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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3)/번역극

김영관 2009. 4. 14. 14:41

               안개(3)

 

                    유진 오니일 극/ 실개천(김영관) 번역

 

시인: 아니요. 그럴 리 없소.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가  없지 않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짐작하듯 안심의 미소가 갑작스럽게 그의 얼굴에 나타난다.) 이제 알겠소. 얼음이 녹아 부서지고 있는 소리요. 저 것은 물 속으로 녹아떨어지는 얼음 조각 소리요.


사업가: 얼음이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었는데. (이런 생각에 그는 공포에 질려 갑자기 벌떡 일어선다.)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우린 산산 조각이 날 거요. 기회를 보아 수영을 하겠소. 원하면 당신은 여기에 남아 죽든지 알아서 하시오. (새로운 위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신이 나간 그는 보트의 뱃전 위에다 한발을 올려놓고 물속으로 뛰어 들려고 한다. 그때 시인이 그이 팔을 붙잡아 끌어당긴다.) 붙잡지 말아요! 죽고 싶으면 당신은 여기 있으시오. 나를 죽이고 싶소? 살인자 같으니.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린다.)


시인: 바보 천치 같은 사람! 이런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서 당신은 5분도 헤엄쳐 갈 수 없소. (더욱 친절하게) 이리와요! 정신 차려요! 어른답게 행동하세요! (사업가는 한숨과 흐느낌이 교차된다. 무적 소리가 다시 울릴 때 더욱 더 접근한 것처럼 보인다. 사업가는 희망이 보이는 무적 소리에 삶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을 갖고 고개를 쳐든다.)


사업가: 배가 다시 우리 아주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소.


시인: 그렇소. 잠시 전 나도 노받이로 얼음을 부시고 물을 치는 소리를 들었소.


사업가: (희망에 차서) 그들이 보트를 띄운 모양이요. (그가 말하는 순간 안개가 갑자기 걷힌다. 해가 수평선 위에 방금 떠오르고 그들 뒤에 빙하가 있다. 푸른빛이 감도는 잿빛 바다 위에 하얀색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녹아가는 얼음장의 물줄기에 의해 조각나서 떨어져 나가는 방하 평면이 마치 거대한 바이킹 사원의 외곽처럼 보인다.)


시인: (그와 사업가는 등을 얼음 쪽으로 향한 채  마치 자신들의 행운을 믿을 수 없는 듯 물위의ㅣ 뭔가를 바라보고 있다.) 증기선이 저기 보이는 군. 사분의 일마일도 안되는 곳에 말이요. 다행스러운 일이요!


사업가: 당신이 들은 소리는 보트 소리였소. 보시오! 우리를 향해 똑바로 노를 저어 오고 있소.


시인: (당황한 표정으로 거의 중얼거리듯)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목소리: 거기 별 일 없소?


사업가: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안녕하세요!


목소리: (더욱 가깝게 - 노 젓는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린다.) ‘스타랜드“ 호에 탔던 사람들이요?


사업가: 그렇소. (용기를 내어 그는 자신에 찬 도시인의 생기를 되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의 이중 턱을 한 둥근 얼굴은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뜻밖에 삶을 되찾게 된 결과에 확신이 서지 않는 듯 시인의 얼굴은 쳐지고 우수에 젖어 있다. 시인 쪽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결국 나의 낙관주의가 옳았다는 걸 당신도 알거요. (시인의 차분한 표정 앞에서 당황해지며)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사소한 불쾌함은 잊어버립시다. 내가 다소 흥분해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겠소. (그는 확신성이 없이 손을 내민다. 시인은 조용한 미소를 머금으며 사업가의 손을 잡는다.)


시인: (짤막하게) 모든 걸 잊었소.


사업가: 고맙소. (그들을 반겼던 목소리에는 약간 명령조가 섞여 들려온다. 노 소리가 멎고 잠시 뒤에 그들이 타고 있던 구명보트와 비슷한 선원들을 가득 실은 보트에 그들이 탄다. 그리고 선원들이 가득히 탄 또 다른 보트가 그들 옆을 따라 온다. 삼등 항해사임이 분명한,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조종실 안에 있다.)


사업가: (쾌활하게) 안녕하시오! 정말 반갑소.


항해사: (빙산이 솟아 있는 쪽을 바라보며) 상륙하기에는 이상스러운 섬을 고르셨군요. 어쩌다가 이렇게도 가깝게 와 있는 거요? 춥지 않았소?


시인: 우리는 안개 속에 표류 됐는데 노가 없어서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소. 그때 바로 당신네 배의 무적 소리를 들었소.


사업가: (여자의 모습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저 여잔 아픈가요?


시인: 저 불쌍한 여인은 잠이 들었소.


항해사: 아이는 어디 있소?


시인: 그녀 품안에 있소. (그리고 나서 놀라서)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알지요?


항해사: 어린애가 아니었으면 우린 당신들을 발견치 못했을 거요. 어째서 당신들은 소리를 쳐서 알리려 하지 않았소?


사업가: (진지하게) 당신네들이 우리 쪽으로 오다가 빙하에 부딪칠까 염려돼서 그랬소.


항해사: 그렇지만 우리가 전혀 짐작을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 했지 않소.


사업가: (감동되어) 그런 경우에도 사람이란 기회가 있는 법 아니겠소. (시인은 말없이 미소를 띠운다. 항해사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항해사: 당신들은 참으로 훌륭한 분들이라고 칭찬해야겠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을 생각하는데 말이요. 사실, 어린아이 울음소리만 없었더라도 그냥 지나칠 뻔 했소. 애가 일등 항해사와 교각에 서 있었소. 우리는 이 빙산에 대한 경고를 받았소. 안개가 끼자 우리는 거의 기어가다 시피 속도를 줄었소. 그리고 가끔씩은 거의 멈추다 시피 하기도 했소. 주위가 적막하여 멈추어 있는 동안에 우리는 울음소리를 듣고 일등항해사한테 말했소.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라고 말이요. 그러자 그도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소. 점점 더 분명하게 들려 우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소. - 모든 게 너무 조용하고 안개는 짙게 깔린 가운데 들리는 게 이상했소.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이런데서 울음소리가 들려 올 수 있을까요?”라고 다시 일등항해사에게 말했지요. 그리고나서 우리 둘이는 아직도 구조 받지 못한 스타랜드 호의 생존자가 있는지 조사해달라고 명령받았던 걸 생각해냈소. 그래서 일등항해사는 “아마 스타랜드 호에 타고 있는 불쌍한 생존자들로 들려오는 소리 같은데”라며 구명보트를 바다에 띠우라고 명령 했소. 난 나침판을 가지고 구명보트를 탔소.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소. 여보게들, 안 그랬나? (승무원들을 향해 그가 말한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을 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곧장 당신네들을 향해 왔던 연유랍니다. 나는 소리를 듣고 배를 몰고 왔소. (항해사가 이야기 하는 중에 사업가는 얼굴에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를 바라본다. 그는 항해사가 놀리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확인이라도 하듯이 시인을 향한다. 그러나 시인은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항해사의 설명을 들은 뒤 여자 쪽으로 재빨리 걸어가서 그녀 어깨 위에 걸쳐준 자신의 외투를 접어 들고, 그녀를 깨우려 한다.)


항해사: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을 짐작하고) 그렇게 하시오. 그녀를 깨우는 게 좋겠소. 배가 우리를 태우러 올 거요. 그녀가 추위 때문에 굳어져 있을 거요. (그는 승무원 한 사람을 향해) 이 구명선과 줄을 연결꼭지에 매게. 그녀를 옮겨야 할 걸세. (선원이 손에 밧줄 코일을 가지고 스타랜드 구명보트로 들어온다.)


시인; (여자를 깨울 수 없자 그는 그녀의 맥박을 짚어보고 그녀의 심장 맥박을 들으려 몸을 굽히고 그녀 가슴에 귀를 갖다댄다. 그는 결국 일어서서 두 사람이 몸을 내려다보면서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불쌍한, 그러나 행복한 여인네. (항해사와 사업가는 그를 바라본다.)


항해사: (날카롭게) 괜찮소?


시인: (부드럽게) 저 여잔 죽었소.


사업가: 죽다니! (그는 보트 끝에 굳어져 있는 두 사람을 질겁하여 바라본다. - 그리고나서 다른 보트로 비틀거리며 기어 올라가 항해사 옆에 선다.)


항해사: 참으로 안됐군! 그러나 어린아이는 물론 괜찮지요?


시인: 어린아이는 이미 24시간 전에 죽었소. 그 아이는 어제 새벽에 죽었소. (이번에 놀란 사람은 항해사이다. 그는 시인을 동정하듯이 쳐다보다가 사업가 쪽을 바라본다.)


항해사: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을 가리킨다.) 저 사람 머리가 존 돈 것 아니요? 저런 상태로 너무 오래 있었으니 말이요.


사업가: (엄숙하게) 그는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 거요.


항해사: (미친 사람이 한사람이 아니라 둘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물론 그렇겠지요. (끌어 올리는 밧줄을 고정시켜 매고 있는  선원에게) 다 됐나? (선원은 “ 예 다 됐습니다” 라고 말하고 자기가 탄 보트로 뛰어 들어간다.) (항해사가 시인을 향한다.) 이리 오시오. 거기 계속 서 잇을 생각이요?


시인: (부드럽게) 죽은 사람들과 같이 타고 싶소. (그는 갈망으로 가득한 눈으로 말 없는 두 얼굴을 바라보며 뻣뻣이 굳어있는 두 사람 반대편에 앉아 있다.)


항해사: (중얼거린다.) 행복한 거지로군! (그는 승무원을 향한다.) 자 출발이다. (노가 물살을 가른다. 두 대의 보트가 빙산으로부터 재빨리 미끌려 멀어져 간다. (신선한 아침 미풍이 주의를 기우리는 귓전에 울려 퍼진다. 그러나 그의 말 속에 뭔가 잘못된 바가 없다는 사람의 확고한 말투이다.)


사업가: 사실이요. 내 말을 용서해준다면 항해사 양반, 당신이 우리에게 해준 아이 울음소리 이야기를 우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이해하게 될 거요.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