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희곡쓰기에 관하여
1. 들어가는 말
셰익스피어가 "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를 잠시 우쭐대며 걷다가 사라져 가는 배우에 불과한 존재"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가 배우이고 세상이 무대라는 그의 주장에 의하면 문학의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연극만큼 우리 삶을 절실하게 대변하는 문학 장르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네 삶을 절실하게 재현 시키기 위한 연극을 위해 만들어진 대본이 바로 희곡이다. 다시말해 희곡작품은 문학 장르이면서도 공연을 염두에 두고 쓰는 매우 독특한 장르의 예술이다.
극에 대한 여러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가장 전통적 의미의 정의를 내리라면 나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린다.
"극이란 배우가 무대위에서 이야기(원인-결과)를 정해진 시간 동안에 말과 행동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배우, 극장, 이야기, 시간의 길이, 말과 행동, 관객, 연기가 있어야 하는 예술이고 이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희곡인 것이다. 짧은 두 이야기 인용을 통해 필자는 희곡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쓰여지는가를 밝혔다. 좋은 희곡 창작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것들을 소개해보겠다.
2. 희곡의 흐름에 관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융성했던 연극이 영화의 등장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TV의 등장은 한때 연극의 존립까지 위태롭게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극에 종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들까지도 영화나 TV의 즐거움과 연극의 재미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들이 서로 보완해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영화나 TV도 드라마라는 큰 영역 속에 포함시켜 공존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 20세기 말 현재의 상황이다.
20세기말까지 세계는 시와 소설처럼, 드라마도 여러 변혁을 겪었다. 훌륭한 극 창작을 위해서는 고전 및 그 관행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태리 및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신고전주의, 거기에 반발하여 등장한 낭만주의, 그리고 모더니즘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며 20세기 세계를 풍미했던 사실주의, 사실주의의 주장에다 유전과 환경, 즉 운명을 중시하는 자연주의, 그리고 사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5감으로 식별할 수 있는 것만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려는 한계에 반발하여 인간은 그 이상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상징주의, 허무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 부조리, 해프닝 등, 20세기는 한 마디로 드라마의 모든 아방가르드적 실험을 다 걸쳤던 시기이다. 그렇게 해서 외설, 누드라는 극한까지 경험한 드라마는 이제 그때그때 그 작품에 가장 필요한 기법을 동원해서 창작 및 공연을 하는 절충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3. 시대적 상황과 극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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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한 세계적 추세와 더불어 우리나라 역시 20세기는 수많은 사회적 격동과 변혁을 겪었다. 일본 침략, 이씨 왕조의 몰락, 해방,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 이승만의 장기 집권 음모로 인한 3선 개헌, 이에 반발한 4.19, 그리고 시대를 역행한 5.16 군사 쿠데타, 그들의 몰락을 가져온 김 재규의 박 정희 암살, 서울의 봄, 다시 군인들의 집권,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역사는 숨 가쁘게 민주화 욕구와 그들의 숨통을 조이는 반민주 세력간의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양의 경우와는 달리, 짧은 기간동안에 서양의 오랜 전통의 수많은 "이즘"(주의)의 실험들을 미숙하게 수용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고, 작가가 신변잡기 이상의 진지한 작품을 쓰는 데는 권력의 칼날 반대편에 서야하는 그야말로 용기가 필요한 시기가 있었다.
이런 사회적 격동기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큰 족적을 남긴 극작가들이 다수 있다. 일제 시대의 애국 및 계몽적 입장의 김 우진, 6.25의 비극을 몸소 겪으며 그 처참한 아픔과 그 이후로 내내 계속되고 있는 동족간의 갈등을 그린 차 범석, 시대의 아픔과 더불어 개인 갈등을 그려나간 오 영진, 오 태석, 인간의 내면적 고뇌 표출에 관심을 보인 이 근삼 등이 그들이다. 가히 글로벌 시대라 할 수 있는 21세기에는 "통일", "환경문제" "국제적 문제"등의 주제가 극작가들의 주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좋은 극 쓰기를 위한 몇 가지 제언
G.B. 테니슨은 자신의 저서 An Introduction to Drama 에서 극의 구성성분을 이야기 하면서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열거한 6가지 성분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6가지 성분이라는 것은 1) 플롯, 2) 사상, 3) 등장인물, 4) 언어, 5) 음악성, 6) 장관이라는 것이다. 극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이 6가지 구성성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플롯에 관하여
건축처럼 극작에도 설계도가 필요한데 그것이 곧 플롯이다. 극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쓰는데 어떤 설계도하에서 써 나가야 할 것인가를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흔히 <프레이타그의 플롯 5단계 이론>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도입부, 흥미유발부분, 상승부, 클라이맥스와 전환점, 하강부, 반전부, 결말부에도 염두를 두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단순 플롯, 복합 플롯, 단일 플롯, 이중 플롯, 느슨한 플롯, 타이트한 플롯 중 어느 형태로 써야할 것인가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2) 사상에 관하여
사상이란 작가가 관객들에게 전달코자 하는 메시지나 작품 주제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인과응보, 권선징악을 위한 복수극이라는든가, 셰익스피어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인간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라는 말하고 싶었다는 등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최후의 작품 <템페스트>에서는 이의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3) 등장인물에 관하여
등장인물을 "성격(charact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등장인물은 자신의 성격을 잘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햄릿은 아버지의 독살자인 숙부 클라우디스에게 복수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회개중인 숙부를 죽이면 그가 천국으로 가고 억울하게 독살을 당한 아버지는 영원히 천국 갈 기회를 놓칠 것이라는 중세 유럽인들의 믿음 때문에 그는 복수의 기회를 미루게 되고 결국 자신까지도 죽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래서 햄릿을 “우유부단한 인물(성격)”로, 리어왕은 딸들의 진실된 말과 거짓된 말을 구별 못하는 “통찰력 부족의 인물(성격)”, 맥베스는 "지나친 야망의 인물(성격)", 오델로는 아내의 손수건이 친구 캐시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질투하는 인물(성격)"로 묘사되고 있다. 극작품은 주인공 성격을 관객에게 얼마나 잘 드러나 보이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극의 초반부터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변함 없는 악인을 우리는 flat character, 처음에는 악인이었지만 극 후반부에 가서 참회하여 선인이 되는 경우를 round character라 하는 것도 극 쓰기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4) 언어에 관하여
희곡은 무대지시와 행동지시 부분만 문장체이고 극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말, 즉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좋은 극 쓰기의 주요 관건 중에 하나가 바로 대화체(dialogue)인 것이다. 훌륭한 극에서는 예외 없이 등장인물이 교육과 직업, 환경에 걸 맞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줌ㄱ할 필요가 있다. 농부가 그 시대의 최고 엘리트의 품격 높고 현학적인 언어구사력을 갖게 한다면 자연스러운 극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J.M. 싱의 <바다로 간 기사들>이라는 작품은 아일랜드의 서쪽 외딴 섬사람들의 교욱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그린 작품인데 싱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섬사람들의 교육받지 못한 비문법 언어, 사투리, 섬사람들의 미신까지를 연구하기 위해 그 섬에 세 번이나 찾아가 극을 쓰기 전에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음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5) 음악성에 관하여
그리스시대엔 코러스라는 것이 있어서 극작에 음악이 필수적이었지만 현대극에는 음악은 필수사항이 아니다. 그렇지만 음악이 극에 있음으로 인해 극이 유해한 것은 아니고 또한 넓은 의미에 있어서 극에 나타나는 리듬과 반복이 음악성을 이루는 경우들가 있다. 미국의 최초의 부조리 극인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 이야기>에서 제리는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동물원에 다녀왔다."는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극비평가들은 이 작품의 음악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6) 장관에 관하여
오늘날은 “장관(spectacle)'이라는 말 대신에 무대, 무대장치, 의상, 소품, 음향 효과등을 지칭하고 있다. 극 공연 중에 관객이 보고, 듣고, 느끼는 이러한 총체적인 것들을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단어로 지칭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극은 작품으로 있을 때는 희곡이라는 장르로 존재하지만 언제든지 공연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이니 극작가들은 극작과정 중에 자신이 배우가 되기도 하고, 연출가도 되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4. 나오는 말
기성 작가나 작가 지망생들의 "문학의 꽃은 시"라는 그릇된 생각이 우리 문인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문학의 융성기 시절의 영국을 보라. 모든 장르의 문학이 고루 발달했고 셰익스피어는 희곡 작품을 쓰면서도 그 모든 언어가 다 시이다. 작가나 작가 지망생들은 모름지기 동서고금의 모든 장르의 작품을 고루 읽어 그것들이 머리 속에 용광로처럼 녹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필요할 때 거기에 맞는 소재를 거기에서 끄집어내어 자신에게 맞는 장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희곡 작가로서의 치열한 창작 의욕과 폭넓은 실험 정신의 결여가 오늘날 우리 희곡 장르를 침체케 만들고 있지 않나 싶다. 희곡 작가들 스스로가 다른 장르에 심취해 있거나 희곡에 매력을 잃은 듯하다. 희곡 작가로 계속 활동하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자신의 껍질에서 과감히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만의 틀과 관행에 안주해 있다.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작가 정신으로 진정 독자들이 원하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와 소재는 과연 무엇인지, 이의 표출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택해야할지, 고뇌하는 진지한 희곡작가가 더 많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소설은 소설로서의 읽는 재미가 있듯이 희곡 작품은 그 나름대로의 감상의 즐거움이 있다. 책으로 읽을 때는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즐거움이 있고 읽어 가는 도중에 머릿속에 공연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매우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드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미 읽었던 희곡 작품이 연극으로 공연되는 경우에 그것을 관람하는 순간 작품으로서 읽었던 것이 구체적인 배경과 인물로 그리고 액션을 통해 생동감 있게 무대에 재현되는 경이로움에 또 한번 독자들은 연극의 진미를 느끼게 된다. 독자들이 희곡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가져 줄 때만이 계속 훌륭한 극작가들이 배출 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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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연극만을 극으로 보지 않는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모든 것, 심지어는 올림픽 전야제, 월드컵 전야제 등 이벤트성 행사까지도 드라마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두 시간을 관객과 시청자들의 관삼을 사로잡기 위해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이룩하는 종합 예술성이라는 점에서 이것까지도 드라마로 포함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케이블 TV를 포함하여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드라마 작품의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로 볼 때 드라마는 앞으로 매우 전망이 있는 장르라 할 수 있겠다. 미국에서는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일년 예산만큼의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21세기에는 우리 희곡도 가히 서구의 희곡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 그래서 세계가 우리나라 문학을, 우리나라 희곡을 주시케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극작가들도 세계 극작가들의 반열에 서야하고 노벨 문학상(희곡부문) 수상도 결코 남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님을 증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