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배와의 첫 만남은 나의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담임 선생님께서 새로 우리 학교에 전학 온 학생이라며 근배를 소개했는데, 그는 우리 시골 아이들과는 뭔가 다른 옷차림을 한 귀티 나는 아이였다. 그 당시 가정 살림이란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가난 그 자체였다. 6.25 전쟁 이후의 나라 살림은 말할 수없이 가난해서 초등학교 교과서라는 것도 미국의 도움으로 출판된 것이다. 미국의 원조물자로 학교에서는 학생들 신주머니에 우유를 배급해주고 그걸 받아 온 아이들은 집에서 그걸 밥위에 쪄서 맛있게 먹곤 했다. 커피를 구호물로 받아서 어떻게 먹을 줄을 몰라 그냥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보고는 이렇게 쓴 것을 미국 사람들은 다 먹는 모양이라고 말했던, 정말 지금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일들이 불과 4, 50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다. 그리고 그 당시 겨울은 지금과는 달리 유난히 추웠고 내의 한 벌 변변한 것이 없어서 서로가 교실의 햇볕 드는 곳에 앉으려 했고 쉬는 시간이면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으려고 친구들과 작은 다툼이 있었고 다음 수업에 다시 추운 교실에 가서 앉아 있을 일이 심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근배는 우리가 엄두도 못내는 독구리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아무튼 근배는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보였다.
한번은 근배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우리 읍내 농협의 상무로 전근을 오게 되어 근배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집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과 과자들이 푸짐하게 많았다. 농협 사택에 살고 있는 근배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들인 우리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와의 만남도 잠시, 5학년말에 그는 어딘가로 또 아버지의 전근지를 따라 전학을 가고 말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니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가끔씩 도시로 떠난 근배가 보고 싶었다.
도시의 고등학교에 유학을 오게 된 나는 입학식 날 우연히도 화장실에서 근배를 두 번째 만났다. 변하긴 했어도 금방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근배는 내 마음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기적 같은 재회의 기쁨으로 우리는 같은 반에서 친하게 1년을 함께 보냈지만, 갑작스럽게 가세가 기울어, 나는 친구들에게 변변한 인사도 못 나눈 채 고향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오고 말았다. 내 열등감 같은 것이 전에 다녔던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서신왕래를 일체 단절케 만들었다. 근배와의 다정했던 두 번째의 만남이 이번에는 나의 단절로 끝나는 듯 싶었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도 제법 풀리게 되면서 점차 과거의 상처를 잊게된 나는 지방 대학에 진학하고, 그 동안 폐쇄되었던 삶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여러 서클에 가입하여 친구들을 제법 사귀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때는 영어 영문학과 학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서울의 H 대학에서 전국 영어 영문학회가 있다고 하여 우리과 동료및 후배들과 같이 상경하였다. 지금과는 달리 서울 한번 다녀오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H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정말 우연스럽게도 근배를 세 번째 만났다. 여기에서 그를 만나게 되리란 걸 나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3수 끝에 결국에는 H대학 정치
외교학과에 다닌다는 푸념 섞인 이야기와 함께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을 토로한 뒤 잠시 후에 우리들 모임이 있는 장소로 나를 찾아 오겠노라며 총총 걸음으로 사라진다. 약속한대로 잠시 함께 다녔던 고등학교의 한 반 친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또한 이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란다. 근배는 내가 운이 좋은 때문인지, 자신이 오늘 장학금을 받은 날이라며, 함께 상경한 친구들과 후배들을 먼저 내려보내고 자신과 한 잔하며 그 동안의 회포를 풀자 한다. 서울에 있는 여러 군데의 대포 집을 전전하며 곤드레 만드레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서로 연락하고 지내자는 약속을 하며, 그가 서울역까지 전송을 해주는 가운데 우리는 또다시 헤어졌다.
네 번째의 만남은 이러했다. 그 해 겨울 방학 때 근배가 고향에 내려 왔다고 전화를 했다. 우울한 표정의 그는 이제 학교를 휴학해야겠다고 말한다. 어머님의 별세, 그리고 아버지의 재혼, 가족간의 갈등을 잠시 말한 뒤 그래도 강하게 살아 보겠노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옛날의 근배가 아니었다. 눈빛은 목적을 상실한 듯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래도 그 날은 내 나름대로 서울에서 진 빚을 갚을 요량으로 그와 여러 군데 술집을 돌아 다녔다. 어떻게 헤어진 줄도 모를 정도만큼 우리는 술을 마셔댔다. 그리고 또 5, 6년 세월이 흐르도록 근배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내가 들어간 직장이 마음 같지 않아 때려치우고 시험 공부를 하는 등의 일로 잠시 주변 사람들을 찾아볼 여유가 없었다.
새로 직장을 얻은 후 약간의 세월이 지나고, 친구들과도 다시 연락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근배가 직장으로 찾아 왔다. 그와의 다섯 번째의 만남인 셈이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손에는 할부책 샘플 몇 권과 할부 신청서 따위가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의 전과 다른 태도에서 뭔가 조금은 인생을 살아온 터라 무슨 일인가 있어서 그가 나를 찾아 왔을 것이라는 걸 나는 직감했던 것이다.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근배가 되어 나를 찾아 온 것이다. 몇 가지 할부 책을 구입하고 내
딴엔 그에게 용기를 갖게 해준답시고 술을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는 술집 아가씨 출신의 어떤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노라며 "이런 것도 인생인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늘어
놓았다. 취중에 들은 이야기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다음 날 생각해 보니 그가 너무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도 이제는 다시 하나, 둘, 만나고 있는 터라 전화로 근배가 어떻게 된 거냐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들 대답은 한결같이 근배가 이제 사기꾼이 다 돼버렸으니 그가 찾아오면 냉정하게 대하라는 것이었다. 술 한잔 살 것처럼 친구들을 불러내서 친구들을 바가지 씌우고 그가 도망을 간다든지, 할부 책을 들고 다니면서 친구들에게 강매를 해대서 이미 자기들끼리는 골칫거리 인물로 소문이 다 돌았다며 내게도 조심하라는 이야기였다. 더욱더 가슴 아픈 일은 근배가 자기네들을 불러 내기에 모른척하고 나갔다가 술을 몽땅 마시고 계산할 때 자신들이 먼저 도망 나와서 그가 어떻게 처리하나를 밖에서 구경했는데, 근배가 상의를 벗기워 잡히고 그 집에서 멱살을 잡힌 채 끌려 나오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고소했던지 자기들끼리 박장 대소를 했다는 이야기를 그들이 들려주는 순간, 나는 귀를 막고 말았다. "그래도 너희들 형편이 더 나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 않았느냐"는 내 이야기에 "그래야 다시는 그 놈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그 친구는 전화를 통해 주었다.
이곳 도시가 민주 항쟁으로 소란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근배가 어떻게 사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이곳의 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 친구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근배의 근황을 물었다. 의사 친구는 의외의 질문을 한다는 듯, 그리고 내가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너 아직도 몰랐어? 근배가 자살한지 벌써 1년도 넘었는데..."
바쁜 삶 때문에, 접어
두었던 근배의 생각이 이 봄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철저하게 악하지도 못한, 그리고 역경을 모르고 자란 가정 환경 때문에 강한 인내심도 갖지 못한, 근배가 주변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우리 곁을 떠난 사실이 못내 가슴 아픈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경제 한파로 가뜩이나 움츠린 우리가 너무 자신의 껍질로 몸을 웅크린 채 주변 사람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일 것이다. 이런 어려운 때일수록 자신을 강하게 살아야
하며, 주변의 어려움도 내 일처럼 관심을 가져야겠다. 우리 주변의 삶의 낙오자도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임을 또한 잊어서는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