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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소리

김영관 2006. 1. 31. 11:18

  대학 재학 시절, 내가 평소 마음속으로 점을 찍어 두었던  그 남자가 "언제 차라도 한잔 나눌 시간을 내줄 수 없겠느냐?"고 내게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내심으로는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가? 이제야 말로 내가 쳐 놓은 거미줄에 네가 걸려 든 거다!!"라는 반가운 마음이면서도 겉으로는 수줍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예"라고 내가 그에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내 대답을 듣는 순간 그 남자는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게서 총총히 사라지는 겁니다.  그 일이 있는 후로 나는 그와 단둘이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가 그런 기회를 애써 피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이미 반백이 된 그 남자를 우연히 어떤 자리에서 만나게 된 나는 오래 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궁금증인지라, 그리고 이제는 그 궁금증을 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나이가 된 우리인지라, 그때 등을 보이며 돌아선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도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지 내 물음에  대뜸 이렇게 대꾸하는 겁니다. "차 한잔하자는 내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ㅎㅎㅎㅎ 이제와 그때의 일을 곰곰이 되돌아보니 "차 한잔 할 시간 좀 내 줄 수 없겠느냐?"라고 그가 물었는데, 내가 "예"라고 대답했으니.. 그에게는 그 말이 차 한 잔할 시간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 드려졌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영어 공부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부정으로 묻던, 긍정으로 묻던 영어는 승낙이면 "예스", 거절이면 "노"로 대답한다는 것만을 생각했던 겁니다. 우리말 식으로 받아들이면 그게 정반대일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내가 그때 생각을 못했었는지 원... 

  어쩜  그때 서로 차 한잔으로 우리 만남이 시작되었더라면 지금 우리 운명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별의 별 부질없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날씨는 아직 차갑지만, 분명 봄이 오고 있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