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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행

김영관 2008. 4. 8. 15:16

 

 

 

미 행 



오늘도 나는 여늬 때처럼 아침 여섯 시 오십 분, 백운동에서 미니 버스를 탔다. 남편은 전

1 매
날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다할지라도 어김없이 새벽 여섯 시면 일어나 내 출근 준비를 거
들다가 백운동까지 승용차로 실어다 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 부부가 서로 대화를 많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두 사람
모두 교직에 근무하는 탓으로 낮에는 직장에서 말을 많이 하고 집에서는 서로가 거의 말
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말을 별로 믿지 않는다. 밖에서 남편은 유머와 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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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제법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는 꽤 재미있는 사람으로 통하는 모양이다. 나 또한 친구들
과의 모임에서는 남에게 질세라 수다를 떠는 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집에서도 시끌벅
적하게 살 거라고들 말하는 모양이지만, 그 사람은 집에 오면 말이 없고 나 또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다. 더 더군다나 아이들이 장성하여 직장 따라 우리 부부 곁
을 모두 떠나 버리고 나니 자연히 집안은 우리 둘만이 남아 썰렁하기 까지 하다. 넓은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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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 거실에 단 둘이 할 말을 잃은 채 TV를 보는 게 고작인데 가끔씩 서로가 보고 싶은 프로
때문에 아이들처럼 작은 실랑이를 벌리는데 그것도 대화라면 대화일는지 모르겠다.
출근 버스를 타니 박 선생이 손짓을 한다. 자기 옆 좌석이 비어 있으니 그곳으로 오라는 손
짓이다. 남편이 중등 장학사인데 내년이면 정년이라며 자신도 남편 그만 둘 때 같이 명예
퇴직할 거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던 박 선생이다. 두 사람이 직장을 그만 두면 모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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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훨 털어 버리고 부부 두 사람만이 단촐하게 여행이나 다니면서 노년을 보내겠다는 비교
적 낙천적 성격의 선생님이시다. 그런데 그 박 선생은 내가 옆자리에 앉자 마자 미소를 지
으며 농담을 건넨다.
"윤 선생 어디 아파요? 얼굴이 핼쓱한데."
"아프기는요. 잠을 좀 설쳐서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군요."라고 나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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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직도 젊었을 때처럼 힘이 남아 돌아? 밤새 잠 안자고 남편하고 뭐했수?"라며 씽긋
거리며 박 선생이 말을 잇는다.
"뭐라구요? 그게 며느리 본 사람에게 할 소리에요?"라고 툭 쏘아주며, 나는 별 흉측스러운
말을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이 들었을까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침 출근 시간부터 차에 타고 있는 선생님들은 매일 통근하랴, 집안 일하랴, 지친 표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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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시골로 통근하는 우리 선생님들을 사람들은 철인이라고들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
다.
"아이들 다 내 보내고 단 둘이서 신혼 부부처럼 깨가 쏟아 지겠는 걸. 부러워서 그러는 것
이니 화내지 말아요."라며 박 선생은 계속 놀려댄다.
"오늘 아침 뭘 잘못 들고 오신 모양이구려. 아침부터 실 없이 사람 놀려대는 걸 보니...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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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하고 잠자리 같이 안한지 얼마나 됐는지 알기나 하세요?" 자신도 모르게 안할 말을 했
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는 얼굴을 붉혔다.
"무슨 소리야? 나한테 비하면 청춘이 구 만리 같은 사람이... 우리 같이 늙은 부부도 재미
있게 사는데.."라며 내 말이 전혀 믿어 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혹시 윤 선생 남편 늦바람 난 것 아냐? 그 나이에 벌써 아내에게 등을 돌릴 리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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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우리처럼 아침이면 일어나기가 바쁘게 출근했다가 저녁 땐 솜처럼 무거운 몸이 되어
쓸어져 자는 직장 여성들, 남편 관리 잘해야 된다구. 요즈음 TV를 보면 별의 별 일이 다 일
어나는 것 못 봤어? 남편이 갑자기 지나치게 멋을 부린다거나 뭐 그런 일 없는지 잘 생각
해 보라구. 그리고 뭔가 수상한 점은 없는지 잘 살펴 봐요. 꺼진 불도 다시 보라는 말 있잖
아?"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박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날 나는 학교 문을 들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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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학교에 한 번 출근하면 하루 종일 그곳 담 안에 갇혀 지내야 하기 때문에 집안 일 대
부분을 남편이 한다. 은행에 각종 부과금 내는 일, 집안 일, 그 사람 친구나 내 친구의 아이
들 결혼 축의금 보내는 일, 일가 친척에서 부터 주변 사람들의 애사에 조의금 전달하는
일, 모두가 그 사람이 한다.
때론 그 사람이 미안하다는 생각을 갖고 사는 나는 일요일이면 그를 위해 모든 봉사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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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 한다. 그렇지만 그건 마음뿐이다. 일 주일 내내 밀렸던 일하랴, 목욕하고 미장원 가
랴, 연로한 친정 어머니 찾아뵈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 사람은 이런 내 삶을 잘 이해 해주는 편이며 항상 자신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리고 다
니는 그야말로 착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말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내심으
로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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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터울의 우리 집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에는 그가 항상 집에 먼저 와서 아이들 공부
를 돕고 다음 날 준비물들까지 다 챙겨 주며 아침에는 아이들을 학교까지 차로 실어다 주
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바람 났을지도 모른다는 박 선생의 아침 통근 버스에서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어처구니 없게 들리기까지 했다. 한 술 더 떠서 박 선생은 진짜 프로 급 바람둥이들은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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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철저한 면이 있다며 그런 사람은 반드시 아내 보다 먼저 집에 온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집에 일찍 오는 것과 밖에서 바람 피우는 것하고는 전혀 별
개의 문제라는 것이 그녀의 논리였다.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사는 나는 남편의 직장으로 전화를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오늘 박 선생의 이야기가 묘한 여운을 남긴 탓이었는지 무작정 그의 연구실로 전화를 걸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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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데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가 오늘 강의는 오전에만 있다고 했으니 오후 두
시인 지금쯤은 반드시 연구실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강의 시간외에는 항상 열어
놓는다는 휴대폰까지 꺼져 있는 상태이다. 그가 이 시간에 어디에 간 것일까? 벌건 대 낮
에 시내 어딘가에 있을 남편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박 선생 말이 사실일른지도 모른다
는 불안감이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친다. 지금까지 그를너무 믿고 평소에 직장으로 전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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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았던 게 내 불찰이었던 듯 싶다. 박 선생 말처럼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하는 건데.
나야 항상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있어서 감정이 무디어져 있어 그렇겠지만 다른 여인의 눈
에는 그가 대단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서 그 사람이 갑
자기 인생이 허무하다든가, 고독스럽다든가, 뭐 그런 생각이 그에게 엄습해 올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믿음 하나만을 앞세우고 그 동안 그에게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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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생각하니 그의 복장, 타이, 손수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챙겨 준 적이 없다. 심지어
와이서츠도 본인이 손수 다려 입고 다녔다는 생각이 불현듯 내 머리에 떠오른다. 그가 설
령 방황을 한다한들 그 사람만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가 내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 없다. 다른 여 선생님들은 일찍 직장을 그
만 두고 가정에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 나가면서도 행복하게 잘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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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지 않은가? 아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선생을 하게 만든 남자가 뭐 그리 잘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친정 부모님들이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반대했던가? 그가 나와 결혼 할 때 가
진 것이라고 하나 없는 가난뱅이에다가 잘난 데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한 군데도 없었
다. 이제 생활 여유가 좀 생겨서인지 촌티를 벗은 것 같지만 하는 행동은 아직도 촌놈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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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다. 성실하고 근면한 면 때문에 내가 그에게 끌리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이 신뢰라는
단어까지를 짓밟아 버린다면 그에게 남은 매력이란 무엇이겠는가? 그런 사람이라면 아무
리 나이가 들고, 자식들 체면이 있다하더라도 나는 그와 미련 없이 헤어질 작정이다.
박 선생의 농담 같은 진담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순간에도 내 머리에서 잠시도 떠나
지 않는다. 그 순간 나는 우리와 같은 통로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인네의 말이 불안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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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떠오른다.
"윤 선생님 부군께서 며칠 전에 국제 호텔 건너편 어느 다방에서 묘령의 여인네와 같이 나
오는 걸 봤다구요."
그 말에 나는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어 보이며, "놔두세요. 그 사람 재미 좀 보고 살라고 말
이에요. 그 사람 마음을 빼앗을 여자가 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줘 버릴 겁니다. 나이 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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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 내겐 귀찮기만 한 존재더라구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주변 사
람들은 남편의 이런 행동을 예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나 보다. 나만 모르고 있었는데도 내
가 너무 자신감에 차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지금 집에 있을 친정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야? 오늘 직장에 안 나갔어? 뭐라구? 직장에서 전화를 건 거라구? 뭐? 형부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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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피우는 것 같다구? 말도 아닌 소리! 그것 때문에 시골 직장에서 광주까지 전화를 걸었
어? 하여튼 알았으니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차분하게 통화하자구. 미행해 보자구? 그런
것쯤 문제 없으니 걱정 놓으시우. 내가 누구요? 형부를 꼬시는 년을 내가 금방 잡아서 작
살을 낼 테니 걱정 말아요, 언니."
언니인 내가 분해서 마음이 이글이글 타는 줄도 모르고 농담스럽게 전화를 받은 동생이 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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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기까지 하다. 친정 동생들까지 하늘같이 믿고 있는 남편이 그게 사실이라면 철저히 가면
을 쓰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중 인격자임에 틀림없다.
"잠깐 전화 끊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너, 내일 네 형부 퇴근 한 시간쯤 전에 그 사람 직장
연구실 앞으로 차 가지고 와라. 도중에 네 차에 나를 싣고 말이야. 그 까짓 직장 하루쯤 조
퇴한다고 하늘이 무너지겠니? 내 걱정은 말고... 너 내일 나하고 같이 행동하는 거다, 알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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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라고 다짐하듯 말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내일이면 그 사람 음흉한 행동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나이 들어서 이런 비겁한 행동
을 해야 하는 내가 한심스럽고 초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를 이 지경까지 가도록 만
든 것은 순전히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에 분노가 극에 달한 느낌이다.
과거엔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곳 장흥 동 초등학교를 다녔다는데 이제는 재학생이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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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50여명, 그래서 내년이면 이 학교가 폐교되고 이곳 아이들은 모두가 장흥 초등으로 옮
기게 된다.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을 하는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심란하기만
하다.
한참 후 나는 같은 아파트 통로에 살고 있는 여인네의 전화 번호를 수첩에서 찾아내어 전
화를 걸었다.
24 매
"여보세요, 아줌마 세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윤 선생입니다. 3층에 사는 윤 선생이라
니깐요. 지난 번, 제 남편과 같이 다방에서 나오던 여자 다시 봐도 알 수 있겠어요? 만나보
면 알 수 있다구요? 그럼 시간 좀 내 주시겠어요? 어제 저녁 남편이 내 눈치를 살피면서 전
화하는 내용인즉, 모레, 그러니깐 하루 지났으니깐 내일 오후 네 시 반에 만나자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아무튼 내일 오후에 시간 좀 내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그렇게 해 주신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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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멀리서 그 여자 얼굴만 확인해주고 그 자리를 곧장 피해 주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내일 연락 다시 드릴께요. 안녕히 계세요."
이런 전화나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기왕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모든 일이 사실로 판명되었을 때 그 때 내가 느
낄 배신감은 그 얼마 일까? 그런 것은 그 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우선 사실부터 밝혀 나가
26 매
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다음 날 오후 세 시부터. 동생과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줌마와 함께 동생의 승
용차를 타고 남편 차가 연구실 앞에서부터 출발하는 순간까지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뒤를
�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 차는 백운동 고가 도로 밑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국제
호텔 쪽으로 꺾어 돌아간다. 골목 뒤에다 차를 주차하고 그가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5층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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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엘리베이터를 탄다.
"맞아요. 지난 번에도 저 건물에서 댁의 남편이 나왔다구요. 틀림없이 그 여자를 만나러 가
는 모양이에요." 남의 일이라 그런지 이 여인네가 제법 신이 난 투로 말한다. 이런 모든 일
에 나는 정말 속이 상한다. 동생 눈빛도 호기심에 가득하다. 친 동생까지도 언니의 고통을
아랑곳 하지 않고 재미 있어 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꼴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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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느니 차라리 남편 하는 대로 놔 둬 버릴 걸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한편의 나는 이 인
간 정말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과거엔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곳
장흥 동 초등학교를 다녔다는데 이제는 재학생이 겨우 50여명, 그래서 내년이면 이 학교
가 폐교되고 이곳 아이들은 모두가 장흥 초등으로 옮기게 된다.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수
업을 하는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심란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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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 나는 같은 아파트 통로에 살고 있는 여인네의 전화 번호를 수첩에서 찾아내어 전
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줌마 세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윤 선생입니다. 3층에 사는 윤 선생이라
니깐요. 지난 번, 제 남편과 같이 다방에서 나오던 여자 다시 봐도 알 수 있겠어요? 만나보
면 알 수 있다구요? 그럼 시간 좀 내 주시겠어요? 어제 저녁 남편이 내 눈치를 살피면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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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하는 내용인즉, 모레, 그러니깐 하루 지났으니깐 내일 오후 네 시 반에 만나자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아무튼 내일 오후에 시간 좀 내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그렇게 해 주신다구
요? 멀리서 그 여자 얼굴만 확인해주고 그 자리를 곧장 피해 주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내일 연락 다시 드릴께요. 안녕히 계세요."
이런 전화나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기왕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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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모든 일이 사실로 판명되었을 때 그 때 내가 느
낄 배신감은 그 얼마 일까? 그런 것은 그 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우선 사실부터 밝혀 나가
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다음 날 오후 세 시부터. 동생과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줌마와 함께 동생의 승
용차를 타고 남편 차가 연구실 앞에서부터 출발하는 순간까지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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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 차는 백운동 고가 도로 밑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국제
호텔 쪽으로 꺾어 돌아간다. 골목 뒤에다 차를 주차하고 그가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5층 건
물 엘리베이터를 탄다.
"맞아요. 지난 번에도 저 건물에서 댁의 남편이 나왔다구요. 틀림없이 그 여자를 만나러 가
는 모양이에요." 남의 일이라 그런지 이 여인네가 제법 신이 난 투로 말한다. 이런 모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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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나는 정말 속이 상한다. 동생 눈빛도 호기심에 가득하다. 친 동생까지도 언니의 고통을
아랑곳 하지 않고 재미 있어 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꼴을 보
이느니 차라리 남편 하는 대로 놔 둬 버릴 걸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한편의 나는 이 인
간 정말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언니, 뭘 해? 어서 내려야지! 두 사람이 만나는 현장을 덮쳐야 할테니..."라며 동생은 억지
34 매
로 나를 차에서 끌어내린다. 남편이 탄 엘리베이터가 맨 꼭대기 층인 5층에서 멈춘다. 다
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역시 5층으로 올라갔다. 숨이 막힌다. 이 나이에 이
런 걸 다 확인하고 다니는 내 모습을 혹시 사위라도 알면 어떻게 될 것이며, 시집간 딸은
얼마나 분개하겠는가. 어린 손자 아이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쁜 인간! 비겁한 인간! 신의란 게 뭔가? 함께 살면서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게 신의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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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가. 배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이번에 똑똑히 보여 줄 거다! 용서란 없다! 이 인간
에겐."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그 짧은 순간 동안에 내 머리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다 왔어, 언니. 안 내리고 뭐해? 그런데 이게 뭐야? 다방이 아니잖아?" 동생의 말이다.
우리는 <한국 기원>이라는 간판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열린 문틈 사이로 남편의 뒷 모습
36 매
이 보인다. 그는 어떤 여인과 바둑판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저 여자 맞아요! 지난 번 댁의 남편과 함께 나오던 여자 맞다니깐요!"라며 자신감에 가득
찬 어조로 아파트 여인네가 말을 한다.
"언니, 언니는 가만 있어 봐. 내가 전후 사정을 좀 알아 보고 올테니!"라며, 등을 돌리고 앉
아 있어서 우리를 보지 못하는 남편 몰래 동생은 카운터에서 뭔가를 읽고 앉아 있는 주인
37 매
여자를 손짓으로 불러낸다.
"지금 저 남자 분하고 함께 앉아서 바둑 두고 있는 여자가 누군가요? 저 남자와 자주 이곳
에 오던 가요?"라는 동생의 질문에 주인 여자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다음과 같이 대답
을 한다.
"저 여자 사범님 말씀인가요? 저 분 모르세요? 광주에 유일한 프로 기사인 정 인숙 3단이
38 매
에요. 그리고 그 앞에 앉아 계시는 분은 우리 기원에 자주 오시는 분인데 바둑 수를 좀 높
이고 싶다며, 정 사범 님께 특별 과외 비를 내고 지도를 받고 있는 분이에요. 나이 들어 할
일이 없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나요?" 라며 궁금하면 뭐든지 물어보라는 표정을 그
녀가 지어 보인다.
어리둥절한 우리는 그 자리를 곧장 빠져 나왔다.
39 매
"언니는 나이 들어가는 형부에게 얼마나 무관심했으면 갈 데가 없어서 퇴근 시간 앞 당겨
서 담배 연기 가득한 기원에 쪼그리고 앉아 바둑이나 둘 결심을 했겠어? 형부는 지금 나
이 들어가는 초조감 때문에 저러는 거란 말이야! 내 말 알아 듣겠어, 언니? 형부에게 관심
좀 가져 봐. 언니는 형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해 본 적이 과연 있었느냐구. 이건 모두 언
니 탓이야. 형부가 안쓰러워 죽겠네."라며 동생은 총총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 가 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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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동네 여인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내 곁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시선을 다른 곳을 향 하
고 있다.
그 순간 나이 들어 초조해 하는 남편에게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소홀히 했다는 미안함
이 내게 엄습해 왔다. 이제 정말 중요한 사람은 곁을 떠나 살고 있는 아이들이 아니라 동
고 동락하며, 있는듯 없는 듯 내 곁에 동반자로 살아 온 바로 저 외로운 사람이다.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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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다시 말해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도, 여생을 살아야 겠다
는 마음이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