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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1)/ 번역극

김영관 2009. 2. 17. 15:31
 

                             갈증(1)



     

             유진 오니일 지음/실개천 (김 영관) 옮김



등장인물


 신사

 댄서

 서부인디언: 혼혈 선원


장면: 거울 같은 열대바다의 긴 간격 파도위에 천천히 오르내리는 기선의 구명선. 하늘은 가혹할 만큼 청명하고, 강철 같은 푸른색이 수평선 끝 검은 그림자와 섞이고 있다. 태양은 신이 격분한 눈빛처럼 똑바로 머리 위에서 이글거린다. 찌는 듯한 더위이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무더운 파도가 구명선의 흰 갑판으로 솟아오른다. 여기저기에 상어지느러미가 한가하게 원을 그리며 바다 표면을 천천히 가르는 것이 보인다.

  두 남자와 한 여인이 구명선 위에 타고 있다. 한쪽 끝에 선원의 푸른 복장을 하고 있는 서부 인디언의 혼혈인이 타고 있다. 그의 셔츠에는 붉은 글씨로 “유니언 우송선”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닳아 헤어진 항해용 신발을 신고 있다. 그는 머리숫이 없는 편이다. 그가 말할 때의 어조는 뭔가 이상한 말더듬의 장애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음을 길게 빼며 노래하는 투이다. 둥근 눈이 끝없이 원을 그리는 상어 지느러미를 바라보면서 그는 단조로운 흑인 노래를 흥얼거린다. 구명선 다른 쪽 끝에는 야회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복장을 한 중년의 백인이 앉아 있다. 그러나 태양과 염분바다가 그 복장을 다시 희화화하고 있다. 그의 흰 셔츠는 얼룩지고 구겨져 있다. 그의 옷 칼라는 목 주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닳아 헤어져 있다. 그의 검은 넥타이는 빛바랜 리본이 되어 있다. 분명히 그는 일등칸 승객이었으리라. 그가 멍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은 안타깝고 가련하다. 듬성듬성한 검은 머리는 헝클어진 상태이고 햇빛에 붉게 탄 머리부분이 드러나 보인다. 콧수염이 입술 위를 덮고 있다. 그리고 새까맣게 탄 모습이 그의 여윈 얼굴 측면을 따라 검은 선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은 햇볕에 타 물집이 생기고 배고픔과 갈증으로 수척해 있다. 가끔씩 그는 검게 탄 혀로 부르튼 입술을 핥고 있다.

  두 남자들 중간에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얼굴을 구명선 아래쪽을 향한 채 두 팔을 뻗고 누워 있다. 그녀는 야회복을 입고 있는 남자보다 더 괴상한 모습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금박으로 뒤덮인 벨벳의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긴 금발 머리카락은 알몸으로 거의 드러난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다. 그녀의 비단 스타킹은 헐렁하게 내려와 주름져 있고 그녀의 무도회용 신발은 바닷물에 부풀어 볼 성 사납다. 그녀가 머리를 들어 올릴 때,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여윈 어깨 위로 불쑥 튀어나온 목뼈 위에 차갑게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계속 울어댄 탓으로 그녀의 루즈와 검은 눈 화장이 엉망이 되어 있다. 그러나 기아와 갈증이 그녀를 볼 품 없는 댄서로  변형시켜 놓기 전에는 매우 아름다웠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녀는 끝없는 절망감으로 흐느껴 울고 있다. 세 사람의 눈에는 불안의 빛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한다.        



댄서: (일어나 신사를 향해 비참하게) 어휴! 이렇게 조용하다니 나를 미치게 하는군! 왜 당신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나요? 아직도 지나가는 배가 없는가요?


신사: (힘없이) 지나가는 배가 없는 것 같소. 적어도 내 눈에는 안 보이오. (그는 일어서려고 애를 쓰지만 너무 허약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다시 주저앉는다.) 내가 일어설 수만 있다면, 더 잘 볼 수가 있을 텐데... 이런 자세로는 멀리 볼 수가 없소.  내 눈이 이글거려 신경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느낌이오.


댄서: 나는 알아요. 알구 말구요. 도처에 진홍색 자국들이 보여요. 하늘에서 마치 핏방울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당신도 보이죠?


신사: 이제 나도 그런 느낌이오. - 아니 언제였던가? -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소. 그러나 오늘은 모든 게 붉은 색이오. 바다까지도 핏빛으로 변한 것처럼 보여요. (그는 부풀고 갈라진 입술을 핥는다. - 그리고나서 웃어댄다. - 광기로 찢어질 듯한 웃음소리이다.) 아마도 그날 밤 바다에 빠진 모든 사람들의 피가 솟아 오르기 때문일 거요.


댄서: 그런 말 마세요. 당신한테 진절머리가 났어요. 당신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몸서리치며 그한테서 등을 돌린다.)


신사: (뾰로통해져서) 좋아요. 나도 말하지 않겠소.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이럴 수가 ! 눈이 아파 미치겠군! 목이 탄다! (그는 몹시 흐느낀다. - 잠시 울음을 멈춘다, - 갑자기 댄서를 향해 화를 낸다.) 당신이 내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왜 나에게 말하라고 하는 거요?


댄서: 당신에게 피에 관한 이야기를 하라고 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날 밤 이야기를 당신에게 하라고 부탁하지는 않았다구요.


신사: 좋아요. 그렇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원한다면 저 친구에게 이야기 하시오. (그는 비웃음으로 선원을 가리킨다. 인디언은  듣지 않는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상어 떼를 바라보고 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흐른다. 구명선이 긴 파도에 천천히 오르내린다. 태양이 뜨겁게 내려 쪼인다.)


댄서: (거의 비명소리로) 오, 침묵! 나는 이런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무엇이든 내게 말해보세요. 아니 제발, 말하지 마세요! 생각하지 말아야지! 생각하지 말아야지!


신사: (후회스러워하며) 용서 하시오, 아가씨! 내 말이 거칠었나 보오.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정신이 조금 어떻게 된 모양이오. 보이는 거라곤 태양과 바다뿐이니 그런 모양이오. 가끔씩 모든 게 몽롱해지오. 난 매우 허약한 상태이오. 우리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게 꽤 오래 된 것 같소. - 오랫동안 물 한 모금도 못 먹었잖소. (그리고나서 고통스러운 어조로) 오, 물 좀 있으면!


댄서: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구명선을 내리치며) 지발 물 이야기는 집어 쳐요!


선원: (갑자기 노래를 그치고 재빨리 몸을 돌려서) 물? 누가 물을 가지고 있소? (그의 부어오른 혀가 마른 입술 사이로 보인다.)


신사: (선원을 향해) 여기 누구도 물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넨 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물을 네가 훔쳤어. (화를 내며) 왜 넌 그런 질문을 하지? (선원은 다시 등을 돌려 상어 지느러미를 바라본다. 그는 더 이상 대답도, 노래도 하지 않는다. 길고도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른다.)


댄서: (신사에게 기어가서 그의 팔을 붙잡으며) 얼마나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공허하게 보인단 말이에요. 난 두려워요. 왜 그런지 이유를 말해 보세요.


신사: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왜 그런지는 모르겠소.


댄서: 아! 이제 알겠어요. 저 인간이 말이 없군요. 그가 노래하고 있었던 기억이 않나요? 이상하고 단조로운 노래 말이에요. - 노래라기보다는 장송곡 말이에요. 내가 춤을 췄던 여러 곳에서 여러 나라 말의 노래를 들어 봤지만, 저런 노랠 들어본 적이 없었다구요. 왜 그가 노래를 멈췄다고 당신은 생각하나요? 뭔가가 그를 놀라게 했나 봐요.


신사: 모르겠소. 그러나 내가 물어 보겠소. (선원에게) 왜 노래를 멈췄지? (선원은 눈에 이상한 표정을 담고 그를 쳐다본다. 그는 대답 없이 다시 원을 그리는 상어 지느러미들을 향해 시름없이 노래를 시작한다. 댄서와 신사는 오랫동안 긴장하며 주의를 기우리는 자세로 듣는다.)


댄서: (발작적으로 웃으며) 무슨 노래가 저 모양이람! 곡조도 없고 가사도 이해할 수가 없으니 말이야! 무얼 뜻하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신사: 누가 알겠소? 자기 종족의 민요가 틀림없소.

댄서: 그러나 난 알고 싶어요. 선원 양반! 그 노래의 의미를 나에게 말해 주겠소? 당신이 부르고 있는 그 노래를 말이요. (흑인인 선원은 잠시 불안스러워하며 그녀를 쳐다본다.)


선원: (느린 어조로) 우리 종족 노래랍니다.


댄서: 그렇군요. 그런데 가사 뜻이 뭔가요?


선원: (상어 지느러미를 가리키며) 난 저들을 향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요. 이 노래는 매력적이에요. 매력이 매우 강하다고 들었소. 내가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저들은 우리를 잡아먹지 않을 것이요.


댄서: (질겁해서) 우리를 잡아 먹어요? 무엇이 우리를 잡아 먹는단 말인가요?


신사: (적막한 바다 속을 움직이고 있는 지느러미들을 가리키며) 상어 말이요.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저 날카로운 검은 것들이 상어지느러미라오. 전에 상어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소?


댄서: 예, 있어요. 그러나 저것들이 상어인 줄은 몰랐어요. (흐느껴 울며) 오, 무서워라. 세상에 이런 일들이!


신사: (흑인에게 거칠게 말한다.) 왜 자넨 저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하나? 저 여자가 놀라리란 생각 못했나?


선원: (무감각하게) 무슨 노래를 하고 있는지를 그녀가 물었잖소?


신사: (계속해서 흐느끼고 있는 댄서를 위로하려 노력하며) 결국 그에게 상어에 대한 것을 말해버렸군. 그러나 상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애들에게나 들려주는 이야기일 뿐이오. (언성을 높여) 상어는 아무 것도 잡아 먹지 않는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오.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말이오. (흑인이 그를 쳐다보며 입술을 괴상하게 모무린다. 아마도 그가 미소를 지으려는 모양이다.)


댄서: (머리를 쳐들며 눈물을 닦는다.) 당신 말이 사실이지요?


신사: (흑인이 쳐다보는 것에 당황해하며) 물론, 사실이지요. 상어가 사람을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요. 상어들은 겁쟁이라니깐. (흑인에게) 자넨 이 아가씨를 단지 놀래줄 작정이었지, 그렇지? (흑인은 그들의 시선을 피해 바다를 바라본다. 그는 다시 노래를 시작한다.)


댄서: 저 사람 노래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나에게 무시무시한 것들에 대한 꿈을 꾸게 만든다니까요. 그에게 노래를 그만 부르라고 말해주세요.


신사: 에이 참! 당신은 너무 신경과민이야. 지독한 침묵보다야 낫지 않소?


댄서: 그래요. 침묵보다야 낫지요. - 비록 저런 노래일망정.


신사: 이상한 친구야. 저 친구가 무얼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댄서: 이상한 건 저 사람이 부르는 노래 소리예요.


신사: 그는 우리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소.


댄서: 나도 알고 있어요. 그 노래에 대해 내가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전혀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신사: 그러나 그는 영어를 아주 잘해요.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소.


댄서: 말 할 때 마치 목 안에 뭐가 걸려 있는 사람 같아요.


신사: 아마 그런가 보오. 그렇다면 불행한 사람이요. 그러니까 그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요.


댄서: 나는 그를 동정하지 않아요. 그가 무서워요.


신사: 어리석은 생각이요.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 것은 뜨겁게 내려 쪼이는 태양 때문일 거요. 나도 가끔씩 그가 두렵소. 그러나 이제 내가 바다를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고 엄청난 침묵 속에 있다는 걸 알았소. 그런 것들이 당신 머리를 뒤죽박죽 만들어 놓은 거요.


댄서: 댄서: 당신은 더 이상 그를 두려워 하니 않나요?


신사: 정신이 말짱한 지금 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소.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오.


댄서: 그래요. 우린 항상 서로에게 이야기해야 해요. 당신에게 이야기할 땐 꿈을 꾸지 않거든요.


신사: 한번은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가 손에 칼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꿈을 꾸었소. 이제 그걸 알겠더라니깐요. 그는 단지 불쌍한  흑인 선원에 불과해요. - 불행에 빠진 같은 동료로서 말이에요. 우리는 모두가 똑 같이 가련한 상황에 처한 것을 하느님도 알 거예요. 우린 서로 의심하면 안돼요.


댄서: 그래도 난 두려워요. 날 바라볼 때 그의 눈엔 뭔가가 있어요. 그것이 날 두렵게 한단 말이에요.


신사:할 말이 없구려. 그건 모두 당신의 현재 상황 때문이오. (긴 침묵이 흐른다.)


댄서: 제발! 아직도 지나가는 배가 없나요?


신사: (일어서려고 하다가 힘없이 주저앉으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소. 그리고 난 일어서서 멀리 볼 수가 없소.


댄서: (흑인을 가리키며) 그에게 물어봐요. 우리들 중에 그가 제일 강하잖아요.  그는 배를 볼 수 있을지 몰라요.


신사: 여보게 뱃사람! (흑인은 영창을 멈추고 표정 없는 눈으로 그를 향한다.) 자네가 우리들 중 제일  건강해서 멀리 볼 수 있을 걸세. 일어서서 배가 보이는지 말해주게.


선원: (천천히 일어서서 수평선 사방을 둘러본다.) 없는데요. 배 한 척도 보이지 않아요. (그는 다시 앉아서 침울한 멜로디로 흥얼거린다.)


댄서: (절망에 빠져 운다.) 하느님, 지긋지긋해요.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 말이에요.


신사: 정말 그렇소. 그러나 기다려 봅시다.


댄서: 왜 자꾸만 기다려 보자고 말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구조될 희망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신사: (지쳐서) 난 일생 내내 많은 것을 기대해 왔었소. 항상 헛된 희망이었소. 우리는 난파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소. 난 항해 경험이 별로 없지만, 승선이 누군가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항로로 우리가 가고 있다는 하는 것을 들었소.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아마 선장이 더 빠른 항로를 택하고 싶어서 그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만이 자기 생각을 알고 있었을 텐데, 아마 그는 결코 말하지 않을 거요.


댄서: 그렇겠죠. 그는 결코 말하지 않겠지요.


신사: 당신은 어찌 그리 단정적으로 말하는가요? 그는 구명보트로 탈출한 사람들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댄서: 그는 탈출하지 않았어요. 그는 죽었거든요!


신사: 죽었다구요?


댄서: 그래요. 그가 선교에 있었거든요. 그가 램프 아래 서 잇을 때 그의 얼굴을 보았던 기억이 나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일그러진 얼굴이었어요. 그는 가늘고도 떨리는 목소리로 뭔가 명령을 해댔어요. 아무도 그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나서 그는 자살을 했어요. 나는 그 순간을 보았어요.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들이 외쳐대는 소리 너머로 그가 자살했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 다음에 난 기절했구요.


신사: 불쌍한 선장!  죄책감을 느꼈음이 분명해. -자살한 걸로 봐서 말이오. 죽어가는 사람들이 외쳐대는 소리를 듣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을 거요. 그가 자살했다는 게 이상할 것도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