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사모님의 전성시대

김영관 2007. 10. 8. 09:14

 

 

 


<단막극>
                     사모님의 전성시대


                                        실개천 

                            

 

                             시간: 현재

                             장소: 어느 대 도시
                       

                              등장 인물

             민규: 40대 초반의 00 회사 기획 실장
             회장: 60대 중반의 사람
             사모님: 60대 초반의 회장 아내
             정섭: 민규의 나이 또래의 회사 노조위원장

             신임 사장: 민규 나이 또래의 회장 큰아들

                             

                             장면 I : 회장의 집 거실
                             장면 II: 장면 I과 같은 장소
                             장면 III:  회장실
                             장면 IV: 까페, (오버랩으로 신임 사장의 방)
             

 

             

 

 


                    장면 I

 

 (어느 부유한 개인 주택의 응접실이다. " 사모님"이라 불리는 60대 초반의 여인이 소파에 앉아 있다. 맞은 편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사모님이 운영하는 회사의 기획실 실장으로 40대 초반의 사나이이다. 그녀는 시종 지시하는 태도이고 기획 실장 민규는 고분고분 그녀의 지시에 따르는 유형이다.)

 

사모님: 김 실장! 오늘 내가 하는 부탁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줘야 한다는 것 명심하게.

 

민규: 무슨 고민 거리라도 생기셨나요?

 

사모님: 우리 집 고민 거리가 어디 한두 가지인가? 하지만 이번 일은 남이 알면 창피한 일이라서. 이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 줘야겠어. 금방 말했지? 무덤에 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라고...

 

민규: 아드님들 문제입니까?

 

사모님: 아들놈들이야 아직 젊으니 그런 일쯤이야 애교로 봐 줄 수 있지만.

 

민규: 그럼 회장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회장님은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처리하는 분이신데요?

 

사모님: 그 영감 이번에는 혼을 좀 내주려고 그래. 전에도 여러번 실수가 있었지만 집안 창피해서 쉬쉬했는데. 젊어서부터 내 간장을 타게 한 일들을 어떻게 일일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가 있겠는가? 며느리들이 알까 봐 창피하다네. 그래서 아무도 몰래 이 영감을 혼 내 주려고 하는데.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말일세.

 

민규: 여자 문제입니까?

 

사모님: (얼굴이 붉어지며) 자네 눈치 하나는 빠르네 그려. ( 분을 참지 못하는 표정을 보이며) 맨 주먹으로 시작해서 오늘날 몇 개의 회사를 거느릴 정도로 이 집안을 키워 놓은 게 누군데 날 배신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민규: 그 여자가 누구인데요? 돈을 줘서 해결하실려구요?

 

사모님: 그 반대일세. 내가 영감한테 돈을 뜯어 낼 걸세. 김 실장은 원래 우리 영감이 추천해서 그 양반한테 일말의 은혜랄까 그런걸 느끼고 있겠지만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줘야겠어. 그 사람이 추천한 사람을 통해서 복수한다는 것도 멋 있는 일 아닌가? 내 사람도 많이 있긴 하지만. 어때, 협조해 주겠지?

 

민규: (표정이 어두워지며) 두 분 은혜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리고 회사에 회장님 사람, 사모님 사람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다 한 가족인데.

 

사모님: 그래? 난 그렇게 생각을 않는다네. 역시 내가 추천한 사람들은 물불을 안 가리고 나를 돕더라구. 영감이 회사에 넣은 사람들은 가만 보면 그 양반을 끼고 돌더라니깐.

 

민규: 하여튼 회장님께서 무슨 일을 벌리셨나요? 그리고 제가 할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사모님?   

 

사모님: 지난번 내가 미국에 있는 둘째 아들한테 1개월 정도 가 있을 때 일일세. 이 영감이 나이에 비해 아직도 정력은 좋아 가지고. 집에 다니는 파출부 있지 않나? 남편이 죽어서 애들하고 산다는 여자 말이야?

 

민규: 아, 지난번 아줌마 말씀이군요? 회장님이 그 여자와 무슨 일이 있었다구요?

 

사모님: 우리 집을 아침 저녁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눈치를 못 챘어? 김 실장이 알고도 시치미떼는 것 아냐?

 

민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요. 그래서 그 아줌마를 내 보내셨군요?

 

사모님: 내가 어떤 사람인가? 눈감고도 십리 앞을 보는 사람이지. 이 영감 마음을 꿰뚫어 보고 사는 사람이 나 아닌가? 그년을 대하는 태도가 이상해서 그년을 족쳤지 뭔가? 결국 실토를 하더라구. 절대로 비밀로 하라면서 돈 몇 푼 쥐어 주고 내쫓았지.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니 이 영감이 괘씸하기 그지없더라구. 며칠 밤을 새우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지.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구.

 

민규: (의아해 하는 표정을 보이면서)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사모님이 생각해 낸 묘책이란 과연 어떤 건데요?

 

사모님: 자네가 편지 한통을 써서 우리 집으로 보내게. 변호사가 써 보낸 것처럼 해서 말이야. 파출부 여자가 억울하게 강간을 당했다면서 그 변호사를 찾아 간 것처럼 말이야.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분이 이런 일로 법정에 서는 것은 여러 가지로 안 좋을 것 같아서 자기가 중재를 해 볼 생각인데 한 오천 만원이면 어떻겠느냐고 편지를 쓰게. 아무 이름이라도 좋으니 둘러대서 편지를 쓰게.

 

민규: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어요? (고개를 떨구며) 아무래도 저는 그런 일은 못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키십시오.

 

사모님: 그럴 줄 알았다니깐. 자넨 역시 영감 사람이라 사양할 줄 알았지. 그래도 자네를 통해서 복수하고 싶었는데. 그 문제는 없었던 걸로 하세. 다른 사람을 시켜 볼테니. 하지만 아까 말한데로 이건 절대로 비밀이야. 앞으로 일할 사람과 자네, 그리고 나밖에 모르는 일로 해두세. 비밀이 새나가면 어떻게 된다는 걸 우리 회사 생리상 잘 알고 있겠지? 그날로 끝장이라는 걸 말일세.

 

민규: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아무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비밀로 하겠습니다, 사모님.

 

사모님: 그건 그렇고 오늘 노조 위원장 만난 것은 어떻게 됐나?

 

민규: (걱정 말라는 손짓을 하며) 아주 잘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저쪽에서 아예 날 만나주지 않으려 하더라구요. 노조 위원장과 회사 기획 실장의 만남은 시기상 좋지 않다더라구요. 그래도 만나서 대화해 보는 건 손해가 없지 않겠느냐면서 아무도 몰래 단 둘이 만나서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 해 보자고 했습니다. 저 쪽도 장기 농성으로 조합원들이 김이 빠진데다가 사장이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약간 겁을 먹었거든요. 공교롭게도 작년 농성 때 사장이 죽어 버렸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네들의 농성으로 사장을 둘씩이나 저 세상사람 만드는 것 아니냐면서 조합원들이 약간씩 동요를 하고 있거든요. 그러던 차에 이쪽에서 극비리에 만나서 타협을 하자니깐 겉으론 싫은 체 하면서도 내면으론 반가왔던 모양이더라구요.

 

사모님: 그놈의 회사 골치 아파서 운영을 못해 먹겠어. 고용 사장이라서 그런지 사태 해결에 적극적이지 못 하거든. 사사건건 기획실이 개입해서 일을 해결해야 쓰겠어? 내가 제안한대로 했어?

 

민규: 농성을 한번 시작하면 최소한 오륙 백만 원은 쉽게 쓰는 모양이에요. 팜플렛 만들어야지, 간식 들어가야지, 그 숫자가 얼마예요. 이번 파업 푸는 대신 위원장에게 얼마 내놓으면 좋겠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안하더라구요. 우리 서로 통할 수 있는 사이이니 기탄 없이 이야기하라고 했는데도 그냥 웃기만 하던데요. 올해도 작년처럼 장기 파업할 명분이 없는데 더군다나 사장이 병원에서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어떨거냐니깐 기가 많이 죽었더라구요.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고 달랬습니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일할 직장이 있지. 우리 쪽에서 직장 문 닫으면 어쩔거냐니깐, 버럭 화를 내긴 했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많이 누그러져 있더라구요. 내년에 경기가 좋아지면 그 때 주위 사정 봐 가며 봉급 올리는 문제에서부터 복지 문제 등을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올해는 그냥 파업을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사모님: 그래, 잘 했어. 그렇게 슬슬 구슬려야지. 올해만 잘 버텨 보라구, 내년엔 그 회사 넘겨 버려야 겠어. 입사할 때는 고분고분하던 애들이 악질적인 노조 간부 몇 놈들 때문에 백 팔십도 바뀌어 져 가지고... 회사측을 적으로 생각하니 말이야. 회사측과 노동자는 결국 한 식구인데, 안 그래, 김 실장?

 

민규: 하지만 우리 회사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닙니다, 사모님.

 

사모님: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김 실장? 설마 김 실장도 그 놈들 편은 아니겠지?

 

민규: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회장님 밖에 없습니다.

 

사모님: 그렇겠지... 자네는 영감 사람이니깐.. 그래서 아까 내 부탁도 못 들어주겠다고 했지?

 

민규: 아닙니다, 사모님. 회장님 사람이란 곧 사모님 사람이란 뜻 아닙니까?

 

사모님: 그래, 노조 위원장은 아무 말을 않더란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일이 잘 됐다는 말이지?

 

민규: 아까 말씀드렸죠? 노조 위원장은 말 없이 계속 웃기만 하더란 이야기... 그래도 제가 끈질기게 설득을 했습니다. 집행부가 이미 파업을 풀기로 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뭔가 명분이 있어야 하고 내면으론 그 동안 돈만 들어갔지, 조합비로 감당하기엔 상당히 큰 금액이고. 어째 내가 한 번 말해 볼까 하면서 사모님이 제안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회사측에서 노조 운영비로 이 천만원 내놓겠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그냥 웃기만 해서 노조 위원장 입장으로 뭐라고 대답할 수 없는 입장이란 걸 내가 잘 안다. 그러나 사나이와 사나이의 약속으로 이 기획 실장이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분명 그의 눈빛이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습니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사모님: 분명 그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

 

민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말로 대답한 것은 아니고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입니다.

 

사모님: 그게 그것 아닌가? (그녀는 무슨 생각이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기 쪽으로 걸어간다. 전화 번호를 누르며) 분명 자신이 한 이야기에 책임을 져야 하네, 김 실장! 아 여보세요, 난데, 공장장 바꿔, 급한 일이네. (기다리면서 혼잣말처럼) 이번에 이 새끼들을 다 죽여 버려야겠어. 응 나야, 공장장이지? 내가 한 말을 즉시 전 직원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도록... 내 말 알겠어? 내용이 뭐냐고? 잘 들어! 노조 위원장이 우리 기획 실장을 만나 자고 사정을 하더라는 거야. 바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꼭 한 번만 만나자더라는 거야. 마지못해 만나 줬더니 이번 파업을 푸는 대가로 자기 개인에게 현찰로 일억을 달라는 거야. 노조 위원장 하면서 한 밑천 벌어 보자 이거겠지. 그런 놈들 속성이 원래 그런 것 아냐? 그런 놈들이 회사에 무슨 애정이 있겠나? (어안이 벙벙해 있는 민규를 웃으며 쳐다보며) 노조원들을 희생시키고 자기가 한 몫 챙기겠다 이것 아니겠나? 빨리 이 사실을 공장에 파업 중인 사람들에게 알리라구? 그게 사실이냐구? 이 사람 날 뭘로 보고이래? 지금 이자리에 김 실장이 와 있다구. 그래. 그럼 전화 끊고 기다릴 테니 결과를 내게 알려 주라구. (그녀가 전화를 끊고 민규를 쳐다본다.)

 

민규: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리고 파업을 푸는 조건으로 노조 기금으로 이 천 만원 내놓겠다고 협상해 보라고 한 것도 사모님 아니십니까? 언제 그쪽에서 사정을 해서 내가 그를 만났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그가 일억 원을 요구했다니요? 그게 무슨 당치 않는 말씀이십니까? 

 

사모님: 그런 놈은 혼이 나야 해! 내가 얼마나 벼르고 있었는 지 알기나 해? 작년에 내가 당한 수모를 생각해 보면... 올핸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걸. 그 놈 이제 자기네 노조원들한테 배신자로 몰리게 될 걸. 자네는 내가 말 한대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만 하면 돼, 알겠어?

 

민규: 그럴 순 없습니다. 사내와 사내가 눈으로 약속한 건데. 그가 개인이 쓰기 위해서 돈을 요구 한 적은 결코 없었다구요. 하늘에 대고 맹세컨대...

 

사모님: 웃기고 있어! 사내끼리의 약속이라구? 그래 그 잘난 사내놈들을 난 믿을 수가 없다구. 우리 영감쟁이 봐, 파출부나 따먹는 짐승이라구, 그런데 내가 사내들을 믿게 생겼어? (민규가 계속 그녀에게 항의를 하나 이미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
   

                         (서서히 조명이 어두워진다.)
                                

 

                            장면 II


 

(10일 후 같은 장소. 오전 10시 경. "회장님"이라 불리는 60대 중반의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고 그 앞에는 민규가 장면 I에서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소파의 탁자 위에는  007 가방 하나가 놓여 있다.)

 

회장: 김 실장, 자네 급하게 서울 좀 다녀와야겠네. 그래서 회사 일을 제쳐놓고 급하게 집으로 오라고 한 걸세.

 

민규: 서울에는 무슨 일로....?

 

회장: 무슨 내용인지는 묻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게. 여기 전화번호하고 주소, 성명이있네. 이 형수 변호사라고 하던데.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서 이 가방을 전해 주게.   일체 아무 이야기도 묻지 말고 이 가방만 전해 주라구. 가방 속엔 현찰이 가득 들었으니 소매치기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단지 이 말은 꼭 전하게, 이걸로 일이 끝난 것으로 알겠다고. 더 이상은 절대로 안된다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쪽에서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변호사법 위반으로 집어넣겠다고. 절대로 호락호락한 표정을 보이지 말라구, 내 말 알았어? (호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끄집어내어 민규에게 내밀며) 자 여기 서울 다녀올 출장비 받게. 회사에는 일체 비밀로 하게. 변명은 내가 적당히 알아서 할테니깐. 이건 내 마누라한테도 비밀이네, 다른 일로 부른 것처럼 했으니까. 다녀온 결과도 내게만 보고해야 되네, 알겠지?

 

민규: (약간 짐작이 간다는 표정을 보이며) 알겠습니다, 회장님! 착오 없이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이 변호사란 사람께는 일체 아무런 질문도 하지 말란 말씀이죠? 그냥 이 돈을 전달하기만 하면된다는 말씀이군요? 영수증이라도 받아 놓는 게 좋지 않을까요? 

 

회장: 그 사람이 영수증을 써 주려 하지 않을 걸세. 아참, 자네 양복 윗 저고리에 소형 녹음기를 넣고 가게. 여기 가방에 돈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가방 전달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전해 주면 알았다던지 무슨 말을 할게 아닌가? 그게 증거가 되겠지. 그래, 그렇게 하게. 갈 때 소형 녹음기 가지고 가는 거 잊지 말게!

 

민규: 알겠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민규가 봉투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가방을 손에 들고 일어서 나가려 한다.)

 

회장: 그런데 자네 서울 다녀와서 법정에 좀 나가 봐야 겠어! 마누라가 그러던데... 노조 위원장이 자네한테 돈 요구했다며? 그런 나쁜 놈이 다 있어? 노조원들 희생시키고 자기  몫이나 챙기려 하다니. 어디 그게 인간이냐구. 그쪽 노조원들이 위원장이 결백하면 공장장을 걸어서 명예 훼손 죄로 고소하라고 난리였다더군. 노조 위원장이 자기는 결백하다면서 헛소문을 퍼뜨린 공장장을 상대로 고소했다더군. 그래서 이쪽에서도 무고죄로 맞고소를 했네. 자네가 분명 노조 위원장을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증인이니 이번 재판에서 자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구. 다녀와서 한번 그 놈들을 혼내주라구. 이번 기회에 그 놈들 기를 팍 꺾어 놔야겠어, 내 말 알겠어? 난 자네만 믿네.

 

민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실은 그게 아니라...

 

회장: 그게 무슨 소리야? 걱정 말게. 그 작자가 인간적으로 불쌍하다 이건가. 다 같이 남 밑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처지에 서로 적이 되고 싶지 않다 이거지? 참는데 한계가 있지.  나도 인간이라구. 언제까지나 그놈들 응석을 받아 줄 수만은 없다네. 다녀와서 화끈하게 한번 붙어 보세. 자 나가 보게!

 

민규: (머뭇거리며) 그게 사실과 많이 다른데요... 다녀와서 회장님을 조용히 뵙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회장: 나를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그렇게 하게. 돌아온 즉시 내 방으로 오게. 서울 다녀온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도 듣기로 하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게. 모든 일이 다 잘 될 걸세. 자네 뒤엔 내가 있다는 걸 항상 명심하게! 어때? 이제 좀 진정이 되나? 그럼 어서 가 보게!
(무대 뒤쪽으로 걸어가는데 사모님이 기다리고 서 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관객들은 들을 수 있으나 회장님은 들을 수가 없다.)

 

사모님: 김 실장, 이쪽으로 좀 와 보게.

 

민규: (그녀를 향해 가방을 든 채 걸어간다.) 예, 사모님!

 

사모님: 그 가방, 우리 영감이 서울에 있는 변호사 가져다 주라고 한 거지? 자네, 서울 갈 필요 없어. 지난 번에 내가 말했지? 대신 협박 편지 써 주라고 말이야.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켰지. 가방 속에 오 천만 원이 들어 있을 걸. 편지 보낸 변호사란 존재하지도 않아 가공 인물이라구. 그러니 자넨 서울 갈 필요가 없단 말일세. 내 말 이해하겠지? ( 머뭇거리다가 민규가 그녀에게 가방을 건네준다.) 이번 일은 절대 비밀이라고 했던 거 기억하고 있지? 만약 말이 새 나가면 자넨 그걸로 끝장이란 걸 알라구! 아유, 이제 속이 후련하다. 내가 이를 갈고 이 영감쟁이 어떻게 골탕을 먹일까 생각하며 몇 날밤 을 뜬눈으로 지샌 줄 알기나 해? (그가 인사를 하고 나가려 하자) 잠깐, 김 실장! 우리 영감이 차비도 주었을 텐데? 출장도 안 가면서 그 돈 받아 가려는 속셈이야? (민규가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끄집어 내어 -사모님에게 건네 준다. 봉투를 받아 들며 그녀가 말을 계속한다.) 김 실장, 어디 하루 바람쐬고 오라구! 아무데도 좋으니 회사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서 하루 푹 쉬라구. 그리고 내일 늦으막한 시간에 집에 들러 자네가 존경하는 회장님께 가방 잘 전하고 왔다고 보고만 하면 된다네. 자 그럼 잘 가게. (혼잣말로) 영감이 제일 믿는 사람한테서 배신을 당한 걸 알면 기절 초풍할텐데. 나야 복수심 때문이라지만 김 실장 저 친구 마음은 어떨까? 입에다 자물통을 채우라했으니 영감에게 말도 못하고 얼마나 답답할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지. 날 속인 영감이 천벌을 받는 거지. (그녀가 뒷문으로 조용히 퇴장한다.)
                             ( 조명이 어두워진다.)
                            

                   장면 III


 (이틀 후 오후 5시 경. 빌딩 안에 있는 회장의 방이다. 관객에게 이 방이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는 생각을 갖게만 하면 되며 소품은 간단할수록 좋다. 옷걸이가 하나 있는데 그는 양복상의를 벗어 놓았다. 그는 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하고 골프채로 무대 중앙 오른 쪽에서 왼쪽을 향하여 홀인원 연습을 하고 있다. 무대 중앙 앞면엔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다. 밖에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들어오라는 소리와 동작을 하는 걸 관객들은 짐작으로 알 수가 있다. 기획 실장 민규가 다른 사람이 없나를 확인하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들어선다.)

 

회장: (반가운 표정으로) 어서 오게. 기다렸다네.

 

민규: 늦게 찾아 뵈어서 죄송합니다.

 

회장: 이 사람아! 왜 이리 늦었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지 알기나 해?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민규의 표정을 살핀다.) 이리 앉게!

 

민규: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며 어색하게 소파에 앉는다.) 회장님이 시킨 대로 처리하고 왔습니다.

 

회장: 왜 그러나? 넋나간 사람처럼... 일은 잘 처리했다며 왜 그래? 서울에서 곧장 이곳으로 온거야?

 

민규: (뭔가를 숨기는 듯) 예? 예...

 

회장: (미심쩍은 듯) 어디 들렸다 온 모양인데? 우리 집에 갔다 오는 것 아냐? 내 마누라 만나고 온 거야? 아침에 출근하는데 자네가 서울에서 돌아 왔느냐고 자꾸만 묻던데?  자네한테 뭔가 묻지 않았어? 그 여자 무슨 말 안했어?

 

민규: 아뇨? 그런 일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던 데요...

 

회장: 그래? 그렇담 다행스런 일이군. 내가 시킨대로 아무 말 않고 가방만 건네 줬겠지? 그 쪽에서 무슨 말을 하던가?

 

민규: 아무 말 없이 가방만 받던걸요. 안심하고 돌아가라는 표정만 짓던데요.

 

회장: 그래도 가방을 받으면서 뭐라고 했을 것 아닌가? 녹음기는 가지고 갔겠지?

 

민규: 녜, 하지만...

 

회장: 하지만 뭐란 말인가? 녹음기가 고장이라도 났단 말인가?

 

민규: 뭔가 눈치를 챘는지 손짓만 하더라구요. 제가 사무실을 나올 때도 잘가라는 손짓만 하던데요.         

 

회장: (우울한 표정으로) 보통 내기가 아닌 걸. 결국 녹음을 못했다 이거로군. (혼잣말처럼) 별 일이 없어야 할텐데...

 

민규: 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회장: (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자네가 나를 보자는 이유가 뭔가? 회사 일인가 아니면 자네 신상 문제인가?

 

민규: 회사 문제입니다. 노조 위원장 말인데요...

 

회장: 그 자식이 어쨌다는 거야? 법정에 세워 놓으면 모든 게 다 밝혀질텐데. 그 자식이 일 억이나 요구를 해? 간댕이기 부었어도 한 참은 부은 놈이지. 그런 놈이 어떻게 노조 위원장이 되었지?

 

민규: (머뭇거리다가) 실은 그게 아닙니다. 사모님이 제게 극비로 노조 위원장을 만나 보라고 해서 제가 그 쪽과 수차례 노력을 시도한 끝에 겨우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회장: 뭐라구? 그 놈이 만나자고 한 게 아니란 말이야? 내 마누라가 만나 보라고 했어? 뭣 때문에?

 

민규: 저 쪽에서 농성이 시들해졌다는 건 회장님도 알고 계시죠? 그걸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농성 해제와 때를 맞추어 회사측에서 노조 발전 기금이랄까, 노조 육성 기금으로  얼마 내놓겠다고 사모님께서 저쪽에 제안하라고 했습니다.

 

회장: 마누라가 그렇게 제안하라고 했단 말이지? 노조 육성 기금으로 내 놓겠다고? 얼마를 내 놓겠다고 했단 말이야? 왜 내겐 상의 한마디 없었지?

 

민규: 이 천만원 내 놓겠다고 말하라 했습니다.

 

회장: 이 천만 원이라? 그런데 그걸 왜 내게 상의를 안했지? 자넨 왜 내게 그 말을 안 해줬지? (화를 벌컥내며) 자네 언제부터 내 마누라 말만 들었나?

 

민규: 전 회장님도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회장: 뭐라구? 그럼 자네를 서울로 심부름 보낼 때부터 지금까지 노조 위원장 이 놈, 혼 좀 나 봐야 한다고 내가 그랬겠어?

 

민규: 그리고 이번 일은 사모님께서 회장님 내외분 빼놓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극비리에 빨리 해치우라고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회장: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자네가 내게 그럴 순 없네. 자넨 내 사람 아닌가?

 

 민규: 전 누구의 사람이 아니라 두 분의 사람입니다.

 

회장: (얼굴이 새빨게 지면서) 뭐라구? 그럼 자넨 내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민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게 아니라...

 

회장: 그게 아니라? 요즘 마누라가 못마땅하다 했는데 자네까지 이럴 수가 있어?

 

민규: 저도 입장이 난처합니다. 사모님께서 회사 일에 너무 간여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 것 같군요. 잘 풀릴 수 있는 일이 자꾸만 꼬이고 있으니... 노조 위원장을 고소하셨다고 했습니까?

 

회장: 그 쪽에서 명예 훼손죄로 고소를 했으니 이 쪽에서도 무고죄로 했지. 이제 어쩐다지? 자넬 법정에서 부를텐데.

 

민규: 전 법정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설령 그 자리에 간다 해도 거짓말을 할 순 없습니다.

 

회장: 그럼 어떻게 되지? 마누라가 밉긴 해도 이미 일을 벌려 놓은 건데. (한참을 맥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네가 고생을 해줘야 겠네! 그 방법 밖에 없네. 공장에 이미 소문이 쫙 나버린 거구. 자네가 분명히 들은 걸로 되어 있으니... 자네가 법정에서 노조 위원장이 돈을 요구했다고 말하게.

 

민규: 그럴 순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될수록 빨리 바로잡는 게 도리가 아닐까 합니다, 회장님! 그리고 앞으론 사모님께서 회사 일에 참견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사모님이 요즘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회장: (침울해지며) 나도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네. 도대체 내 말을 들으려 하지를 않아. 갈수록 집에선 내 말이 먹혀 들어가지가 않아. 이번 일 때문에 더 더욱..

 

민규: 이번 일 때문이라니요? 남자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닙니까?

 

회장: 뭐라구? 자네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어투로구먼, 그렇지? 알고 있지?

 

민규: (고개를 떨구며) 녜, 알고 있습니다.

 

회장: 어떻게 알았지? 내 마누라도 알고 있어?

 

민규: 예, 알고 계십니다.

 

회장: 그런데 왜 내게 모른 채 했지? 무슨 꿍꿍이 속이 있었나 본데? 가만 있자... 이번에 변호사가 써 보낸 편지, 그거 내 마누라 소행이지? 자네 알고 있지? 그렇지?

 

민규: (당황해 하며) 절대로 비밀로 하라구 했는데요.

 

회장: 뭐라구? 자네 누구 사람이야? 언제부터 마누라와 짝짜꿍이 되었느냔 말이야? 여편네가 내게서 돈을 가로챘군. 그리고 자네가 가방을 받아서 그년을 줬겠군? 세상에 이럴 수가....자기 남편의 약점을 이용해서 돈을 긁어내다니. 그런데 자네가 그년과 한편이 됐단 말이지. (그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벽쪽에 세워 둔 골프채를 집으러 뛰어간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민규가 몸을 피하려 한다. 골프채를 들고서 그가 민규를 향해 쫓아간다.) 야이 개 자식아! 넌 오늘 내 손에 죽는 줄 알아. 저 자식이 여편네하고 작당을 해서 날 골탕 매겨? (그가 민규를 붙잡아 골프채로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야이 자식아! 할 일이 없어서 자기를 키워 준 은인을 배신 해?

 

               장면 IV


 (한달 후 저녁 9시 경. 불빛이 희미한 어느 까페.. 민규가 먼저와 앉아 있고 조금 늦게 들어 온 노조 위원장 정섭이 그의 쪽으로 서둘러 다가가서 서로 악수를 한다. 그리고 정섭이 민규 옆에 앉는다. 민규가 주인 마담을 불러 맥주와 안주를 시키는 모습이 보인다. 주인 마담이 맥주와 술 안주를 탁자 위에 놓고 가자 민규가 맥주를 따는 동작과 함께 그들의 대화가 관객에게 들리기 시작한다.)

 

민규: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새로운 사장에 대한 반응은 어떻던가요?

 

정섭: 말도 마슈! 그 동안 회사에서 내 입장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십니까? 겨우 잘 해결되어서 오늘 이렇게 나온 겁니다.

 

민규: (맥주를 권하며) 본의 아니게 벌어진 일이지만 아뭇튼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당한 어려움도 보통은 아니었답니다. 짧은 기간에 우리 회사에 변화가 꽤 많았지요? 사장이 사표를 내고..

 

정섭: 그렇군요. 후임 사장에 회장 큰 아들이 앉게 되고..

 

민규: 회장님이 물러나고 사모님이 새로운 회장이 되었으니..

 

정섭: (자조섞인 웃음을 웃으며) 새로운 회장에 새로운 사장이라, 이제 회사가 잘 되가겠는데요?     

 

민규: 회장님, 아니 이젠 전 회장님 말씀인데, 참 안됐다 싶어요. 회장 자리 내주고 당분간 머리를 식힐 겸 둘째 아들이 있는 미국에 가셔 버렸거든요.

 

정섭: (맥주를 마신 후 민규에게 술을 따라 권하며))그만 두신 이유가 뭐랍니까? 직원들 모두가 의아해 하던데요?

 

민규: (뭔가를 감추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분들 일인데 어떻게 나같은 쫄짜가 알겠어요?

 

정섭: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회사 기획 실장에다가 회장님 오른 팔이나 다름 없었던 분이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시면서 감추고 있는거죠? 오늘 만나자고해서 혹시 그말씀을 해주려나 했는데요?

 

민규: 설령 알고 있다한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이 회사 생리를 잘 알면서 그러시오? 회사의 실권이 사모님에게로 넘어갔다는 정도로 알아 두시면 좋겠소.

 

정섭: 그렇다면 실장님도 찬 밥 신세가 되겠는데요? 실장님은 전 회장님 사람이라면서요?

 

민규:(고개를 떨구며) 사모님 분류 방법에 의하면 그렇소. 사모님은 자기 사람, 영감 사람이 분명한 분이니깐. 신임 사장 취임 후 며칠 후에 인사드리러 사장실에 들렀는데... (우울한 표정으로) "사장 취임을 축하 드립니다. 진즉 인사 드렸어야 하는데 늦었습니다." 했더니 눈을 부릅뜨고 그가 뭐라고 말한 줄 알아요? "인사가 늦었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 어머니한테 당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당       신 형편 없는 인간이라던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인사를 와서 모두 한결같이 앞으로 열심히 일하겠다던데.. 당신 인사하는 태도가 뭐야.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빌면서 잘 해보겠다고 해도 부족할 형편인데... 뻣뻣하게 서서 말이야. 건방진 친구로군. 회사가 이렇게 된데는 내 아버지 못지않게 당신 책임도 크다는 걸 알라구! 당신 그런 태도로는 재미 없을 줄 알라구!" 그렇게 말하는데 난 할 말을 잃었습니       다.앝으로 내가 살아갈 일이 막막하기도 했지만 회사 앞 일도 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당신의 고소에 대한 맞 고소 증인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것에 대해 사모님이 이를 갈고 있었던 모양이요. 그런데다가 사모님이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 탄로난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 같소. 결국 전 회장님에게도 오해를 받게 되었고. 나도 뭐가 뭔 줄 모르겠소. 일이 묘하게 꼬여 가지고.

 

정섭: (맥주를 마시고 민규에게 권하며) 사장이란 사람 정말 웃기는 친구로군요. 무릎을 꿇고 빌라니. 앞으로 직원들이 마음에 안들면 어떻게 할 지 뻔하군요. 새파란 친구가 사장 되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군요. 하여튼 지난 번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했더라면 내 입장은 어떻게 될 뻔 했겠소? 사모님의 협박을 이겨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텐데.

 

민규: (술을 마시고 정섭에게 잔을 권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게 당연하지 않소? 날 너무 추켜 세우지 마시오, 허허허.

 

정섭: 전 회장님은 미국에서 언제 귀국하신답니까? 뭔가 새로운 일을 구상하고 계시는 모양이지오? 

 

민규: 이제 그분 나이도 있고 해서 은퇴한 것 아니겠소? 이 나라에서는 말이오.

 

정섭: 무슨 소리요? 60대 중반이면 한창 나이 아니요? 벌써 은퇴라니요?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은퇴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통 모르겠는 걸요.

 

민규: (맥주를 따라서 자신이 마시며) 자의반 타의반이라고나 할까? 여기에서 그 분은 산송장이 되버린 거요. 이제 그분은 아무 실권이 없어요. 그분을 모셨던 사람들을 사모님이 일거수 일투족 감시하고 있소. 어떻게 보면 우리 목숨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다오. 그래도 그분 성격이 활달해서 남자다운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여 들었는데. 벌써 상무님을 비롯한 몇 사람이 회사를 그만 두었다오.

 

정섭: 이런 장래성이 없는 회사에서 과연 근무를 해야 옳은 건지 모르겠수! 마누라와 자식들만 없다면 당장 때려 치워 버릴 텐데..

 

민규: 무슨 소리요.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언제까지 이런 날이 계속 되겠소? 제발 부탁이니 전 회장님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들 일해 주시오. 제가 없더라도.

 

정섭: (고개를 갸우뚱하며) 뭐가 좀 이상한데요. 실장님이 마치 회사를 그만둘 사람처럼 이야기 하고 있잖소?

 

민규: 그럴 리가 있소? (눈엔 눈물이 글썽인다.) 우리가 얼마나 아끼고 키워왔던 회사인데. 내가 그만 둔단 말이요? 제발 부탁이요. 아무리 신임 사장이 건방지고 사모님이 회사를 말아 먹으려 해도 우리가 두눈을 부릅뜨고 있으면..... 희망은 있을거요.

 

정섭: 과연 그럴까요? 난 아무래도 회사 장래가 캄캄하기만 해서 이곳에 내 장래를 맡길 수가 없다오.

 

민규: 나라가 잘못되어간다고 조국을 버릴 순 없지 않소? 내 이야기가 너무 비약되고 있는 것 같소만, 우린이 회사의 창업멤버가 아니오? (확신이 없이 혼자말처럼) 내 말 믿으시오. 아무튼 바쁜 가운데도 이렇게 나와줘서 고맙소. 우리 언제까지나 변치 맙시다. 그말을 하고 싶어서 뵙자고 한 거요. 모처럼 한잔 했더니 갑자기 취기가 올라 오는데요. 이제 그만 일어 설까요?

 

정섭: 벌써 일어서자는 말입니까? 이제 막 기분이 좋아지려는데... 그렇지 말고 2차로 가서 한잔 더 합시다. 내가 한잔 살테니. (그들이 약간 비틀거리며 일어 선다.) 자 주인 마담, 우리 갑니다. 여기 얼마요?

민규: 무슨 말이요? 내가 만나자고 했으니 내가 돈을 내야지. (그가 지갑을 끄집어 내어 마담에게 계산을 한다.)

(무대 뒤쪽에 신임 사장과 민규가 보인다. 이 장면은 민규의 회상 장면이다. 장소는 신임 사장의 방이다.)

 

사장: (민규가 내밀은 흰 봉투를 쳐다 보며) 이게 뭐요?

 

민규: 사표입니다. 회사를 그만두려구요.

 

사장: 그래? 실은 내가 당신에게 사표를 쓰라고 할 참이었는데. 어머님이 아직 놔두라고 하길래 그냥 두었는데. 어머님은 당신을 계속 괴롭힉고 싶은 모양이던데. 어머니 표현대로라면 당신을 회사에 놔두고 분이 풀릴 때까지 두고두고 질근질근 씹어야겠다 하시던데.   

 

민규: 아무튼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사장: 잘가게. 그리고 내가 충고 한마디 해주지. 우리 어머니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멀리 떠나서 살게! 그게 당신 신상에 좋을 걸. 우리 어머닌 당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걸세. 내 말 알겠나?

 

민규: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가 퇴장하면서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끄집어 내어 큰 소리로 읽는다. 관객들만 들을 수 있다.)

(전 회장의 목소리로 흉내내어) 여보게 김 실장 잘 지내는가. 난 이곳 미국에서 제법 잘 지내고 있다네. 한국에서 챙겨 온 돈으로 여기에서 교포를 상대로 사업을 시작해보려 하네. 원래 난 이런 일에 대비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놓았다네. 우리나라에서 처럼, 미국에서도 사업 한 번 멋지게 시작해 보세. 미국행 비행기표를 여기 보내네. 자넨 내가 어떤 사람이란 걸 잘 알지? 나만 믿으라구. 가능한한 빨리 이곳으로 들어 오라구! 곧 전화하겠네. 그럼 이만. 추신: 그년을 (내 마누라이며 자네 사모님 말이네) 골탕 먹일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놨다네. 그게 뭔지 궁금한가? 그건 자네가 미국에 도착하거든 가르켜 줌세. 자네 도움이 필요하다네. 그년을 한 방에 날려 보내 버려야겠어!  

 

정섭: 뭘 그렇게 골돌히 생각하고 있소? 어서 2차하러 갑시다.

 

민규: 그럽시다. 오늘 저녁 몽땅 마셔 버립시다. 얼마 후면 서로 얼굴을 못 볼테니...

 

정섭: 무슨 말씀이오? 아까부터 마치 회사를 그만 둘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혹시 어디 먼 나라로 떠나 버릴려는 것 아니오? 그럴려면 나도 데려가 주시오.

 

민규: 정말 날 따라 올 자신 있소? 저 멀리 달나라 까지... 하하하.
                                (조명이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