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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에 여러 남자

김영관 2006. 8. 5. 07:02
  어느 날 존경하옵는 선배 문인 한 분이 술에 흠뻑 취해 내게 들려주시던 말씀이 얼마나 내 가슴에 와 닿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의라는 이름으로 목청 높이다가도 막상 어떤 일에 부딪치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하게 될 수 있는가를 그분 몸소 겪었던 체험이라며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 한번 들어 봐 주실래요?
 만원 시내 버스 좌석에 어느 부인이 창 밖을 내다보고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 주변에 젊은이들 몇 사람이 승객들 시선을 가로막고, 그 중 한 젊은이가 한 손에는 코트를 들고... 또 다른 손으로는 그녀 핸드백을 조심스럽게 열어 재치더라는 겁니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그 선배님이 아주 우연하게도 고개를 돌려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녀 핸드백에는 아주 빳빳한 지폐가 가득하더라는 거예요. 그걸 그 소매치기가 아주 기술적으로 빼내고... 여인은 그 순간 넋이 나간 듯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더라는 겁니다. 선배 문인은 평소 자기 글에 "사람은 항상 바르게 살아야 하고 정의의 편에서야 한다"며 마치 자신이 정의의 화신인양 떠들어대던 사람이었는데 그 장면을 보게 된 겁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소리쳐서 소매치기 당하는 이 여인을 구해야 줘야 겠다는 마음인데도.. 그렇지만 정작 그 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고 입 밖으로는 소리가 나오지를 않더라는 겁니다. 머리칼이 곤두서고, 당장에 라도 소매치기의 무서운 면도날이 자기 입을 가르는 기분이 엄습해오더라는 겁니다.
 그녀가 지갑의 돈을 다 털리고... 소매치기들은 다음 정차장에서 황급하게 내려 사라지더랍니다. 그때서야 선배 문인이 그 여인에게 소매치기 당한 사실을 알려주자 그 여인은 다음 버스 정차장에서 내려 뒤쫒아 가더란 겁니다.  그들이 잡혔으면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렇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평생 선배 문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며... 평소에는 목청 높히다가도 정작 불의를 보는 순간에 그걸 지적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에 자신도 놀랐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 일이 두고두고 자기 삶에 회한으로 남는다며 술이 취하면 자신도 모르게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 준다는 선배님 말씀에 일 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