 화투를 치고 있는데 같이 와서 놀 생각은 없는 지를 묻더라구요. 원래 내가 바둑도 제법 뒤고 승부 욕도 강해 한 번 빠지면 쉽게 털고 일어서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꽤 자제하는 편인데. 평소에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 내기 화투도 자주 치는 편이구요. 그런데 그 날 저녁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옛 동료의 전화가 반갑기도 하고 노는 걸 마다 하지 않는 성격이라 별 의심없이 같이 어울렸지요.
귀식: 그 자리에 몇 사람이나 있었소? 전부 아는 사람들이었나요?
영민: 옛 동료 외에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는데, 다섯 사람들이 먼저 와서 놀고 있었어요. 모두가 점잖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구요.
귀식: 그 사람들끼리는 서로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던가요?
영민: 저희들끼리 서로 박 사장, 오 사장하는데 처음엔 몰랐는데 여러 번 어울리면서 그 두 사람들과 옛 동료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란 걸 눈치 챌 수가 있었어요. 나머지 두 사람들은 나처럼 거기에 불려 나온 사람들인 모양이었어요. 결국 그 두 사람 역시 나처럼 돈을 잃은 걸로 볼 때 말이요.
귀식: 그 사람들 이름 기억이 납니까? 혹시 무심결에라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진 않던가요?
영민: 잘 모르겠는데요. 가만 있자.... 박 사장이라는 사람하고 그 중에 한 사람 이름이....음...오 사장이라는 사람...두만... 그래요, 오 두만이란 사람이에요.
귀식: ( 낭패스런 표정을 지으며) 저런, 아주 질이 나쁜 애들한테 걸려 드셨군요. 잃은 돈을 찾을 생각은 버리세요. 걔들 이미 그 돈 남아 있지도 않았을 거요. 생활이 궁한 애들이라 그날그날 번 돈 나눠서 이미 다 써 버렸겠소. 그런 사람들하고 놀면서 사기 도박하고 있단 생각을 조금도 못했단 말이요?
형철: 돈은 얼마나 어떻게 잃었는 지 이 친구한테 이야기 해 보구려.
영민: 처음엔 백에 천원짜리 삼봉을 치기 시작했어요. 밤새 내내 놀아 봤자 돈 십만원 미만이겠더 라구요. 내가 전혀 화투를 못치는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들 말이 서로 따 봤자 용돈 보태는 것 아니고 그저 술이나 한 잔 마실 돈이나 만들어 보자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첫 날 헤어질 때 보니까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밤새 내내 화투치고 아침에 딴 돈을 담아 가지고 그냥 헤어졌는데. 백에 천원 짜리 삼봉인데 제법 깨졌어요. 나도 잃었고 또 한 사람도 제법 잃었어요. 그래도 하룻밤 재수 없는 일이겠거니하고 잊어 버리려고 노력했는데...
형철: 그랬는데요?
영민: 옛 동료가 이틀 후에 다시 전화를 했더라구요. 지난 번 안 됐다며 돈 좀 두둑이 가져 오라고 하더군요. 이번엔 자기가 옆에서 화투 치는 걸 거들어 주겠다면서요. 지난 번 일이 자꾸만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좋아 사내 새끼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쑤셔 버려야지" 하면서 다시 그가 오라는 집에 갔지요.
귀식: 그날도 같은 사람들이 모였나요?
형식: 예, 아니, 한 사람만 바뀌었더군요. 나처럼 불려 와서 별로 잃거나 따지도 안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안보이더군요. 나 보다 돈을 더 잃은 사람은 왔었어요. 그리고 우리 또래, 그러니깐 사십대 여자들이 두 명 왔었구요.
귀식: ( 혼잣말처럼) 혼성 도박을 하셨군. 화투치면서 전혀 이상한 것을 못 느꼈나요?
영민: 아뇨, 전혀. 나도 제법 화투를 치는 사람인데...
귀식: ( 비웃는 투로) 그러면 아직도 왜 돈을 잃었는지를 모른단 말이요? 힘차게 화투를 두들긴다고 잘치는 줄 아시오? 그 여자들은 어쨌나요?
영민: 그 여자들도 보통은 아니던데요. 하지만 별 수 있었겠어요?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 였어요.
형식: 그 여자들도 호구들이었구먼?
귀식: ( 형식을 흘낏 쳐다보며) 그런 이야기 처음 들어? 이혼한 여자들이나 남편이 멀리 나가 있 어 할 일 없으니 화투 손댄 여자들이지. 그런 여자들 돈 잃고 몸 망치고 신세 좆았단 말 못 들었어? 이 친구 정말 순진하기는... ( 영민을 향해) 계속 이야기해 보세요.
영민: 그 여자들이...
귀식: 그 여자들 이야기 말고, 당신 돈 잃은 이야기부터 먼저 하세요.
영민: 옛 동료가 그날 밤은 저를 제법 거들어 줬어요. 그 날 밤은 제법 돈을 땄다구요.
귀식: ( 혼잣말처럼) ?시밥을 던져 줬군. 계속 백에 천 원 짜리를 쳤소? 그런 정도 쳐 가지고는 내게 찾아 올 정도만큼 잃지는 않았을 텐데...
형식: ( 영민을 쳐다보며) 최 형,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래야 해답이 나올게 아니요?
영민: 사람 심리란 참으로 묘하더군요. 백에 천원 짜리도 무서워하던 내가 이 오장 아니 막판에는 오 이 십장까지 쳤어요.
형식: ( 어리둥절하여) 그게 무슨 소리요? 이 오장이라면 화투를 못 치고 들어 갈 때
는 이 만원 칠 때는 백에 오만원 짜리 인데. 오 이 십장이란 또 무슨 말이요?
귀식: ( 한심스럽다는 듯 형식을 쳐다보며) 이 친구야, 오 만원 이십 만원 짜리 쳤단 말 아냐! 돈 많은 놈들 노는데 비하면 그 정도는 약과지.
형식: 이 사람은 월급쟁이란 말일세. 월급 받아 그 달 살아가기도 빠듯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큰 도박을 할 수가 있어? 많은 돈이 깨졌겠는 걸. 아까 내게는 그런 말 안 했지 않소?
영민: ( 고개를 숙이며) 부끄럽고 창피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소? 솔직하게 말하라고 해서 겨우 말한 거라우.
귀식: ( 형식을 향해) 자넨 가만있어 봐, 그래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그 친구들이 돈을 올려 치자고 한 거군요?
영민: 내가 미쳤지... 처음엔 이 오장도 무섭더라구요. 화장실에 가서 서 있으면 이렇게 놀고 있는 게 과연 나인가 싶더라구요. 하지만 막상 화투를 치고 있으면 바닥에 굴러 다니는 게 돈 같지가 않던데요. 잃을 땐 겁이 좀 났다가도 다시 내가 화투에 이겨서 상당한 돈이 들어 오게 되니깐 금방 보통이 되더라구요. 한 마디로 그런 일에 익숙해져 버린 거죠. 집에 와서 누워 있으면 그때서야 내가 얼마나 큰 도박을 하고 있는지 실감이 가는데..
형식: 미쳤구먼...
귀식: 이 오장을 쳐서 결과는 어쨌나요?
영민: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둘째 날은 내가 제법 돈을 땄지요. 아침에 출근하려고 화투판에서 일 어 서는데 옛 동료가 따라 나오면서 자주 만나자고 하더라구요. 심심찮게 용돈 벌어 쓰는 재미가 어떠냐면서요... 그 날은 집에 오면서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델 발붙이지 않아야 겠다고 맹세를 했지요. 집에도 못 들어가고 직장에 출근하자니 마누라와 자식들한테도 면목이 없고 하더라구요. 그때 들은 이야기인데 옛 동료는 직장을 그만 두었다고 했어요. 무슨 일로 그만 뒀냐고 물으니 그냥 웃기만 하더라구요. 지금은 뭘 하느냐고 물었더니 친구들과 합자로 조그만 사업을 한다나요? 그런데 시간이 많아 저녁이면 친구들과 심심풀이 화투를 친다는 거예요. 다음에 부를 땐 좋은 친구가 있으면 함께 오라는 거였어요.
귀식: 호구들을 확보하겠다는 말이로군. 그날은 누가 돈을 잃었나요?
영민: 여자 중에 한 사람이 잃고 나처럼 불려 온 호구가 조금 잃고, 그리고 오 사장이 제법 잃었어요.
귀식: 일곱 사람이 다 칠 수가 없었을 텐데요?
영민: 박 사장은 화투를 안쳤어요?
귀식: 그럼 그 사람은 뭘 했소?
영민: 돈을 제법 가지고 와서 돈 떨어진 사람들에게 이자놀이 하던데요.
형식: 그냥 돈을 빌려 줬어요?
귀식: ( 형식을 쳐다보며) 이 친구야 그게 뭔지 몰라? 고리 끼라는 거야. 패거리 중에 한 놈은 고리 대금을 한 거야. 백 만원에 십만 원씩 선이자 떼어 갔죠?
영민: ( 놀란 표정으로) 맞아요, 그랬어요. 돈을 빌려 갔던 사람이 운이 좋아 돈을 따게되면 돌려 받아 잃은 사람에게 선 이자떼고 돈 빌려 주고. 가만 보니 우리들은 데라 돈 벌게 해주는 일꾼인 셈이더군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뙈 놈이 받는다는 말 있쟎수?
형철: 최 형도 그 작자한테서 돈을 빌린 거요? 그래서 빚을 진 거군요?
영민: ( 고개를 떨군다.) 직장에까지 돈을 받으러 왔더군요.
귀식: 공무원들은 얼마 짜리 인 줄 아세요?
영민: ......?
귀식: 우리 세계를 가리켜 라인 계라고 한다구요. 라인 계에서 통하는 말로는 공무원들은 우리들 밥이라고 하지요. 공무원들에게 오백에서 천 만원까지는 묻지도 않고 꿔 주는 게 우리 라인계의 상식이죠. 공무원인 사람이 어디로 튀겠소. 또한 퇴직금으로 부어 넣는 돈이 있는데. 돈 꿔 주고 선 이자 떼고 갚기로 한 날 안 가져오면 직장으로 몇 번 전화하고 그래도 돈 안 가져 오면 직장으로 ?아간다고 큰 소리 치고 그게 다 공식이랍니다. 직장에 소문날까봐 벌벌 기며 돈을 가져오게 돼 있다구요. 그래서 공무원들은 우리의 호구라니깐요.
형철: 그래도 안 가져오면?
귀식: ( 씩 웃으며) 그래도 안 가져오면? 직장으로 찾아가지. 여러 사람 있는데서 언제까지 돈 갚을 거냐고 한 번만 큰소리치면 제까짓 놈이 어디로 가겠어? 안절부절못하는 꼬락서니를 한번 상상해 봐.
영민: 저도 그런 일을 한 번 당했어요. 세 번째 갔을 때 돈을 많이 잃었거든요. 내 자신이 환멸스럽고 해서 한 동안 뜸했는데 처음엔 옛 동료한테서 직장으로 전화가 걸려 왔더라구요. 왜 놀러 오지 않느냐면서 박 사장이 기다리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도 안 가니깐, 사실 빚진 돈을 마련 할 방법이 없어서 못 가기도 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우락 부락한 몇 사람들이 직장에 찾아 와서 다짜고짜 나를 만나자는 거예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박 사장이 보냈다고 하면서 목 소리를 크게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날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 같았어요. 사정사정해서 돌려 보냈는데 그 뒤로 얼마의 돈을 마련해 가지고 도박장에 갔어요. 이번엔 정말 화투칠 생각은 아니었는데... 뜻밖에도 박 사장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지난번엔 돈이 좀 급해서 그런 것 뿐인데 오해를 하지 말라더라구요. 옆에서 옛 동료가 박 사장을 나무라면서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할 테니 자주 놀러 오라는 거였어요. 그 날도 가져간 돈을 받지 않을 테니 그 돈으로 놀라는 거예요. 따면 갚으라면서요. 돈을 보니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게 되나요. 한번만 잘 되면 금방 돈을 갚아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형철: 그래서 그 날도 한판하셨다 이 말씀이군요.
귀식: 화투 치면서 그들이 어떤 속임수를 쓰던가요?
영민: 전혀 눈치를 챌 수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사기를 당했다는 짐작은 가는데 무슨 속임수 를 썼는 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요.
귀식: ( 형철을 향해) 내가 전화에서 말했던 대로 화투 한모 가져 왔어?
형철: ( 영민을 쳐다보며) 사 가지고 온 화투 드리세요.
영민: ( 양복 상의 호주머니에서 화투 한 모를 끄집어 내어 귀식에게 건네준다.) 여기 있습니다.
귀식: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신이 사기 당할 때 이런 화투로 쳤소? 이렇게 엷은 화투로 말이요? 건달 세계에서 사용하는 화투는 두터운 화투를 사용한답니다. 그래야 여러 장난을 할 수가 있으니깐. 이것 가지고도 장난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영민: (얼굴이 붉어지며) 맞아요. 그 친구들 언제나 두터운 화투를 사용했어요, 이제 생각해 보 니....
귀식: (화투패를 이리저리 솜씨 있게 섞으며 ) 당신은 화투에 대해 까막눈이구먼.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누구 돈을 따먹겠다고 그런 델 다니셨수? 전혀 그들이 뭘 했는 지를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죠? ( 섞어 가던 화투를 영민 쪽으로 밀어 주면서) 당신 마음대로 화투를 개서 쳐보시오. ( 영민은 귀식이 시키는 대로 화투를 개어 힘차게 쳐 댄다.) 다 쳤으면 이리 주시오. ( 귀식이 다시 화투를 몇번 친 후에 영민을 향해) 한 번 띠어 보시오. 아무 대고 당신이 원하는 데로. ( 영민은 그가 시키는 대로 무작위로 화투를 띤다.) 자 잘 보시오! 이것은 바닥패, 이것은 당신 패, 이것은 .... 이것은 내 패, 자 패를 다 나누었오. 내 패를 한번 뒤집어 보시오 뭐가 들었는지... 송학 석 장이 들어 있을 것이요. ( 영민과 형철은 귀식의 패를 집어 보고 송학 석 장이 그의 화투 패에 들어 있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어째서 이렇게 됐는 지 알겠소?
영민: 모르겠는데요.
귀식: 아까도 말했지만 화투는 힘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화투를 나누면서 힘을 쓰던가요? 팔에 힘을 빼고 가볍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하지 않던가요? 이것도 일종의 예술입니다. ( 자신의 말에 자신이 도취된 듯) 난 형제가 많아 학교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우연히 이 방면의 선배를 만나게 되었소.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되었으니 무척 어린 나이었소. 화투 기술이란 게 그렇게 많은 게 아니오. 몇 가지 안되는 기술이지만 상대를 속여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하오. 화투판에서 만약 속임수를 쓰다가 발각된다고 생각 해봐요. 이건 프로 정신이 필요하다구요. 그래서 난 몇 가지 기술과 선배님, 아니 사부님이라 해야 맞겠지, 그 분의 화투 철학 경험담을 가슴 깊이 새기고 조용한 시골에서 거의 1년에 걸쳐 기술을 연마했소. 그 기간엔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어떤 화투판에도 끼어 본 적이 없었소. 완전히 기술을 연마할 때 까진.... (화투 패를 섞다가 영민 에게 밀어 주며)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앞서와의 똑같은 동작이 반복된다.) 이번엔 당신 패를 까 보시오. 비가 석 장이 들어 있을 것이요. 전혀 이상한 걸 못 느끼겠소?
영민: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전혀 모르겠는데요.
형철: 최 형에게 한 가지 기술만이라도 보여 드리게. 그래야 모르는 사람들과 화투를 안치시지, ( 영민을 바라보며) 안 그래요?
귀식: 돈을 많이 잃었다니깐 한 가지 기술만 보여 주겠소. 누구에게도 안 보여 주는데...( 화투를 집어서 패를 나누는 동작을 하면서) 기술자들이 화투를 칠 때는 패를 치는 소리부터가 다르답니다. 몇 번 치느냐에 따라서 어떤 패가 어디로 올라가고 내려가느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요. 어떤 땐 패를 치는 척 하면서도 전혀 패를 치지 않는 경우도 있소. 자 보시오! 패를 당신이 원하는 아무데를 띠어도 그건 전혀 상관없는 일이요. 내가 필요한 패들이 어디에 있는 줄 난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만 속이면 되니깐요. 바로 이 표를 갖고 싶다. 그걸 순간 바꿔쳐서 내 손에 들어오게 하는 거요. 이 동작에 불과 0.3초도 안 걸리는 거요. ( 다른 사람에게 화투 패를 오른 손으로 나눠주면서 자기 패를 나누기 직전 짧은 순간에 왼 손에 들고 있던 화투 패의 아래 부분의 화투 몇 장이 윗 부분으로 올라와 버린다. 극히 짧은 순간에 이 행동이 이루어져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다. 형철과 영민은 감탄의 눈빛으로 귀식을 쳐다본다.) 이런 동작을 위해서 팔에 힘을 빼야 하는 거요. 힘들여 치는 사람들이 초보자라는 걸 이제 알겠소. 우리는 며칠 밤을 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라도 화투에다 힘을 들이는 따위의 헛수고는 안해요.
형철: ( 영민을 바라보며) 그 사람들도 최 형에게 이런 속임수를 썼을 텐데. 뭣하러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단 말이요? 그래서 돈은 얼마나 잃었소?
영민: ( 고개를 떨구며) 이 천만원 정도 될 겁니다.
형철: 그런 돈이 어디 있었소?
영민: 은행 빚을 내서 갚았죠. 지금도 옛 동료한테서 전화가 가끔씩 걸려 와요. 빚을 갚고 나서는 거의 전화를 회피 버리긴 합니다만...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형철: 그런 사람을 옛 동료라고 하지도 마시오. 사기꾼 아니오? ( 귀식을 쳐다보며) 그 돈 중에 일부라도 찾을 수 없을까? 자네가 가서 말하면 얼마라도 되돌려 주지 않을까?
귀식: ( 고개를 흔들며) 우리는 얼굴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서로의 이름이나 별명은 알고 있지만. 걔들은 질이 나빠서 우리 라인 계에서도 고개를 흔드는 놈들이지. 나야 이 계통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오래 되어서 얼굴이 많이 알려졌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내 본명을 거의 모르지. 오째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긴 하지만... 걔들은 내 얼굴을 모를 거야. 별명을 들으면 알 테지만. 하여튼 액땜했다 치고 그 돈은 포기해야 할 걸. (영민을 향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잃었소?
영민: 처음 갔을 때 두 사람, 지금 생각하니 호구들인데, 그 사람들도 나와 거의 비슷하게 잃었어 요. 여자 한 사람도 제법 돈을 잃고... 걔들은 화투를 안칠 때는 여자들을 자기네 애인처럼 데리고 다녀요. 아무 때고 나오라면 나오고, 불쌍해서 못 보겠어요. 그 중에 한 여자는 그래도 어떻게 잘 빠져나갔는데, 다른 여자는...
형철: 신세 망치는 경우도 여러 가지 군. ( 영민에게) 돈을 되돌려 받기는 틀렸다니 아예 최 형이 화투 기술을 배우시오. 단번에는 아니더라도 조금씩이라도 벌어 지금까지 잃은 걸 보충해야 되지 않겠소? ( 귀식을 향해) 여보게 친구, 최 형에게 화투 기술을 가르쳐 드리게. 기술은 몇 가지 안된다면서. 본인이 집에서 그 기술 연마를 하면 될게 아닌가?
귀식: 화투로 성공한 사람 봤나, 이 사람아. 그렇담 내가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진작 부자가 되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난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 아무리 돈이 생기는 자리라도 욕심을 부리지 않네. 적당하게 따고 일어서지. 그리고 젊어서는 난 기술자로만 만족했어. 내가 직접했으면 감옥에 여러 번 갔을 걸세. 기술자로 판에 붙으면 설령 걸려도 돈 댄 놈들이 뒤에서 다 해결을 해 주거든. 화투 만지는 놈 치고 말로가 좋은 놈 하나 없다네. 그래도 화투 기술을 배울거유?
영민: ( 머뭇거리다가) 기술을 배워 두어서 손해될 건 것 같군요. 남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라도....
형철: 그렇게 해 주게. 최 형이 기박을 너무 좋아해서 날을 새는 경우가 많다네. 이걸로 돈을 번다기보다는 본인이 앞으로 남에게 속지 않기 위한 예방책이라고 생각하고 제발 가르쳐 드리게.
귀식: 좋아요. 내일 저녁부터 저의 집에 오시오. 자주 올 필요는 없어요. 한 가지 기술을 가르쳐 드리면 본인이 그걸 한, 두 달 열심히 연습해야 하니깐. 그렇게 하실 수 있겠소? 그렇지만 난 선생께서 도박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우. 이건 순전히 방어용으로 배우시는 겁니다. 허 허 허.
영민: 고맙습니다!
형철: 고마우이! ( 영민을 향해) 열심히 배워 두시오. 내가 인생살이의 좋은 스승 한 사람 소개한 걸로 아시오 그려.
( 조명이 어두워진다.)
장면 II
8개월 후의 어느 오후, 장면 I과 같은 장소.
(장면 II는 장면 I과 장면 III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정도여서 극히 짧게 구성되어 있다. 장면 I에서 처럼 형철, 영민이 귀식의 집에 와서 그와 함께 아파트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귀식: ( 영민을 향해) 전화가 걸려 왔다구요?
영민: 그 동안 그 사람들을 피해 왔는데 요즘 전화가 자주 걸려 와서요.
귀식: 이제 어느 정도 숙달됐으니 한 번 붙어 보겠다 이 말씀이요?
형철: 그 동안 연습하는 걸 쭉 지켜봤는데 이젠 화투 패가 손에 착 달라붙던데. 속임수도 거의 눈치 못 챌 정도이고. 이제 한 번 실전에 참가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혼자서 나가는 게 마음이 안내키면 자네도 같이 가는 것이 어때? 저렇게 연락이 자주 온다는데. 저 사람들은 최 형이 화투 기술을 연마하고 있는 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데.
귀식: 내가 화투 기술을 가르쳐 줄 때는 꼭 그 사람들과 붙어 보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초보자들 하고 심심풀이로 놀면서 용돈이나 약간씩 벌어 쓰라는 거 였는데. 그리고 남들과 놀면서 속지나 말라는 뜻이었는데.
형철: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얼마나 잃었는데.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야 얼마나 간절했겠나. 자네의 허락이 없으니 그들과 안 어울린 것 만해도 얼마나 대견한가. 자네 몰래 거기 다닌다 해도 자네가 알 턱이 어디 있겠나? 저 놈들이 저렇게 성화인데. 좋은 방법을 한 번 연구해 보는 게 어때?
영민: ( 애원하는 어조로) 원래 배울 땐 이거가 아니었지만 딱 한 번만 허락해 주시오! 그 놈들이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가 갈려서 그런 답니다. 이 번 한 번만 허락해 주시오. 오늘도 여러 차례 전화를 했더라구요.
귀식: 오늘 하루에 승부가 날 것 같소? 저 사람들 돈을 따려면 6개월이 걸릴 지 아니면 1년이 걸리지 모르는 일인데. 아니면 되레 저쪽에게 되 물릴지 어떻게 알겠소?
영민: 그러니 방법을 연구해 달라는 것 아닙니까?
귀식:( 한참을 생각하더니) 저 쪽도 꾼은 한 사람일 거요. 당신 옛 동료는 바람잡이가 분명하고. 박 사장인가 하는 친구는 데라 노릇을 할거고. 나머지 모이는 사람들은 호구들이고. 문제는 세 사람인데. 별로 승산이 없는 싸움이요. 꾼들 끼리 모여서 치는 판이 무슨 승부가 나겠소? 서로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니 말이요.
형철: 그러면 사기 도박으로 돈을 잃은 게 뻔한데 벙어리 냉가슴만 앓으란 말인가? 이쪽에도 사람이 있다, 그러니 너희들 옛날 먹은 돈 모두 기어 내놔라, 뭐 그런 방법 없을까? 아니면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귀식: (빙긋 웃으며) 당사자도 아닌 자네가 더 난리로군. 자네가 꼭 돈 잃은 사람 같네 그려.
형철: (겸연쩍은 표정을 하며) 정의감 때문이라 할까? 생각해 보게. 옛날 함께 근무했던 사람을 불러서 돈을 따먹는 놈이 얼마나 얄미운 지. 그런 놈은 천벌을 받아야 해. 내가 자네 같은 기술이 있다면 그런 놈을 가만 안 뒀지. 진즉 작살을 내고도 남았을 걸세.
귀식: 그래,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한 판 붙다가 보면 그 쪽에서 협상이 들어 올 수도 있지. 어차피 내가 뛰어 들어야 하겠는 걸. 최 형 혼자서는 승부가 없어요. 몇 시에 어디로 오라고 합디까? 오늘이 토요일 오후이니깐 내일 모레 그래서 월요일 아침까지 붙겠는 걸. 야통을 할려면 체력이 뒷 바침이 되어야 하는데. 그 때까지 버텨 낼 자신이 있소?
형철: 걱정 말게. 최 형은 바둑으로도 하룻밤 쯤은 끄떡없는 걸 여러 차례 봤다네.
귀식: 그럼 됐네. 문제는 돈인데...
영민: 그럴 줄 알고 사 백만원 마련해 왔는데요.
귀식: (씩 웃으며) 준비가 철저하시군. 그럼 전화하시오. 두 사람이 간다고.
형철: 왜 두 사람이야? 나까지 세 사람이지!
귀식: 자네도 간다고? 자네는 화투를 못 치지 않아?
형철: 그런 인간들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 지 얼굴이나 봐 두려고. 난 화투는 안칠 걸세. 자네가 그 놈들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걸 한번 보려고 그러네. 내 원 좀 들어주게!
귀식: 그럼 자넨 오늘만 데리고 가는 거야. 그런데서는 화투 안치고 있는 사람을 제일 경계한다네. 화투치러 왔는데 상황이 별로 안 좋아서 치지 않고 있는 사람쯤으로 해 줄 테니 조금 앉아 있다가 금방 가라구! 내 말 알겠어?
형철: (신이 나서) 알았어. 데리고만 가 주게!
귀식: (영민을 향해) 사 백만원 이리 내 보시오. 이 백 만원씩 넣고 갑시다. 최 형은 내 왼 쪽에 앉으시오. 내가 화투 패를 밀어 주는 대로 만 띠시오. 작업은 내가 주로 할 테니. 좋은 패를 밀어 줄 테니 돈 따는 것은 최 형이 주로 하시오.
영민: (호주머니에서 백만원짜리 지폐 뭉치를 네개 꺼내 놓는다. 그 중에 두 뭉치를 귀식에게 건네 준다.) 여기 있습니다. 이 백만원씩 가지고 치자 그 말씀이군요!
귀식: (전화기를 가리키며) 우연히 친구들 둘하고 다방에 앉아 았는데 데리고 가도 되겠느냐 고 물어 보시오! "호구들 걸렸구나" 하고 좋아 할거요. 거기에서 놀 때는 내 이름은 절대로 부르지 마시오. 그냥 김 사장이라고 만 하시오.
영민: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전화기 쪽으로 걸어가서 번호를 누른다. 한참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 여보세요. 안녕 하세요. 저 최 영민인데요. 사람들 얼마나 모였나요? 나하고 평소에 장난 내기하는 화투 친구들과 같이 있는데 같이 갈께요. 뭐하는 사람들이냐구요? 사업하는 사람들인데요. 두 사람인데요. 한 친구는 화투를 잘 못쳐요. 그래도 알아요? 그런 친구들이 한 번 취미 붙이면... 그런 친구들이 더 좋다구요? 예, 돈 많이 있는 친구들이예요. 예, 금방 갈께요.
( 전화기에 대고 말하는 도중에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장면 III
같은 날 오후 5시 경, 어느 아파트
(귀식 일행이 아파트 현관에 들어선다. 이미 다섯 사람이 모여서 소파에 앉아 있다. 그 중에 여자 한 사람도 보인다. 소파의 탁자 위에는 맥주 몇 병과 안주가 놓여 있다. 그들은 이미 술을 마신 얼굴을 하고 있다. 귀식 일행이 들어서자 영민의 옛 직장 동료로 보이는 사람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신 듯 비틀거린다.)
영민: 안녕하시오, 조 형!
민석 (영민의 옛 동료의 이름이다.): 어서 오시오. 얼마나 기다린 줄 아시오? 우리들 끼리 시작하려다가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최 형이 빠지면 쓰겠소? ( 귀식과 형철을 쳐다보며) 이 분들 이 친구들이라고 했소? 인사나 합시다. 난 조 상무라고 합니다. 조그만 회사의 상무를 하고 있는 사람이요. (귀식과 형철에게 악수를 청한다.) 앞으로 자주 만납시다. 시간 보내는데 화투 보다 더 좋은 소일거리가 어디 있겠소? 인생살이 재미있게 살아야지 안 그렇소?
영민: (귀식을 가리키며) 김 사장이란 분이요. 조그만 자영업을 하는 분인데 나하고 심심풀이 내기를 자주 하는 분이요. 이래봬도 재력이 상당한 분이요. ( 형철을 가리키며) 이 분은 허 선생님이신 데 공무원이랍니다. 허 과장님이라고 부르세요. 바둑은 제법 두시는데 화투는 잘 모르는 분이랍니다. 요즈음 화투도 재미있는 것 같다면서 우리와 어울리기 시작한 분이요. 화투는 한참 더 배워야 할거요.
민석: ( 비틀거리면서) 하여튼 앉읍시다. 노는 걸 태어나면서 배운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직장 때 려 치우고 상당 기간 놀면서 조금씩 배운 것이 이제 취미 생활이 되어 버렸답니다. 허 과장님도 앞으로 잘 사귀어 봅시다. ( 귀식 일행과 먼저 와 있던 사람들간에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한참 진행된다. 인사가 끝나고 민석이 소파의 탁자 위에 놓인 맥주를 딸아서 귀식 일행에게 권한다. 민석이 갑작스럽게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한다. 귀식은 이런 행동 모두가 의도적인 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귀식: 화투 칠만한 숫자는 다 모인 것 같은데요. 저기 아름다운 숙녀 분도 함께 놀 손님이신가요?
혜정: 나를 여자로 생각하고 놀지 말아요. 오늘 분위기 좋으면 다음엔 친구 한 두 사람 더 데려 올 거예요. 아무튼 남자들 속에 여자가 끼었다고 생각 않고 놀기로 합시다. 나도 산전 수전 다 겪은 여자라구요.
형철: 이런 데서 미인을 만나 뵈니 영광입니다. (모두가 웃는다.)
민석: 오늘 내가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은 모처럼 손님들이 좋아서 입니다. 모두 신사들이시고 (혜정을 가리키며) 숙녀 분을 이렇게 만났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정말 반가운 소식은 내가 어디서 돈이 좀 생겼는데 내 돈 좀 따 잡수시라 이겁니다. (호주머니에서 통장을 끄집어 내보이며) 이 통장에 얼마가 들어 있는 줄 아시오? 천 만원이 들어 있어요. 누가 내 돈 좀 따 먹었으면 좋겠어요. 자 보시오! (그가 더욱 비틀거리며 취한 채 한다. 그가 주변 사람들 눈 앞에 통장을 펼쳐 보인다.) 자 보았지요? 눈 먼 돈도 못 따먹는다면 바보 천치들이요. 한 판 놀아 봅시다. 이 돈 말고도 필요하다고 연락만 하면 언제든지 몇 천만원 쯤은 금방 가지고 올 사람들이 줄 서 있소. (그가 맥주를 따라 들이킨다.) 아이쿠 취한다. 취한 놈 돈 못 따먹는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 안 그래 옛 친구?
영민: 그럼 시작합시다. 수가 남는데 두 판은 벌려야 겠구먼...허 과장은 오늘 구경만 하시오. 사람이 부족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들 모였으니...
형철: (고개를 끄덕인다.) 좋소, 난 구경만 하다가 가겠소.
혜정: (빙그레 웃으며) 치다가 교대합시다. 모처럼 좋은 손님들이 오셨는데...(모두가 깔아 놓은 방석 주변에 모여 앉는다. 귀식의 왼 편에 영민이 앉는다. 형철과 민석이 뒤로 빠진다.)
영민: (민석을 향해) 어째서 뒤로 빠지는 거요?
민석: 난 취해서 조금 있다가 치려구요.
영민: 자기 돈 따먹으라고 통장 자랑할 때는 언제고 정말 꽁무니를 빼기요?
민석: 조금 구경하다가 치겠다는 뜻이지 다른 의도는 없소. 하여튼 먼저들 시작하시오. ( 그가 시계를 흘낏 쳐다본다.)
형철: 누가 또 오는 거요? 시계를 다 쳐다 보시고.
민석: 예, 한 사람 더 오기로 했소. 그 사람도 이 자리에 끼면 좋을 것 같아서 오라고 했소.
영민: 누군데 그러시오? 내가 모르는 사람이요?
민석: 아 그렇지, 최 형은 아는 사람이요. 오 사장이라고.
귀식: (흘낏 영민을 쳐다본다. 그리고 영민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물어 본다.) 오 종만이가 온단 말이죠? 걔가 기술자로 온단 말이로군? 이제 통빡이 드러나는 군. 당신 옛 동료는 바람잡이에 이제 온 오 사장은 기술자, 그런데 데라는 누구요? 돈놀이하는 친구 말이요? 박 사장인가 하는 친구가 안 보이는데.
영민: 그렇군요. 그 사람이 오늘은 안 보이는데요. 이 친구들하고 틀어졌나 본데요. 저 친구가 통장 자랑을 하는 걸 보니.
민석: (의심하는 눈빛으로) 두 분이 무얼 그렇게 수군대고 있소?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소?
영민: 허 과장 이야기를 했소.(형철을 쳐다보며) 저 양반이 심심할 것 같아서...
민석: (초조하게 시계를 쳐다본다. 그러다가 형철에게 맥주를 따라 준다.) 인생이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 말이요. 그걸 유식하게 말하자면 공수래 공수거라고 하던가요? 나도 한 땐 인생 설계가 거창했는데. 이렇게 사는 내가 가끔씩은 답답하다는 생각도 든답니다. 허 과장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돈 좀 모아 둔 것 있소? 남들이 권할 때 땅이라도 좀 사 놨으면 지금쯤 큰소리치고 살텐데. 허 과장님은 어떻소?
영민: 저 분은 유산받은 땅도 많고 지금 꽤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산답니다.
민석: (두 눈이 반짝인다.) 우리 자주 만납시다. 있는 돈 좀 쓰고 살으시구려. 갖은 사람들이 돈을 좀 풀어야 우리 같은 사람들도 숨 좀 쉬고 살 수가 있지요, 안 그렇소? 조금 있다가 저 쪽에 한판 벌려 줄테니 놀다 가시오. 아까 내가 천 만원 자랑한 것은 우리가 꼭 그렇게 큰 도박 하자는 뜻이 아니라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 말고 놀다가란 뜻으로 한 말이요. 돈이 없으면 언제든지 말만 하시오. 필요할 땐 내가 언제든지 빌려 줄테니. 돈 없이도 언제든지 오셔도 좋소. 그리고 일행들과 함께 올 필요도 없어요. 여자 분들도 고정 맴버가 있어요. 화투치고, 재수 좋으면 재미도 보고. 허 과장님은 미남이겠다. 애인 있소? 없을리 없지. 그래도 필요하면 내게 이야기 하시오. 내가 근사한 여자 한 사람 소개해 줄 테니. 인생을 그렇게 고달프게 살 필요가 없더라구요. 그렇게 살아 봤자 마누라가 알아줍디까? 자식들이 알아줍디까? 잘 해 주면 그게 당연한 걸로 알더라니깐요. (맥주를 따라서 건네준다.) 자 한 잔 쭉 들이키시오. 개 떡 같은 세상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맙시다, 안 그렇소? (화투 치고 있는 귀식을 흘낏 쳐다보며 형철에게) 저기 김 사장도 돈 많게 보이는 데... 무슨 사업을 하신 답니까?
형철: 언제 얼마나 돈을 모았겠소? 다 고만 고만 하게 살고 있다오. 그렇다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정도는 아니랍니다.
민석: 그래도 주 업종이 있을 것 아닙니까?
형철: 큰 업체에 납품는 사업한다는 정도로 알아 두시오. 밥은 먹고 살 정도는 되지요.
민석: (귀식에게 말을 건넨다.) 김 사장, 화투 스타트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다 비슷비슷하니 마음 놓고 치세요. 너무 긴장하셨나? 김 사장님 자주 놀러 와요. (맥주를 딸아 권한다.) 한잔 쭉 들이키시오. 술을 마셔야 배짱이 생기는 법이요. 세상을 너무 긴장하며 살다보면 배짱이 없어지는 법이요. 제발 우리 남자들 기 좀 펴고 삽시다.
혜정: 나도 한 잔 주시오. ( 따라 주는 맥주를 마시고 그녀가 그 잔에다 맥주를 다시 채워 영민에게 권한다.) 남자들이 기를 못 피고 산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 아니오? 이 나라 같이 남자가 살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이요? 남자들은 제 마음대로 해도 아무 죄가 안 되고, 여자가 한번 실수하면 가정이 파산되고. 이게 남녀 평등 사회란 말이요?
영민: 사모님께선 이혼이라도 당했수?
혜정: 그런 건 묻지 맙시다. 심사가 괴로우니. 오죽하면 화투 치면서 인생을 보내겠소? 어쩌다가 이런 인생이 되어 버렸는지...
민석: 세상을 재미있게 살작고라고 내가 말 안합디까? 그냥 바람 부는 데로 물결치는 데로 삽시다. 인생살이 살아보니깐 별 것 아닙디다.
혜정: 상무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살았다고 인생이 어떻고 하는 거요? ( 밖에서 벨 소리가 울린다. 모두가 순간 긴장을 하며 문 쪽을 바라 본다.)
민석: (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드디어 오는 모양이군! (그가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 간다.) 어서 오시오. 온다고 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 나타나는 거요? (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를 한다. 그들은 귓속말을 서로 주고 받는다. 다시 화투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전개된다.)
영민: 오랫만이요, 오 사장!
두만: 그 동안 무슨 일 있었소? 오랜만에 만나게 되다니. 최 사장이 어디 먼 나라로 이민 가 버린 줄 알았소.
영민: (민석을 가리키며) 가끔씩 저 친구를 통해서 모두의 안부는 알고 있었소. 그 동안 별고 없으셨죠?
두만: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바쁘답니다. 어디 나도 들어 가 시작해 볼까? 얼마 짜리하는 거요?
영민: 이 오장이라우.
두만: 이래 가지고 무슨 승부가 나겠소? ( 그 순간 민석이 보내는 눈빛에 알았다는 듯) 좋소!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 합디다. 이런 날은 예쁜 애인하고 방구석에 쿡 쳐 박혀 재미나 실컷 봐야하는 건데... 손님들이 너무 좋다고 해서. 권하는 장사 맡지지 않는다고 해서 말이요. (혜정을 향해) 사모님은 오늘 처음 뵙는데. 애인은 있소?
혜정: 남자라면 이골 난 사람이요! 처음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그게 첫 인사요? 어디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해 줄랍니까? 도박 밑천 대줄 봉 하나 물어 줄 거냐구요?
두만: 보통내기가 아니 신데요. (주변을 돌아보며) 자, 나한테도 패 돌리시오!
영민: (패를 돌리며 두만을 향해) 좀 봐 줘 가면서 치시오. 오 사장만 보면 오금이 저려서 원.
( 30분 정도 화투를 치다가 귀식과 두만이 일어서서 무대 오른 편 끝으로 간다.)
두만: 기술자로군요?
귀식: ( 무표정하게 서 있다.).....
두만: 최 사장과 함께 오신 겁니까?
귀식: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두만: 최 사장이 사기 도박 당한 걸 알고 있소? 그래서 같이 오신 거요? 보통 실력이 아니신데요? 어떻게 할까요? 우린 아직 피래 미입니다만...말씀해 보세요!
귀식: ( 빙긋 웃으며) 난 오 째란 사람이요. 내 별명 들어 본 적이 있소?
두만: (깍듯이 인사를 하며) 오 째라고 하셨나요?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저희 라인계에서는 선배님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 판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원하시는 데로 하겠습니다.
귀식: 그냥 그대로 칩시다. 승부가 나면 그때 가서 이야기합시다.
두만: 안 됩니다. 얼른 보니 호구가 최 사장을 빼고 둘이 앉아 있군요.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최 사장을 빼고 저기 쉬고 있는 사람을 끼어 앉혀 호구 셋으로 승부를 하는 것이.
귀식: (형철을 가리키며) 저 사람 말입니까? 우리하고 같이 온 사람이요. 그리고 최 사장은 한이 맺혀 오늘 이 노름에 빠지지 않으려 할거요.
두만: 그러면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선배님이 빠지시고 데라 하시죠. 잃은 사람들에게 선 이자 일할씩 띠고. (혼잣 말처럼) 최 사장도 속임수 쓰는 게 제법인데.... 이 판에서 최 사장과 제가 짜고 치면 승부를 충분히 낼 수 있습니다. 선배님은 데라해서 돈 챙기고 우리는 작업하고 번 돈은 게임 끝나고 밖에서 반분하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선배님? 선배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매너가 깨끗하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귀식: 좋소, 그렇게 합시다.
두만: 그럼 타협을 본 겁니다. 선배님 덕택에 올 겨울 그렇게 춥지만은 않겠는데요. ( 둘이서 돌아 온다 .)
귀식: (앉으려다가 형철을 보고 잠깐 보자는 시늉을 한다. 형철이 일어 서서 귀식을 따라 간다.) 여보게 형철이, 자네는 이제 집에 가게! 자네 여기 오래 앉아 있어 봤자 이로울 게 별로 없네. 이미 타협은 됐네. 결과는 월요일 알 수 있을 걸세. 기분 좋으면 그 날 자네도 부르겠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고, 안 그런가?
형철: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에 돌아와 잠시 더 앉아 있다가 형철이 일어서며) 집에 손님이 오기로 한 걸 깜빡 잊었구려! (정민을 향해) 난 집에 가 봐야 겠다구요! (모두가 화투에 정신이 팔려 형철이 퇴장하는데 관심이 없다. 하지만 정민이 따라 일어서며 다정스럽게 말을 건넨다.)
정민: 우리 자주 만나서 놉시다. 인생이 뭐 별 겁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뭐 그런 거 아닙니까? (형철을 배웅하고 뒷 자리에 와서 앉는다. 그리고 맥주를 따라 주변 사람들에게 한잔씩을 권한다.) 받으시오, 받으시오,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맥주가 부족하면 얼마든지 사 바치오리다. 양담배도 준비했소이다. 하지만 아껴서들 피시오. 새벽에는 한 갑에 오 천원, 만원씩도 받을 테니깐. 내 말 듣고들 있소?
두만: (정민에게 따라 오라는 눈치를 보낸다.) 나 화장실 좀 다녀 와야겠소.
정민: (그도 따라 일어서며) 술을 마셨더니 금방 오라는 데가 있군! 난 너무 정직해서 탈이란 말 이야.
( 무대 뒷 쪽에서 그들이 뭐라고 속삭이나 관객은 들을 수가 없다. 정민이 깨를 끄덕이기도 하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귀식과 영민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번갈아 쳐다 본다.)
귀식: 오늘은 왜 그런 지 화투가 잘 안 되는 걸. 엊 저녁 꿈 자리도 안 좋고. 당신들은 꿈을 믿지 않나요? 난 꿈자리가 안 좋으면 그 날 외출도 안는 사람인데... 옆에서 하도 권하는 바람에 여길 따라 왔는데. 어쩐지 꿈 자리가 마음에 걸려서.. 난 오늘 구경이나 할거요. 밑천은 좀 가져 왔으니 화투치다 돈 떨어지면 내게 말하시오. 즉각 빌려 드릴 테니. (귀식이 자리에서 빠져 나온다. 그가 앉았던 자리로 두만이 자리를 옮겨 앉으며 영민에게 눈을 깜빡한다. 영민도 알았다는 눈치를 보낸다. 정민은 뒤에 앉아 사람에게 다가 가 그의 등을 밀어 억지로 화투판에 앉힌다.)
정민: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손을 놀리면 뭣한 답니까? 손은 열심히 움직이라고 달린 것 아니요? (맥주를 한 잔 따라서 금방 앞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권한다. 그가 한 잔을 들이킨다.) 자 안주도 여기 있소. 한잔하고 힘내서 치시오! 내가 옆에서 봐 드릴 테니. (그가 맥주를 딸아서 여러 사람에게 권한다. 혜정을 쳐다보며) 편하게 앉아서 치시오. 발도 벌리고, 벌리고 싶은 것 있으면 다 벌리고 치시오. (모두가 웃는다. 혜정이 정민에게 눈을 흘긴다.)
( 조명이 어두워진다.)
장면 IV
이틀 후 저녁 6시 경,
다방
(변두리 다방 한 쪽 모퉁이에 귀식, 영민, 형철, 민석, 두만이 모여 앉아 있다. 그들은 도박에 서 딴 돈을 계산하고 그것을 분배하며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 이면에는 뭔가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자꾸만 주변을 살핀다.)
정민: 호구들한테 언제 다시 연락할까요? 며칠 쉬어야 겠죠?
귀식: (빙긋 웃으며) 돈 빌려 간 사람들에게 언제 연락할 꺼요?
정민: 걱정하지 말아요. 직장으로 전화 한 통화하면 벌벌 길테니까.
귀식: 틀림없는 사람들이면 너무 매정하게 몰아 부치지 말아요. 올 겨울에 그 사람들한테 돈을 두둑히 욹어 내야 할테니깐. (영민을 쳐다보며) 최 형도 제법이던데. 이젠 나도 깜박 속겠던 걸.
정민: 옛 동료를 속였던 걸 용서하슈. 오직 살기가 답답했으면 그랬겠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를 갈고 기술을 연마했단 말이요? 우리가 따먹은 돈은 같이 일하면서 보충해 줄테니 내게 섭섭한 감정일랑은 갖지 마시오!
영민: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다 지나간 일인 걸요 뭘,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엔 응어리가 있다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옛 동료를 끌어 드려 가지고..
두만: (갑자기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래도 안심이 안된단 말이요. 그 담배 골초 말이요. 자꾸만 의심하는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던 일이 마음에 걸린단 말이요.
정민: 별 걸 다 걱정하고 있소! 그 사람한테는 다음부터 연락을 안하면 되지, 안 그렇소?
귀식: 돈을 빌려 준 게 있어서 그렇지. 그 사람한테는 직장으로 사람을 보내 수 일 내로 돈을 받아 버리고 다음부터는 빼 버립시다.
정민: (두만을 쳐다보며)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그 여자 다음에 자기 친구들 데려 올까요?
두만: 그래서 돈을 좀 잃어 준 것 아니오? 그 여자한테 당분간 돈을 더 잃어 줍시다.
귀식: 돈이 제법 있는 여자같던데?
정민: 이혼할 때 위자료로 제법 챙긴 모양입디다. 내가 이리 저리 떠 봤는데 아파트도 한 채 있고 부동산도 조금 있는 모양이던데.
두만: 그럼 그 여자한테는 아파트만 따 먹을까? (모두가 웃는다.) 나머지 호구들한테도 평균 이 삼천씩, 그러면 우리 한 사람 앞에 몇 천 만원씩은 떨어지겠는 걸. 이제 그만 일어 섭시다.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다구요. 순이 한테나 전화를 걸어야지. 공돈이 생겼으니 선물 사주고 드라이브라도 다녀 와야겠소. (정민을 쳐다보며) 며칠 후에 다시 연락합시다. (귀식을 향해) 선배님 다시 봅시다! 그럼 먼저 갑니다. ( 그가 무대 왼쪽 문으로 퇴장한다.)
정민: (귀식과 영민을 번갈아 쳐다보며) 난 호구들을 잘 관리할 테니 화투판에 끌어 드릴 사람들 물색이나 잘 해보슈! 조만간 곧 연락하겠소. 그럼 난 바쁘니 이만 가겠소. ( 그가 차값을 계산하고 퇴장한다.)
형철: (고개를 떨구며) 옆에서 보기가 딱해서 최 형에게 도박 기술을 배우라고 했는데, 내가 미안하오. 하여튼 저런 인간들이 있다니. 남에게 큰 상처를 주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면 다야? 저런 인간들이, 아유, 하느님은 뭘 하시나. 벼락은 아껴서 어디다 쓰시려는지!
영민: 너무 분개하지 말아요. 어차피 이 길을 들어섰으니 잘 해봐야지요. 한번 들여 놓은 발 그렇게 쉽게 뺄 수 있나요?
형철: 그래도 최 형이 그렇게 된 게 안타까워서.
영민: 그만 둡시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술 한잔 걸치고 데이트나 할거요. (귀식을 향해 미소를 보내며 ) 같이 화투친 여자 어떻던가요, 사부님? 그 여자 이름이 혜정이라 합디다. 헤정씨와 단 둘이 만나기로 했는데...부럽지 않소? 두분께만 우선 말씀 드리는데 다음 주 월요일 직장에 사표를 낼 겁니다. 직장 때려 치우겠다 이겁니다. 인생은 어차피 도박인데...
형철: 무슨 말이요? 장래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해서 처리해야지.
영민: 대충 대충 세상 살아 가기로 했소. 내가 이렇게 된 건 세상 탓이지, 내 탓 아닙니다. 허허허.
형철: 무슨 괘변을 늘어 놓는 거요?
귀식: (우울한 표정으로) 자 그만들 하시오. 하여튼 술이나 한잔 하러 갑시다. (귀식 일행이 일어선다.)
( 조명이 어두워지며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