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극>
독백
김 영 관
등장 인물: 80대 초반의 노인
시간: 2022년 2월말
장면1
노인: 안녕하세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내가 누구냐구요? 예전에 이 연구실 주인이었던 사람이랍니다. 청춘을 다 바쳐 이 직장에 봉직하다가 정년 후 뉴질랜드로 이민가 살다 20 년 만에 잠시 귀국해 이곳에 찾아 온 노인이랍니다. 여기 좀 앉아도 될까요? 지금 선생님께서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계절이 오가는 것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곤 했던 사람이랍니다. 연구실 가구배치가 많이 바뀌어졌군요. 저기 저 자리에 책상이 두 개가 있었고 오른 쪽 책상 위에 컴퓨터를 놔두고 작업을 주로 했었는데. 한번은 이상한 누드 사진 메일 몇 장이 들어 와서 그걸 지우려다가 뭔가를 잘못 눌렀는지 화면이 갑작스럽게 확대되어 떠올라서 잠시 바라보고 있었는데…그 순간 여자 조교가 들어와 내 책상 쪽으로 걸어오는 것 있죠? 빨리 삭제해야 겠다 싶어 컴퓨터 키 아무데나를 눌러 댔답니다. 아마 내가 몹시 당황했던지 그게 지워지지는 않더라구요. 조교는 내 쪽으로 걸어오면서 내게 전달할 공문이라며 그쪽, 지금 선생님께서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 쪽으로 그걸 가지고 걸어오는 것 있죠? 직무에 충실치 못하고 포르노 사진이나 보는 음흉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른답니다. 엉겁결에 야하기 그지없는 화면을 가리고 서서 공문을 받아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저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시는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나는 정년과 더불어 떠나온 학교 후배 교수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이 연구실 근처를 단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떠날 때는 미련 없이란 말이 이런 경우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이 직장에 좋은 추억만을 간직하고파 그 아름다운 추억들을 책 보따리와 함께 싸 가지고 정년하던 해 2월 말일, 맞아요 그해는 29일까지 있는 해였으니 더욱 더 생생히 기억납니다. 29일날 인문대 행정실 팀장에게 열쇠를 인계하고 이곳을 훌쩍 떠난지 정확히 20년만입니다. 그러니 이 방을 들어서는 순간의 내 감회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하실 수가 있을 겁니다. 이번 방문 후 내 나라를 떠나면 이곳과는 영원한 이별이 될 거라는 예감입니다. 내가 불쑥 찾아와 선생님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무례함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생님, 정말 나와 내 저서에 관해 전혀 아는바가 없으신 가요? 내가 쓴 논문 읽어 본 적이 없으신 가요? 내 학위 논문이 <오니일과 니이체>이었는데... 학위 논문 통과되던 날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내 논문을 심사하시던 심사 위원장님은 학계에서 알아주시는 분이었답니다. 그 분을 비롯하여 심사 위원님들 모두가 내 손을 잡고 그 동안 수고 많이 하였다며 앞으로 유망한 학자가 될 거라며 격려의 말씀들도 많이 해주셨답니다. 그런 나를 몰라보시는가요? 그 뒤로도 나는 유진 오니일의 극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만, 전혀 들어보신 적이 없으시다구요?
지금은 모두 치워지고 없습니다만, 저기에 내 책장이 있을 당시에는 영미 현대 희곡 작가들의 작품집들이 가득했지만 오니일의 작품집과 그에 관한 연구 서적들이 주로 이었답니다. 내가 미국에 교환교수로 펜실바니아 대학에 가 있으면서 도서관에서 그에 관한 연구 서적들을 수 백권 복사해서 한국에 돌아와 제본을 해 저기 저 책장에 가득 채웠거든요.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유진 오니일은 유럽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던 20세기 초 미국의 조야한 극을 몇 단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극작가가 아닌가요? 그가 입센이나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고, 또 니이체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지, 그리고 그의 극 어떤 점들이 훌륭해서 미국에서 희곡부문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지에 대한 연구에 열정을 바친 사람입니다. 물론 정년퇴직하면서 소중한 책들 상당량을 여러 기관에 다 기증하고 거의 빈손으로 훌쩍 연구실을 떠나긴 했지만요.
그런데 말입니다. 내 논문을 심사하시던 심사 위원장님 말씀입니다. 그분은 영미 드라마에 관한 훌륭한 논문으로 후학들에게 이름을 떨치시던 분인데 어느 날 내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토로하셨답니다. 논문에 흥미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영미 평론가들이 발표해 놓은 글들 이리 저리 짜깁기해서 논문을 완성해 놓고는 이게 과연 자신의 글인가 싶더래요. 그렇지만 그 분께서는 자기극을 써 갈 때 그 기쁨은, 그리고 그 극을 완성시켰을 때의 즐거움은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이 컸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기질이 보이니 극작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땐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그 어른 말씀에 대한 대접으로 “노력해 보겠습니다” 라고 대꾸해드렸을 뿐이었거든요. 영문과 후학들에게보다는 지금 국문과 박사학위 논문에서 그분 극작품 연구를 할 정도로 그분 작품이 높게 평가를 받고 있답니다. 세월이 지나 놓고 보니 그분 말씀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게 해주었는지 알겠더라구요. 단 한 줄을 써도 내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있죠?
그리고 내가 미국에 교환교수로 1년 체류 중이었을 때인데…미국 어디에 있었느냐구요? 아까 내가 잠깐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필라델피아라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내가 교포 서점에 가끔씩 들렸는데. 그곳에서 내가 깜짝 놀랐던 것은. 나와 같은 대학에 근무하시는 원로 문인 교수님 한 분의 작품집이 그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겁니다. 물론 그분께서 유명한 시인인 줄은 나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그 분께서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계시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겁니다. 이분은 세상을 떠나더라도 작품은 영원히 남을 그런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그래서 내가 다시 한국에 돌아 와서는 논문보다는 작품을 주로 써야겠다는 결심했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음악가나 미술가, 그리고 건축가의 삶처럼 문인의 삶도 시공을 초월한 대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겁니다. 잘 아시죠? poet라는 단어가 그리스어인데 maker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세상에 무를 유로 만들어 가는 숭고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poet라는 겁니다.
목이 말라 오는데요. 마실 것 좀 주시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뺏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년하고 처음 올라 와 보는 연구실이라 감회가 깊어서 이리 말을 많이 하는 모양입니다.
그때 해오던 오니일의 작품 번역도 손을 놓고 말았습니다. 그 작업이 힘들기도 했지만, 내가 남의 작품 번역으로 내 삶을 마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 시작한 겁니다. 단 한 줄을 써도 내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연구실을 무대로 쓴 작품이 한 편 있습니다. 그 당시 내 심경의 일단을 피력한 작품이기도 하구요. 내가 지금까지 연구했던 오니일 극작가에 대한 모든 것들을 극에 담아 두고 이제는 그로부터 해방되어야 겠다는 결심의 일환으로 쓴 작품인데…앞으로 시간 나시거든 한번 읽어봐 주실래요?
이 학교에 근무했다가 떠난 선배 교수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 생각하시고 읽어봐 주시면 더 할 나위 없는 내 기쁨이겠습니다. 예전에는 제자들이 내 방 들리면 등장인물을 지정해서 작품을 읽히고 나는 그 작품에 어색한 부분들을 수정하곤 했었습니다. 선생님이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다가는 말입니다.
이제 이 노인은 일어 설테니 시계를 자꾸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세상이라는 무대를 잠시 우쭐대며 살다가는 배우에 불과한 존재라는 셰익스피어의 극 중 멋진 대사 한마디가 생각나는군요. 나도 무대에서 사라질 때를 안 겁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정년이 되자 미련 없이 이 무대를 떠나 버린 겁니다. 이곳에서의 내 역할을 끝냈다 생각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선생님은 이 늙은이의 기분을 모르실 겁니다. 이제 불초소생 일어서겠습니다. 여기 앉아 이리 저리 둘러보니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그 모든 것들이 자꾸만 다시 떠올라 더 이상 여기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는 말도 아울러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젊음과 함께 보낸 그 많은 추억들을 여기에다 묻어 두고 나는 이제 일어섭니다. 선생님께서 나를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조금치도 하실 필요는 조금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대에서 사라지면 잊혀 지기 마련.. 나는 이를 두고 섭섭하다는 마음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혀 두는 바입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오.
장면 2
노인: 경비원 아저씨, 이리 와서 커피 한 잔 드세요. 아까 일은 사과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학교 떠난 지 이미 오래인 나를 알아 볼 수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장사꾼들이 너무 많이 드나드는 곳 감시하자니 머리가 아프실만 하지요. 내가 연구실에서 작품을 쓰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이곳 자판기 커피를 한잔을 빼들고 저 멀리 시내를 내려다보곤 했었답니다. 내 비록 이승을 떠나고 없더라도 내 작품은 영원히 살아남으리라는 즐거움으로 글쓰기에 여념이 없었던 답니다. 어떤 작품들을 썼느냐구요? 내 작품을 한 번도 읽어보신 적이 없으셨겠지요. 그건 그렇고 내가 이곳 연구실을 떠나 집으로 향할 때 비로소 내가 진지한 작품, 작품다운 작품을 쓸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나이 들어 기력이 떨어지니, 이곳을 떠난 다음 글이 쓰여지지가 않더라구요. 이제와 생각해보니 4층 연구실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이곳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저 아래 교정을 바라보던 순간이 내겐 가장 행복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한 편의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나는 마치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는 기쁨에 비유하곤 했으니까요. 작품 속에 새로운 인물이 나로 인해 세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아 존재한다는 그 기쁨을 당신은 모를 겁니다. 한번은 세태 풍자극을 쓰다가 주인공 이름 때문에 고민하던 중, 드디어 좋은 이름이 떠 오른 겁니다. 남자 이름은 망한, 성씨는 허로 해서. 그러니까 허망한, 여자 이름은 사녀, 넷째 딸이라는 의미 외에도 뱀사 자 사녀, 뱀 같은 여자라는 뜻으로 이름을 만들어 놓고 꽃뱀 이야기를 써 간 겁니다. 꽃뱀이 무엇을 뜻하는지 들어 보셨나요? 하여튼 꽃뱀에 관한 작품인데, 주인공 두 사람의 이름을 지어 컴퓨터에 그 작품을 써 가는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여기에 서성이던 내 모습을 당신은 상상하기 힘드실 겁니다. 전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시겠다구요? 당신께서 내 말뜻을 알아듣건 말건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튼 당신이 내게 보인 무관심에 대해 나는 전혀 개의치 않으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리고 늘 건강 하시구요.
장면 3
노인: H읍 소재 C대학 암치료 병원 중앙 주사실 환자 보호자처럼 보이는군요. 맞는 이야기라구요? 환자 못지않게 보호자의 고생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오랜만에 이곳을 찾아왔는데 그때 보다 더 환자들로 가득하여 발 디딜 틈도 없군요. 삶의 질이 개선되고 의술이 발전하면 환자 수가 줄어들어야 할 텐데 예전보다 더 붐비니 원. 제가 누구인지 물으셨나요? 오래 전 아내가 항암 주사를 맞기 위해 이곳에 올 때 늘 동반해왔던 사람입니다. 모처럼 고국에 와 몇 군데 들려보던 차 이 병원 주사실에 들려 본 겁니다. 대기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환자 가족 같아 동병상련의 마음에서 나도 모르게 선생님을 귀찮게 하고 있습니다만 아픈 추억을 더듬는 이 노인네의 넋두리 쯤으로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이 나라를 떠나기 몇 년 전, 건강 검진 결과 이상이 발견되어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 라는 통보를 받고 아내가 병원을 가는데 나는 보호자로 동행을 해서 이 병원에 왔었답니다.. 처음 와보는 병원엔 각 분야마다 환자들이 보호자와 더불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수술 후 링거 병을 달고 걸어 다니는 사람,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 항암 투여주사로 탈모되어 머리에 캡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나는 우울한 눈빛으로 바라봤습니다. 아내와 나는 담당 의사를 만나 정밀 검사 소견을 들었답니다..
앞으로의 치료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데 치명적인 이야기인데도 의사도 간호사도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는 그야말로 무감정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답니다. 난생처음 그런 상항을 접하게 된 내게는 그 모든 현상들이 이 낯설기 그지없었고 로봇만 움직이고 있는 세계에 와있는 느낌이었답니다.
예정된 날짜에 첫 항암 주사를 맞는 날, 7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투여 받고는 주사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의 우울한 얼굴을 쳐다보며 참으로 낯선 곳에 와 있는 나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여일 후 다시 항암 투여를 위해 병원을 찾은 아내는 벌써 병원 환경에 익숙해져 이곳저곳을 불편 없이 찾아다니며 치료받기 위한 절차를 잘도 밟더군요. 보호자 도움 없이도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린다거나 다음 가야할 곳을 안내원에게 묻지도 않고 찾아다닌 겁니다.
어떤 환자와 동반한 사람을 보면서 내게 “금방 내가 아는 체 한 저 사람은 젊은 시절 자신과 함께 교직에 근무한 바가 있는 K 여선생님인데, 20여년 차이가 나는 유부남 선생님과 눈이 맞아 아이들도 여럿 있는 가정을 이혼케 하고 결혼해서 두 아이까지를 두었다나! 곁에 서 있던 머리 하얀 분이 아마 남편일 건데 그분 몸이 안 좋아 병원 온 것 같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주는 여유를 보입니다.
나도, 처음 7 시간여를 아내 침상 곁에서 가슴조이며 투약 과정을 지켜보던 것과는 달리 두 번째부터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을 책을 가지고 가서 틈틈이 읽는 여유까지를 부리게 되었습니다.
주변 환자와 가족들을 곁눈질해 봤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죄인된 표정으로 누워 있는 환자를 보면서는 ‘저 사람 젊어서 가족들에게 많은 잘못을 했나보다.’라든가, 노인 환자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가족들을 보면서는 ‘지난 세월 잘 살아 온 것처럼 보이는데 어쩌다가 저리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까. 하늘이 시샘이라도 한 건가? ‘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바로 옆자리에서 항암 투여를 받는 젊은 남자 곁에는 한국말이 서툰는 동남아 여인이 보호자로 와서 곁에 있음을 보며, 행복 찾아 타국까지 왔는데 참 안됐다. 싶은 생각까지 오지랖을 펴봤습니다.
아내는 링거 병을 안은 채로 화장실도 혼자서 가고, “배가 고프니 지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갑시다.” 했습니다. 사람이란 게 이렇게 극한 상황에도 적응을 잘할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답니다.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무표정하고 지극히 감정이 절제된 표정이나 말투에도 차츰 익숙해져가는 나에 대해서도 놀라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들인 듯싶은 사람이 밀고 가는 휠체어를 탄 어떤 노인환자의 그야말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몰골을 보면서도 별 느낌 없이 나는 그 분 곁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누구에게나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있게 마련이지만, 죽음은 조금 낯선 곳에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암울한 현장을 드나들며 그런 환경에 내가 얼마나 쉽게 익숙해지는지를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답니다.
선생님, 노인네의 넋두리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국에 온 김에 아내와의 아픈 추억이 생각나 이곳에 잠시 들려 잔소리 늘어 놓고 갑니다.
장면 4
노인: 사장님, 여긴 내가 술 고프면 잠시 들려 한잔하곤 했던 곳인데…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 칠 수가 없듯이 내가 지치고 힘든 하루를 잊고 싶을 때면 저기 저곳에 앉아서 술을 마시곤 했답니다. 나를 모르시겠다구요? 이곳을 즐겨 찾던 단골손님들 중 내가 아는 얼굴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어느 비 오는 날 저 자리에 쓸쓸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내 곁으로 다가와 중년의 말벗이 되자고 했던 ..그래서 그 이후로 가끔씩 그녀를 불러내어 같이 한잔씩하곤 했는데…그 여인은 지금도 여기를 찾아오는지 궁금합니다. 사장님께서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 하시겠다구요?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 중에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가요?
장면 5
노인: 여기 도청과 도청앞 광장, 그리고 분수대는 어디로 갔나요? 1980년 5월의 함성 속에 내 소리도 함께 있었는데... 땡볕 더위에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주던 여인네들은 모두 어디 갔나요? 저기 저 자리가 도청이었는데,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 요란스럽게 하늘을 날면서 쏘아대던 기관총 소리하며, 소탕작전 개시 직전이라며 시민들은 일체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던 안무 방송, 최후의 한 사람까지 진압군과 맞서다가 죽자고 절규하던 여인네의 목소리…. 그때 나도 이곳 어딘가에서 서성거렸는데.. 그때 내 얼굴을 본 사람은 없는지요? 그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이 민초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나요?
외국에 나가 살면서도 매스컴을 통해 자주 고국 소식을 접해 봅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의 골이 지금도 내 나라 곳곳에 횡횡하는 걸 느낄 수가 있더군요. 이를 이용하는 일부 몰지각한 정치가들 때문에 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까지 지역감정에 휘둘리고 있으니 원. 다시 찾아온 내 고향 광주. 다른 사람들 보다 광주가 내게 더 감회가 깊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980년 반짝 다가온 민주화 봄, 그리고 군부 세력의 재등장으로 대학에 근무하던 내가 해직되어 7년여 년 만에 복직된 바 있습니다. 호남에 태어나 살아온 사람들이 무슨 대역 죄인이나 된 듯 숨죽이며 살아야 하다니. 지역감정을 유발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불순한 세력들에게 이 늙은이는 분노를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장면 6
노인: 여기 이 사무실에 모여 앉아 있는 당신들은 누구신가요? 내가 아는 분들은 모두 어디에 가고 당신들이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가요? 내가 그리도 사랑했던 문인들과 술 한잔하고프면 이곳을 찾곤 했는데. 그 분들은 모두 어디에 가고 당신들이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가요? 술자리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문학과 사랑, 그리고 인생을 이야기하던 그 사람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 가요? 인생은 가도 문학은 영원하리, 인생은 가도 작품은 영원하리 라고 말하면서 술잔을 기우리던 내 사랑하는 문우들은 모두 어디에 있나요? 어디 가면 그분들을 다시 만나 볼 수가 있나요?
장면 7
노인: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살고 싶다며 평생을 이 집에 살기를 고집하던 내 동생은 어디 가고 낯모르는 당신들이 여기에 살고 있는 건가요? 이미 장성했을 내 그리운 조카들은 모두 어디에 가고 처음 보는 당신이 이 집을 지키고 있는 건가요? 들판에 나가 메뚜기를 몇 꾸미씩 잡아들고 대문에 들어서던 내 형제들은 모두 어디 갔나요? 맑은 영수천에서 여름이면 해지는 줄 모르고 미역 감던 나를 모르시나요? 내 유년시절 나와 함께 고향들판을 내닫던 죽마고우들은 모두 어디에 갔나요? 몸은 비록 떠나 있었지만 마음만은 늘 내가 태어난 고향을 오매불망 그리다가 찾아 왔는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그 누구도 없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인가요?
선생님, 이곳은 내가 1970년 3월 총각 선생으로 부임하여 4년을 근무했던 내 고향 H읍 학교면에 소재하는 H 고등학교입니다. 한 학년 4개반으로 남학생 3개반 여학생 1개반으로 구성되어 시골 학교로는 제법 크고 지방 고등학교로는 제법 많은 학생들을 대학에 합격시켜 지방 명문으로 상당한 이름을 얻었던 학교입니다. 지방 명문고로 이름을 얻는데는 고3 영어담당 선생으로 온 정열을 다 바쳤던 저의 공로도 약간은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저에 관한 명성을 선생님께서는 전혀 들어 보신 적이 없다구요? 1개 반인 고3 여학생 교실에 들어서서는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의 큰 가슴 때문에 내 시선은 줄 곳 창밖만을 향했었답니다. 어느 날은 엄지발가락이 유난히 긴 탓에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수업하던 나는 여학생들이 양말 꿰매주겠노라고 벗으라고 놀려대는 바람에 얼굴 붉히며 됐다며 구멍난 양말을 애써 감추던 기억이 지금도 이리 생생한데... 세월 참 빠르게 흘렀다는 생각입니다. 인생살이 잠시 잠깐.. Life is but a dream.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입니다. 그 당시의 일들을 나와 함께 공유할 사람이 이 학교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하는군요. 선생님, 잠시나마 노인의 넋두리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장면 8
노인: 아버님 어머님 불효자가 왔습니다. 양지 바른 무덤에 누워 계시는 두 분 곁에 내가 왔습니다. 고향 어느 곳에 가 물어봐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출향하여 제법 유명인사가 되어 고향에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 주리라 생각했는데 모두가 낯설어 합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히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어 돌아오니 정작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부모님 묘지 옆에 내 누울 자리 잡아 그 앞에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새겨 놔야할 것 같습니다.ꡒ 물 위애, 모래 위에 헛되이 이름 새기려던 사나이. 여기에 눕다.“
(조명이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