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짝 사랑이라니
김 영관
123ykkim@hanmail.net
우리 인간은 참으로 모순적인 존재라는 생각이다.
슬퍼해야 할 순간에 헤픈 웃음이 나올 수가 있으니 말이다. 시어머니의 상을 당해 곡을 하던 중, 며칠 전 친구들 하고 장난 내기 고스톱 치다가 약간의 돈을 잃었던 일이 하필이면 그 서러운 순간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는 어느 친구의 회한에 찬 푸념에 대해 인간은 누구에게나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고 내가 이야기해 줬다. 사람은 행복한 순간에 불행을, 만남의 기쁨 속에서 이별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잘 생긴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무슨 일에나 낙천적이며 제법 많은 수필을 써서 우리 중년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두 아들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대학을 다니며, 그 사람 또한 세상 사람들이 괜찮은 직장에 다닌다고 인정할 만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사람은 항상 행복한 미소로 직장에 출근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어느 날, 솜씨는 별로 없지만 내 손으로 담근 김치를 그 집 식구들과 나누어 먹고 싶어서 가지고 간 적이 있다. 내가 평소 짐작 했던 대로 검소한 살림이지만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그는 서재에서 나오며 청탁 받은 원고를 쓰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감사의 증표로 최근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에 사인까지 해준다. 책을 건네는 그의 손은 내 마음을 사로잡은 ‘선비의손’ 그 자체였다. 이런 남자와 함께 사는 부인은 얼마나 행복할까 부러움으로 그 집을 나왔다.
도시의 삶이란 게 원래 폐쇄된 생활이어서 바로 앞집 사람들에 대해서도 전혀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쳐도 인사조차 없이 스쳐 지난다.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남의 사생활 따위에 무관심한 지가 벌써 오래 되었다.
우리 친목회 회원들과 일박이일 예정으로 어느 온천지에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곳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명산과 유명 사찰이 있다. 그런데 밤늦은 시간에 그곳 산사를 따라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 여인이 우수에 잠긴 남자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나이 들어도 저렇게 다정할 수 있는 부부는 얼마나 행복할까?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함께 걷는 저 여인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며 기억을 더듬어 가다가 그 여인은 바로 그 사람, 아파트에서 김치를 담가 가져다 준 글 쓰는 사람의 아내라는 것을 순간 기억해 냈다.
그렇다면 지금 저 여인은 남편인 그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저 남자는 과연 누구이며 저들은 어떤 관계일까? 불륜이란 본인들에게는 아름답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추하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저 여자는 지금 자신의 남편을 우롱하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집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그 사람이 너무 안 됐구나! 지금 저 여인과 같이 걸어가는 남자 얼굴을 꼭 기억해 두리라.
그 일이 있는 뒤부터는 그 남자에 대한 내 마음속의 호칭은 ‘불쌍한 남자’ 이기 시작했고 어쩌다가 그와 마주칠 때면 내가 보살펴줘야 할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연민의 감정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 남자를 따뜻한 마음으로 보호해 주리라. 집에 혼자 내팽개쳐진 내 남자가 너무 가여웠다. 그 후부터 음식을 만들어 가져가서 그 남자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어쩌다가 그 남자의 아내와 시선을 마주치게 되면 부정한 여자가 아직도 이 집에 살고 있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예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야 그녀가 하루 빨리 그 남자 곁에서 떠날 테니까 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금슬 좋았던 내 남편과의 사이를 하느님이 시기하셨던지 그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몇 년. 남편 한 사람의 추억만을 아름답게 간직한 채 삶을 마감하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오늘까지 살아온 나는 산사에서 뜻밖의 일을 목격한 이후부터 줄곧 아파트 남자에 대한 내 감정이 사랑으로 변해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변해 있는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 당신의 아내를 믿지 말라고 알려줘야 할 텐데…. 내가 모든 사실을 그 남자에게 알려서 그로 하여금 거짓 삶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케 해야겠는데 하는 마음뿐이었다.
가끔씩 꿈속에서 그들 부부가 헤어지고 대신에 내가 그 집에서 그 사람의 아내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가 서재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나는 차와 과일을 준비해서 그의 곁에 앉아 있거나. 내 남자가 쓴 글을 내게 읽어주고 있다는 꿈과 현실을 아예 구별할 수 없는 순간에 빠져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하곤 했다.
그렇다. 그녀를 그 집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것이 자식들 때문에 가정이라는 허울 속에 살고 있는 그녀에게 차라리 자유를 찾게 해주는 길이며, 한 살이라도 더 나이 먹기 전에 내 남자가 진실한 사랑으로 삶을 살게 하는 길일 것이고. 그런 행복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 밖에 없다는 생각이 온 종일 머리에 가득했다.
여전히 난 또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으니 들어보라는 구실로 그 사람 집을 찾았다. 그와 함께 남보란 듯이 멋진 식당에서 외식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자신감도 내심 갖게 되던 날이었다. 그런데 내가 산사에서 보았던 남자가, 내 남자 부부의 집에 와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그 순간 거의 기절할 뻔했다. 내 남자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자기 집에 온 사람을 소개한다. 자기 처남인데 좋은 회사에 다니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잠시 휴직을 하고 ○○절 근처에 조용한 방 하나 얻어 휴양해 왔다며, 이제 몸이 거의 완쾌되어 회사에 다시 출근하게 돼, 그가 그 동안 염려해 준 누나와 매형에게 인사차 들렀다고 말한다.
이런 사연도 모른 채 나는 혼자서 별의 별 지레 짐작과 공상을 다하고 있었다니 그 사람의 아내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그를 사랑했더라도 아무도 몰래 나 혼자 하는 짝사랑인데 그게 별 대수로운 일인가 라고 변명해 보면서도 얼굴이 자꾸만 붉어지는 이유는 뭘까. 이 나이에 내가 미쳤지. 몇 번이고 되뇌면서도 아직 내 가슴에 연정의 불씨가 남아 있었구나. 애써 무관심한 척했던 봄이 오는 소리를 내심 나는 감지하고 있었지 않았나,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