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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은 자유

김영관 2006. 6. 12. 07:35

  극작가 피란델로의 <헨리 4세>라는 극은 헨리 4세에 관한 사극이 결코 아니 랍니다. 헨리 4세라는 왕의 역을 주로 맡아서 하던 연극 배우가 말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게 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헨리 4세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자, 그의 친구는 그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 그게 재미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돈 들여 헨리 4세가 살았던 궁궐과 똑 같이 꾸며주고 친구가 마음껏 왕이라는 착각 속에 살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게 외국 작품 속에서 만의 일이 아니더라구요.
  우리 문인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의 단편소설에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답니다.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결혼의 꿈을 이루지 못 하고 고국을 떠납니다. 훗날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다시 고국에 돌아 온 그는 지난 날의 여인을 잊지 못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여인은 그 남자가 다른 여인과 결혼해서 외국으로 떠났다는 부모의 거짓말에 낙심하여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을 했답니다.
 그런데 옛 연인이었던 그 남자가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그 남자의 집안에서는 여 주인공 때문에 혼자 살다가 죽었으니 장례식에라도 참석하여 죽은 이의 넋을 달래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리하여 소복을 하고 옛 연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독자들이 이 여류 문인에게 이것이 본인의 이야기인가를 물어 왔답니다. 처음에 이 여류문인은 "무슨 소리인가? 작가는 허구적인 사실을 마치 내 이야기처럼 실감나게 쓸 뿐..."이라고 대답을 했는데 독자는 매우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작가 본인의 이야기였다면 훨씬 더 감동적이었을 텐데.........." 라며 아쉬워하더랍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독자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다른 독자들이 그런 질문을 해오면 그게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한 두 번 그리 말을 하다 보니 나중엔 소복을 하고 장례를 치뤄준 여인이 작가 자신이라고 믿게 되고, 옛 사랑을 못 잊어 홀로 살아간 연인은 실제로 존재했던 자신의 연인이 되어 버린 겁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 속에 너무 깊이 빠져 들다보니 스스로 주인공 행세를 하게 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고나 할까요?

 작가가 자신의 작품과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이런 일이 벌어 질 수도 있다는 가공의 이야기를 제가 한번 만들어 해본 겁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