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와 과거>, 그 경계선 넘나들기
김 영 관
나이 들어가면서 나는 ‘의식의 흐름’ 중 “지금 이곳”과 “그때 그곳”을 끊임없이 넘나들며 어떤 단어라는 기표가 나를 포함한 동시대인들이 갖는 동질적 의미와 나만이 갖는 이질적 의미 사이를 오가는 혼란 속에 더욱더 깊게 빠져들곤 한다. “의식의 흐름”이란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이 즐겨 사용했던 문학기법이다.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작품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델러웨이 부인의 하루 생활과 지난 30년에 걸쳐 그녀에게 일어났던 과거 일들이 의식으로 흐르게 한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의식은 물 흐르듯이 끊임없이 현재, 과거. 미래로 흘러다닌다. 비오는 날 충장로를 우산 쓰고 걸으면서 나는 기억도 아련한 대학재학 시절, 그녀가 내 우산 속으로 뛰어들면서 시작된 우리 첫 만남으로 내 의식은 흘러들어 간다.
미리 예감한 바이지만, 내가 나이 들어 활동 반경이 줄어갈수록 의식의 흐름 활동이 더욱 왕성해감을 실감한다. 그런데 그 흐름이 미래를 향한다기보다는 과거를 향해 흘러간다는 게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 과거로의 흐름이 더 자주 반복되는가 싶더니 요즘은 눈감고 침대에 누워 있기가 바쁘게 과거로의 흐름이 급물살을 탄다. 때론 내가 살아온 연대별로, 또 어느 때는 연대와는 무관하게 뇌리에 각인되어 잊혀 지지 않는 사건 별로, 장소별로 의식이 흐른다. 그 장소라는 것도 고향, 그 이후로 떠나와 지금까지 살아온 광주, 아님 고향과 광주가 순서를 바꾸어 떠오른다거나, 또 어느 땐 두 장소가 동시에 의식 표면으로 부상한다.
미국과 뉴질랜드 체류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는가 싶으면 어느새 나는 그곳 어딘가를 거닐고 있는 착각에 빠져 있다. 내 고향집 산 아래 외딴 집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간 뒤 수 십 년 만에 만난 이수가 유년시절의 고향 이수와, 미국 뉴저지의 세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내가 만난 이수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떠오르기도 한다. 침대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하던 나는 어느새 뉴질랜드 1년 체류 시절로 의식이 흘러 웰링턴 바다 위를 한 마리 갈매기가 되어 날고 있기도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사실은 ‘지금 이곳’의 내가 ‘그때 그곳’을 서성이고 있는 나를, ‘그 때 그곳’의 내가 ‘지금 이곳’의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광주역과 그 길 건너편 모아 아파트 사이를 운전해가면서 나는 아주 오래전 태봉산과 S 고등학교 교정을 머리에 떠 올리며 그 시절 그곳에 고등학교 재학 시절의 내가 되어 거기에서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다시 말해 <현재 이곳의 나>와 <과거 그곳의 내가> 내 의식 속에 공존하며 끊임없이 경계선을 넘나들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바로 얼마 전, 북구 유동 북성 중학교 교문 앞을 지나다가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를 잠깐 세웠다. 북성 중학교 길 건너편 약간 위쪽에 태평의원, 그리고 북성 중학교 정문 쪽으로 조금 걸어내려 오면 문방구, 시계방 등이 있었는데. 그리고 정문까지 돌아가기가 싫어 북성 중학교 후문 약간 기울어진 담을 뛰어 넘어 들어가 철봉대와 평행봉대에 매달리며 먼 훗날 나는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되어 있을까를 그려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골목과 뒷담 일부만이 남아 있음을 보며, 세월 흐름에 무관심했던 내가 흘러간 세월을 아쉬워하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승을 하직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한줄기 바람이 되어 행여 무등산을 지나다가 잠시 이곳 광주라는 도시에 머물렀던 기억을 떠올리는 경우는 없을까 하는 그야말로 내 의식은 미래의 한 순간까지로 비약해 흘러간다.
광주항쟁 시절 내가 잠시 정들었던 대학에서 해직되어 M시에 유배자된 기분으로 1년여 정도 살았던 적이 있었다. 야간 학교에 근무하는 탓에 낮엔 주로 방에 웅크리고 지내다가 밤에만 활동을 하며 지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하게 떠오르는 M시에 살던 당시의 추억들과 하숙집. 그런데 최근 그 근처를 지날 기회가 있어서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M시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때 마다 나는 그 하숙집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과 사라져 버린 것의 경계가 희미한 채로 내 의식을 흘러 다니고 있는 것이다.
나이들어 가면서 의식의 흐름은 나를 고향 H읍으로 더 자주 데려간다.
초등학교 4년까지 살던 언덕배기 기산 집과 오동나무가 서 있는 동네 우물터, 그리고 그 위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골목길, 길 옆에 키 큰 은행나무 한 그루, 하얀 접시꽃, 그리고 대문 앞에서 마치 흑백 사진 한 컷으로 세월 흐르기를 멈춰 버린 어머님 모습.
해마다 5월이면 나비 축제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내 고향 H읍과 그 옆을 흐르는 대경포, 그 무리들 중에 서 있는 나는 어느새 H 초등학교 학생이 되어 방과 후 그곳에서 미역을 감으며 여름을 보내는 내가 그곳에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진다.
정작 명절 때 가보면 내 고향 H 읍내의 그 시절 그곳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데 지금 이곳의 나는 그 시절로 의식이 흘러 공존하거나 그 시절의 나를,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현상들을, 아쉬움 가득 안은 채 바라보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처럼 하루 동안에 30년 세월이 의식의 흘러가듯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하룻밤 사이에 60년의 세월을 지금 이곳과 그때 그곳을, 경계 없이 내 의식이 흘러 다니는 현상들이 자주 일어나다보면 자칫 과거와 현실을 구별 못 하는 사람이 되고 말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요즘 나는 글자라는 기표가 동시대인에게 주는 공감과 이질감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본다. 훗날 19**-20**이란 내 출생과 사망 연보를 보면서 나에 관한 전기를 어느 작가가 쓰게 된다면 그는 내 작품에 갖는 단어라는 기표가 동시대인과과 공통성을 지니면서도, 그 어떤 기표에 애틋할 정도로 얽매어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질성의 나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광주”라는 도시가 1980년대를 살아간 광주 사람들에겐 :무거움“이라는 공통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그 무거움은 개인의 아픔과 체험만큼 이질성으로 나타난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첫사랑의 추억과는 다른 기표의 내 “첫사랑”이 종종 내 기옥 속에 나타나 나를 난감하게 한다. “첫사랑”이라는 기표를 떠 올릴 때면 어느새 의식의 흐름은 나를 중 2학년 만들어 고향집으로 데려 간다. 곧이어 앞집 피부 곱고 가슴 볼록한 1년 선배 여학생이 나타나고 그녀에게 밤새 쓴 내 연서를 그녀의 손에 쥐어준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랜다. 그런데, 다음날 그녀가 학교가서 친구 여학생들에게 소문내서 그 좁은 고향 읍내에서 내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게 헸던 내 첫사랑의 그 아가씨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