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 부터 30여년 전,
그러니까 그때가 월남 패망 무렵이었습니다.
사이공, 지금은 호치민, 시내
대통령궁 앞 노트르담 사원 뜰에서
그녀와 나는 눈물의 작별을 하였답니다.
"나를 잊어 달라 (Forget me, na)"고
몇 번이고 그녀에게 말하면서
나는 그 나라를 떠나야만 했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지금까지 나를 그리며
홀로 살아 왔다는 겁니다.
갓 태어난 아들과 강제로 격리되어
6년간의 참기 힘든 사상 교육과 집단 농장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사이에 태어난 아들, 다시 말해 라이 따이한과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아 왔다는 겁니다.
내 그 무엇이 그리도 당신 발목을 잡더냐고 물었더니,
"나를 잊어 달라 (forget me, na)"라는 내 간절한 부탁을
"나를 잊지 말아 달라(forget me not)"라는 말로 잘못 알아 듣고
그 당시 그리도 곱던 베트남 처녀가
백발 할망구가 되도록
나만을 기다리며 살아 왔다는 겁니다.
그런 그녀와 내 아들을 이번 호치민 시에서
내가 만나고 돌아 온 겁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현재 고국에 살고 있는 내 아내와 가족들에게는
절대로 비밀임도 아울러 밝혀 둡니다.
*베트남에는 월남 파병 군인들에게서 보다는 회사 파견 주재원이나 근로자들과 월남 여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소위, 라이 따이한이 상당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을 위한 우리 정부 차원의 배려는 거의 없는 형편이고, 이들을 위해 고생하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신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분은 라이 따이한들의 교육과 취업을 위해 많은 고생을 하시는데 이들 사이에서 그 분은 "라이 따이한의 아버지 또는 은인"으로 불리운다고 합니다. 그분 이름이 김영관 목사님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그때가 월남 패망 무렵이었습니다.
사이공, 지금은 호치민, 시내
대통령궁 앞 노트르담 사원 뜰에서
그녀와 나는 눈물의 작별을 하였답니다.
"나를 잊어 달라 (Forget me, na)"고
몇 번이고 그녀에게 말하면서
나는 그 나라를 떠나야만 했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지금까지 나를 그리며
홀로 살아 왔다는 겁니다.
갓 태어난 아들과 강제로 격리되어
6년간의 참기 힘든 사상 교육과 집단 농장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사이에 태어난 아들, 다시 말해 라이 따이한과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아 왔다는 겁니다.
내 그 무엇이 그리도 당신 발목을 잡더냐고 물었더니,
"나를 잊어 달라 (forget me, na)"라는 내 간절한 부탁을
"나를 잊지 말아 달라(forget me not)"라는 말로 잘못 알아 듣고
그 당시 그리도 곱던 베트남 처녀가
백발 할망구가 되도록
나만을 기다리며 살아 왔다는 겁니다.
그런 그녀와 내 아들을 이번 호치민 시에서
내가 만나고 돌아 온 겁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현재 고국에 살고 있는 내 아내와 가족들에게는
절대로 비밀임도 아울러 밝혀 둡니다.
*베트남에는 월남 파병 군인들에게서 보다는 회사 파견 주재원이나 근로자들과 월남 여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소위, 라이 따이한이 상당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을 위한 우리 정부 차원의 배려는 거의 없는 형편이고, 이들을 위해 고생하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신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분은 라이 따이한들의 교육과 취업을 위해 많은 고생을 하시는데 이들 사이에서 그 분은 "라이 따이한의 아버지 또는 은인"으로 불리운다고 합니다. 그분 이름이 김영관 목사님이라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