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오니일과 그의 딸 우나 채플린
김 영 관
퇴직과 함께 연구실을 비우면서 많은 책들을 후진들에게 물려주거나 버리고 애정이 남아있는 몇 권의 책들을 집에 가져다놓고 그동안 거들떠보지 못하였다. 어느 날 무언가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권의 책, Louis Sheaffer가 쓴 『O'Neill』이 우연히 내 눈에 띄었다.
미국 필라델피아 벼룩시장에서 책 주인이 초판본이라 소장하면 훗날 희귀본이 될 거라며 상당한 금액을 요구해서 잠시 망설이기도 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이 책을 다시 들춰 보는데, 그 속에 실린 흑백 사진 한 장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건국 초기 미국은 유럽에 비해 문화가 조야한 편이었다. 수준 높은 예술 작품들이 유럽에 선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신파조의 소설이나 연극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일가족, 그런데 그 이민 생활이 고되 견디지 못하고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혼자만 아일랜드도 돌아가 버린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와 더불어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휴일 이 젊은이가 당구를 치고 있는 곳으로 이곳 읍내에서 극 공연 중이던 유랑극단 관계자 몇 사람이 들어선다, 단역배우가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출연할 수 없게 되어 대역 배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과 만남으로 이 젊은이의 인생행로가 바뀌게 된다.
비록 처음엔 단역으로 출발했지만 훗날 관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알렉산더 듀마의 『몬테 크리스트 백작』 주연 배우가 된다. 이 극을 통해 그는 부와 명예을 얻게 되었고 이 극을 미국에서 자신만이 공연할 공연권을 사서 평생 이 역만을 맡아 하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 최초의 노밸 문학상 극작가 유진 오니일의 아버지 제임스 오니일이다.
섬에 감추어진 보물을 손에 넣게 되는 순간, “이 세상은 내 것이다”.(The world is mine.)라고 무대에서 에드몽 단테스가 소리칠 때 관객들은 환호를 했다. 자신의 파멸에 가담했던 인물들을 하나씩 제거해 가는 과정에 관객들은 대리만족을 느낀다.
아버지의 연극을 보면서 자란 유진 오니일은 아버지의 연극보다 더 훌륭한 차원의 극을 써보겠다는 포부를 갖는다. 자신의 가족사를 그린 작품이 바로 “밤으로의 긴 여로”이며 여기에 제임스 타이런(James Tyron)이름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미국 연극계를 휩쓸었던 몬테크리스트 백작이다. 아들 타이런에게 돈 때문에 세익스피어 극 배우가 될 소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먼 단테스 역에만 얽매어 산 자신의 삶을 회한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유진 오니일은 두번째 결혼을 기자 출신인 아그네스 볼튼(Agnes Bolton)과 하는데 그들 사이에 자매까지 태어났지만 성격이 맞지 않아 이혼을 하게 된다.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자란 딸 우나(Oona)는 아버지 나이 뻘인 찰리 채플린과 결혼을 한다, 아버지 오니일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나는 결혼을 고집했는데 아버지에 대한 우나의 반발심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채플린과 우나 사이에서 여섯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우나는 아버지와 화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진 오니일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녀를 결코 만나주지 않았다.
루이스 쉬에퍼가 쓴 『오니일』(1973)의 책장을 넘겨가던 나는 오니일의 딸 우나(Oona)가 남편 찰리 채플린과 스웨덴 공항 대기실에서 아이들과 함게 찍은 사진을 보다가 제일 왼쪽에 선 그들의 큰 딸 제랄딘(Geraldine)에서 내 시선이 멈춘다. 그녀가 훗날 오마 샤리프 주연의 <닥터 지바고>에서 아내 토냐로 출연한다는 생각을 한다. 순간 눈이 시릴 정도의 설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라라의 테마곡’이 아련히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오마 셔리프와 쥴리 크리스티, 제랄딘 채플린 주인공의 <닥터 지바고> 극 감상을 시작한다. 자막에 떠오르는 지바고에 오마 샤리프, 라라 역에 줄리 크리스티, 타냐 역에 오니일의 외손녀이자 우나와 채플릔의 장녀인 제랄딘 채플린이란 이름들을 읽어가며 닥터 지바고 감상에 빠져든다. 영화 속에 펼쳐지는 설경이 러시아가 아닌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라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있지만 그 장면들을 평생을 잊지 못할 것이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러시아 왕정 국가의 몰락과 공산주의자들 간의 투쟁기 시절 속에서도 지바고와 라라의 지고한 사랑에 나는 감동한다. 사랑했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떠나보내야 헤어져야 했던 지바고는 이복 형이 마련해준 모스코바에서 직장을 얻는다. 출근 중 전철을 타고 가는 라라를 보고 뛰어 가던 그는 약한 심장으로 인해 숨을 거둔다. 지바고와 라라 사이에 태어난 딸 아이를 찾기 위해 라라는 지바고의 이복 형 예브그라프를 찾는다.
몽고에서 자라 이곳 러시아의 공장에서 근무하는 토냐에게 지난 날 엄마 라라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지바고가 어린 시절 바리키노에서부터 지녔던 발랄라키라는 악기를 소지하고 있고 누군가로부터 배운바는 없지만 선천적으로 그 악기를 잘 다루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녀가 지바고와 라라 사이의 딸임을 암시한다.
불란서를 비롯한 외국 여러 나라에서 시인 지바고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지인의 들의 도움으로 지바고의 아내 토냐는 아들 사샤와 그 이후 태어난 딸아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떠나게 되며 이 사실을 그녀는 남편에게 알리기 위해 라라 집으로 편지를 보낸다.
혼란스런 공산주의 국가 시절 하의 지식인인 지바고의 고뇌는 바로 이 소설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자신의 고뇌이기도 하다. 그는 195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지만, 수상식장에 가면 다시는 고국에서 돌아 올 수 없을 거라는 정부 당국의 압력 때문에 문학상 수상을 거부해야 했다. 닥터 지바고의 불행한 삶은 바로 이 작품의 작가 자신의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진 오니일』이라는 저서에 소개된 우나 체플린의 가족사진 한 장으로 출발한 오니일 가족사에 얽힌 내 연상 작용은 영화 『닥터 지바고』, 『몬테 크리스트 백작』, 『밤으로의 긴 여로』까지 흐른다.
긴 여로의 내 연상 작용이 끝날 무렵, 창밖엔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약력
* 조선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문학박사
*한국문협 문인극 기획위원
*국제펜 한국본부 자문위원
*국제펜 광주 위원회 고문
*셰익스피어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