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오니일>
유진 오니일의 초기극
역자(실개천) 의 글(1)
드라마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유진 그래드스턴 오니일(1888-1953)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현대 미국 극작가로서 독보적인 존재이며, 오늘날 미국 현대극을 싹트게 한 극작가이기 때문이다.
오니일은 유년시절부터 연극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오니일은 연극배우로서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가난 때문에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인기 위주의 극에만 충실했다. 그래서 그가 소망하는 세익스피어 극 배우보다는 <몽테크리스트>의 극 주인공으로 자신의 재능을 팔아 버렸다고 늘 회한에 빠졌던 사람이다.
오니일은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무대 주변에서 자랐기 때문에 연극과 쉽게 친숙질 수 있었던 것이다.후에 오니일은 아버지 시절의 미국극이 유럽극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지나친 감상위주의 상업주의의 연국에 편향되어 감에 실망을 하고, 보다 진지한 삶의 현장을 무대화시켜 볼 꿈을 갖게 된다.
그가 극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그가 결핵에 걸려 요양원에 입원하면서 부터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의 주변을 서성거리던 결핵 요양소 시절은 자신의 삶을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왜냐하면, 극작이 곧 자신의 삶이라는 새로운 각오와 더불어, 인간의 진지한 삶의 근원 문제를 취급하는 본격극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무렵은 니이체의 철학이 전 세계에 파문을 일으키던 시절이고, 허무주의가 미국을 강타하던 시기였다. 그런 경향 때문에 그의 초기극들은 매우 비관적이고 허무주의 및 자연주의적인 경향을 띄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가 비참하게 자살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오니일의 아버지가 그의 극을 관람한 후 "너는 도대체 극을 보러 오는 관객들을 자살하게 만들 심산이냐?"라는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니일은 삶의 진지한 묘사는 희극보다는 비극이라는 니이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여, 일생동안 비극 창작에 전념하였다.
비록 주인공이 비참하게 생을 마칠지라도 고뇌하는 과정에 대한 인간의 노력에 매우 애정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노력을 매우 관심있게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